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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5

종합 : 사회적 페미니즘

 

 

1. 착취와 억압

 

 

맑스주의 분석은 현존하는 권력 관계를 경제적 계급 관계의 관점으로 역사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급진 페미니즘은 권력을 생물학적 현실로 다룬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의 기원과 가부장제적 뿌리라는 관점에서 권력을 분석한다. 바로 이러한 분석 안에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서로 독립적인 체계가 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동일한 체계가 되지도 않는다. 이 둘은 그 현실적인 형태를 놓고 본다면, 서로 의존적이다. 권력과 억압과 관련하여 자율적인 측면으로서 인종 측면에 초점을 두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분석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 논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억압에 관해 아래의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인종이 권력 규정에 있어 핵심적 요소로 나타나지만, 나는 인종에 관한 좀 더 포괄적인 분석을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성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여성 또는 소수 인종의 경우에서 억압과 착취를 동등한 개념으로 보았지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동등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착취는 남성과 여성의 경우에 적용되는 자본주의 계급 관계의 경제적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반면에 억압은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관계들 안에서 규정되는 여성과 소수자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착취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과 남성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임금 노동자로서 그녀의 착취로부터 비롯되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성 위계질서 안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존재를 어머니, 가사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로서 규정하는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인종 억압은 여성의 착취와 억압에 따른 사회의 인종 분리 속에 그녀를 위치시킨다. 억압은 착취를 포함하지만 (23) 보다 복잡한 현실을 반영한다. 권력(또는 그 반대 극인 억압)은 성, 인종 그리고 계급으로부터 도출되며, 이러한 것은 가부장제, 인종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 둘 다를 통해서 나타난다. 억압은 노동과 사회의 성적이고 인종적 분업이라는 위계적 관계를 반영한다.

 

나는 내가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 의존성을 파악하는 데 한정해서 논의를 진행해 갈 것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발전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부터 그리고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둘 다 모두 가부장제와 새로운 산업 자본주의 사이의 발전된 관계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규정해 보자면, 그것은 성과 계급, 사적인 것과 공적인 영역,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가족과 경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조건이라는 이분법을 깨고 나온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억압을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라는 착취 당하는 자로서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보았다. 그들은 여성의 억압을 같은 종류의 것으로 가정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가사 노예를 임금 노예와 동일한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둘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여성이 노동력을 가지고 노동을 하였을 때 그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원으로서 착취 당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녀가 가사 노예와 관련되었을 경우 그녀를 비임금 노예로 보았다. 자본주의가 여성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여졌지만, 거기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모두 어떻게 여성 억압을 규정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었다. 오늘날, 특히 급진 페미니즘의 통찰 덕분에 우리는 착취와 억압의 동등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임금 노동으로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맑스 고유의 범주를 사용할 경우, 가사 노예가 임금 노예와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착취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임금이 지급돼야 할 것이다.

 

맑스주의 분석에서 억압을 착취로 환원시키는 것은 경제적 계급 구조를 사회 권력 구조와 동등한 것으로 놓는 기초에 바탕을 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게 있어서, 여성 억압은 그녀의 계급 지위 (24) (그녀의 착취)보다 더 큰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지위는 구조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가부장제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계급 구조 안에서 맺어지는 위계적인 성적 사회 질서와의 특별한 관계이자 그 질서 안에서의 기능이거나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인간 활동에 초점을 두는 성적 사회 질서 내에서 계급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들(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사회 질서)은 함께 존재하며 잘못하여 분리시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의문들(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룰 때, (경제적 또는 성적인) 물질적 현재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리를 깨트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가부장제의 기초가 되고 있는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은 물질적 형태(성 역할 자체)와 이데올로기적 실재(이러한 성 역할을 규정하는 고정 관념, 신화 그리고 이념들) 모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떤 내부적 망으로 짜여져 존재한다.

 

여성의 현실적 존재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할 때, 자본주의만을 파악하는 일은(또는 가부장제만을 파악하는 일은) 여성 억압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Juliet Mitchell이 썼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폐지와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도전은 그 자체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변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폐지가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제도들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폐지가-옮긴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르게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성별 노동 분업은 소련, 쿠바 그리고 중국에 남아 있다. 이러한 사회들의 역사는 서로 다르고, 또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한계는 그 나라 문화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된다. 특히 쿠바와 중국에서 여성 삶의 실질적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이 이런 나라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못된다. 최근에 쿠바에서만 성별 노동 분업이 혁명의 특수한 문제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그리하여 정의상, 가부장제는 서로 다른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르게 성별 위계를 제도화함으로써 다르게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교차문화적(crosscultural)이다. 성 역할의 윤곽이 사회적으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권력은 남성을 통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모두 다 가부장제가 (25) 자본주의에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반면에 맑스주의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발생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가부장제, 즉 자본주의에서의 성 역할을 통한 남성의 권력은 핵가족 내에서 제도화된다. Mitchell은 이러한 것을 “선사시대에 살해된 아버지의 법칙(law of the prehistoric murdered father)”과 연관시키고 있다. 우리 삶의 여명기에 남성들 사이의 이러한 신비적 범죄 속에서 하나의 사회 집단으로서 가부장제의 확실한 뿌리를 찾으려는 와중에, Mitchell은 가부장제를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 속에 있는 유물론적 정식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제가 생산하는 이데올로기 관점에 좀 더 치우쳐 가부장제를 논의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그녀는 보편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뿌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문화는 오늘날 본래 이데올로기 형태 속에 존재하는 교환 체계를 통해 규정된다. Mitchell의 경우, 가부장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보편적 존재를 통해 자본주의에 선행한다. 그러나 나는 생물학적 차이에 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으로부터 도출된, 현존하는 사회의 성적 질서를 통해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남성들은 여성이 인류를 재생산한다는 사실로 해석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재생산과 이 재생산을 남성이 정치적으로 통제한다는 사실로부터 재생산 관계들은 여성 억압의 특수한 형태로 떠올랐다. 가부장제 문화는 사회의 성적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역사적 시기로부터 다른 역사적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날 사회의 성 분업은 몇 년 간의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의해 생겨난 현실적 차이들에 기초한다. 물질적 조건들은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규정하며, 그 다음에 이데올로기는 현실과 이전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거기엔 두 가지 방식의 흐름이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 역사의 생산물들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역사적 유물론은 생산관계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로부터 나타난 관계, 즉 재생산관계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생산관계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이 열쇠이다. 페미니즘 유물론을 통해 우리는 바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특수한 현실적 상황을 파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 (26) 계급적 관점의 맑스주의와 성적 관점의 급진 페미니즘 각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접근법들은 여성의 삶 속에 있는 관력 관계의 현실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2. 페미니즘 유물론의 선구자들 : de Beauvoir와 Mitchell

 

 

Simone de Beauvoir는 『제2의 성』(The Second Sex)에서 역사와 성 사이의 상호관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성 분업을 인간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존재론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학적 문맥 속에서 생물학 사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에 의해 규정되었고 그 자체 “타자”의 역할 속으로 던져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프로이트의 성 일원론과 엥겔스의 경제 일원론 모두 여성 억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고 있다. De Beauvoir의 초기 통찰들은 Juliet Mitchell에 의해 한층 더 발전하였다. Juliet Mitchell은 『여성의 토지』(Woman`s Estate)에서 계급적 사회주의 이론이 여성의 억압을 너무 협소하게 가족 안에 한정시키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녀는 여성의 문제를 여성이 일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즉 사적 소유와 계급착취의 제도의 측면에서 여성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네 가지 기본적인 구조, 즉 생산, 재생산, 섹슈얼리티 그리고 아이들의 사회화의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은 그녀의 사회적, 경제적 목적을 규정한다. 모성은 역사적 필요로서 가족을 내놓았고, 가족은 여성의 세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성적 불평등을 낳는 생산과 공적 삶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자본주의 가족은 여성의 억압적 조건을 강화한다. 가족은 자본주의의 대부분이 분열하는 가운데서도 조용히 유지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떠받친다. 가족은 생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대한 소비 시장을 공급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버팀목이 된다. 또한 가족은 사회의 신념 구조의 기초가 되는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평등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다. 비록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평등이 사회 경제적 현실과 거리가 멀지라도 말이다.

 

(27) Mitchell은 가족만의 해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의 상황이 필연적으로 사실상 qua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Mitchell은 “사회주의가 가족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사회적으로 승인된 관계들, 즉 가족 속에 강력하고도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는 관계들의 다양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Mitchell 분석의 중요성은 그녀가 여성이 재생산의 존재이며, 성적 존재이고, 개별적으로 노동하는 개인이며 또한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성 자신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경험하는 권력 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부분에 여성 억압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권력은 복잡한 실재(현실)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과 정치 경제학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필요를 느끼는 좌파이다. Mitchell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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