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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의 경계...

어제 비오는 밤바다에 갔다왔다.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젼을 보았다. 혼자 밥 먹을 때는 넘 심심하잖아...대신 누구누구랑 밥 먹을 때는 텔레비젼 보지 맙시다...누구누구가 꿔다 논 보릿자루밖에 되지 않걸랑요^^

무진장 내리는 비를 호들갑 떨며 방송해대는 텔레비젼은 혹시 작년 방송의 재방송일 성싶다. 텔레비젼이 씨부리는 말대로라면 세상은 이미 훨씬 살기 좋아진 곳이거나, 아니면 세상은 살지 못할 곳 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퍼붓는 빗 속의 삶이 떠내려가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동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화난다. 밥 먹으며 체할까 싶어 그냥 꺼버렸다.

 

그리고 문득, 비오는 밤바다의 야릇한 동경이 마음 속에 꿈틀거리며 무거운 내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무얼까 이 기분...비오는 + 밤 + 바다...라는, 빗 속을 거니는 외로운 어떤 사람의 드라마틱한 기분에 젖어 들고 싶은 건가? 비오는 + 밤....에 누군가와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지만 공교롭게 그 누군가가 없는 이 애주가의 욕망의 왜곡된 표출인가? 아님 좁은 방에 혼자 있고 싶지 않은,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는, 빈 공간과 빈 시간에 대한 처절한 저항인가?

결론은, '그냥'....'그냥' 비오는 + 밤 + 바다...가 보고 싶은 거라 결론짓고 밖으로 나왔다. 지 맘에 안들면 달리다가도 서 버리는, 아스팔트에 청춘을 묻은, 낡은 차를 달래고 달래서 안산시 대부도로 향했다.

 

구름 뒤에서 몸부림치는 태양의 마지막 숨소리로 그나마 얕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굵은 빗발을 헤치며 이 몸을 싣고 달려가는 내 차 속에서 일말의 아늑함마저 느끼며, 달리고 또 달린다.

 

하늘과 바다가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도착한 바다는 지나가는 차만 없다면 하늘과 바다와 땅이 구분되지 않는 곳이었다.

낯선 곳에 와 있는 해방감? 아무도 없다는 편안함? 에구, 누구라도 있다면 그저 소주 한 잔이 그립기만 한 바다였다.

 

바다를 응시한다. 아니 어둠 속을 응시한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을 찾아 보고자 하는 어긋난 욕심에 어둠 속을 응시한다.

 

경계........

하늘과 바다의 경계.........하늘과 바다는 그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하늘과 바다는 왜 그 경계를 확인하려하냐고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확인하고 싶은 그 경계는 무엇이냐고 묻고 있었다. 

"너 맘 속에 수없이 그어진 그 경계에서 늘 자아와 타아를 구별하고, 너와 나를 구별하고, 이 쪽과 저 쪽을 구별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 경계에서 늘 타아와 너와 저 쪽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면서, 왜 여기서 또 하나의 경계를 찾으려고 하느냐"

 

자아와 타아가, 너와 내가, 이 쪽과 저 쪽이 다르지 않음을 먼저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아와 나와 이 쪽이 옳기에, 맞기에, 타아와 너와 저 쪽이 그르고 틀린 것이라며 스스로 늘 경계를 짓고 산다. 나의 그 경계들 속에서 난 나를 이야기하지 않고 너를 설득하려 한다. 난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항상 경계에 서 있으면서 경계로부터 자유로와질 수는 없을까?

수평선을 찾으려던 시선을 접고 빗소리와 파도 소리에 나를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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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가

 

아침에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하루. 아니, 어쩌면 지난 밤 꿈 속에서부터 시작된 하루일 것이다. 특별히 다를 것 없는 하루에 대한 찜찜한 느낌을 가지고,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수없이 쏟아놓는 상품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외치는 텔레비젼을 무의식적으로 켜면서 생각한다, ‘오늘은 얼마나 더울까?’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이다.


  경제가 이러쿵저러쿵, 썩어빠진 정치인들의 행보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누구라도 맞출 것 같은 날씨를 매우 심각하게 늘어놓는 일기예보, 이걸 구입하면 넌 멋지게 사는 거야라고 목청껏 외치는 상품 광고, 지난 해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텔레비젼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리 노력해 봤자 모든 것은 똑같으니 딴 생각하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 그래야 모두가 잘 산답니다”라고 근엄하게 충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웃긴다. 우리 부모님은 뼈빠지게 열심히 사셨지만, 텔레비젼이 말하는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뿐이겠는가. 산업역군이라는 칭송(? 누구에게 하는 칭송인지 모르겠지만)을 받으며 젊은 시절에 정말 열심히 살아온 이 땅의 노동자들은 아무도 잘 살지 않는다. 그냥 착하게 살고 아무 일 없으면 그게 잘 사는 것이라 믿으며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잘 사는 사회는 멀기만 하다. 도대체 언 놈들만 잘 사는 것인지.....대한민국의 텔레비전이면서도 분명 딴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일게다...너나 잘 하면 모두 잘 산다고 떠들어대는 걸 보면....

  

  텔레비젼을 보고 있으면,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 같다. “산다는 건 다 그런거야”식의...

  텔레비전은 지칠 줄 모르고 떠들어댄다. 월드컵 때는 빨간 옷을 입어야 한단다. 그리고 모두가 꼭짓점 댄스 정도는 출줄 알아야 한단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전쟁에 나간 영웅을 그리워하고 추앙하듯 12명의 태극 전사들을 성심껏 응원하는 것이 애국이며, 지상에서 ‘대한민국’은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소리 높여 외쳐댄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서는 동네에 어슬렁거리는 똥개마저도 가슴 벅찬 눈물을 흘리면서 애국의 마음을 가져야 한단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에게 진압의 방망이를 휘두르던 대한민국의,

  코리아드림을 꿈꾸며 고향의 가족을 떠나, 멀기도 먼 낯선 땅에서 밤낮으로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이주노동자들에게 살인적 단속과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자행하던 대한민국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외침을 한미FTA와 비정규직 법안으로 화답하는 대한민국의,

  생명의 땅을 일구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순박하게 살아온 이 땅의 농민들에게 미군기지 평택 이전을 군사력으로 강제 집행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누구가 가슴 깊이 ‘애국’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텔레비젼은 전깃줄에 힘주고 화면을 잔뜩 부라리며 ‘협박’한다.

  그 덕분에 적어도 나 역시 2002년 월드컵에서는 누구 못지 않은 ‘붉은 악마’였다. 진정 애국자의 마음으로 이탈리아 전에서 안정환의 헤딩슛을 보며 외쳤었다.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반복 주입식 교육이 무섭긴 무섭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지금도 별 고민없이 줄줄줄 되뇌일 수 있으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해야하나. 아마 이런 효과 때문에 지금도 교육판에서는 반복 주입식 교육이 전지전능한 불세출의 교육 방법으로 인정받고 그 힘을 대학입시수능 시험에서 발휘하고 있는 것일게다.


  이것이 맞나?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조건적으로 ‘태극기 앞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해야 하나? 더욱이 당연한 권리를 박탈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이 대한민국에게 누구나가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나?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고, 농민의 땅을 짓밟고, 장애인의 교육권과 이동권조차 내팽개치고, 시멘트보다 더 공고히 굳어 있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여성들의 권리는 모성과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있고, 이라크 민중의 삶을 전쟁의 광기 속에 집어놓기 위해 이 땅 민중의 자식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이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국기와 국가를 앞세워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며, 마치 그것만이 ‘모두’가 잘 사는 길이라고 떠들어대는 그 말이 진짜 맞는가 말이다. 내 마음 속에 정리되어 있지 않던 거부감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부터 의심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무언의 두려움과 망설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 같은 두려움과 망설임. ‘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선생이 그래도 되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애국의 마음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대통령령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가 규정되어 있다는데 내가 거부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애국이 나쁜 건 아니잖아, 단지 너무 심할 뿐이지’ ‘뭐 내가 그렇게 유별날 필요는 없잖아, 그냥 마음 속에서만 거부하면 되지 뭐’.......가능한 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본능이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뚜렷이 다가왔다. 모른 척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뒷머리를 땡기는 그 어떤 켕김을 혹마냥 달고 다니면서 말이다.


  난 애연가이며 애주가이다. 몸에 나쁘다는 담배와 간땡이만 붓게 하는 술은 끊을 수 없는 절친한 친구이다. 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똑같이 몸에 나쁘다는 탄산음료는 잘 먹지 않는다. 왜냐면 그나마 내 건강을 위해서이다. 역시 나의 선택이다. 이것이 나의 삶이며 나의 선택이고 나의 실천이다. 누구나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선택한다. 그 선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인의 의지이든 대중심리에 대한 추종이든. 또한 그 선택엔 자신의 삶에서 체득한 각자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 선택이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소외시키지만 않는다면 난 무엇이든 ‘선택’할 것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며, 대한민국에 대한 무의식적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외치는 독사의 혀....이것을 거부할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다. 담배와 탄산음료를 선택하듯이 나의 선택이다. 내 삶이 보다 가치있고 풍요롭게 되기 위한 나의 선택일 뿐이다. 어렵지만 말이다.


  무의식적인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 초등학교 때부터 나에게 각인되어 있는 맹세. 왜 난 단 한번도 고민해 볼 겨를도 없이, 나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판단의 선택도 없이, 이 대한민국에 대한 ‘맹세’부터 강요받아 온 것일까? 이걸 내가 의심하는 순간부터 그리고 선택하는 순간부터 왜 이 사회에서 난 ‘나쁜 놈’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부모가 경기도교육청에 민원을 접수시켰고, 조선일보가(지난 6월19일자 신문) 빨갱이 문제 교사로 낙인찍었으며,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중징계(파면, 해임, 정직)를 통보받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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