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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2.

사회화의 특정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 일반에게 그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며 그들에게 그 자리에서의 합리성을 강요한다. 이러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과 그 합리성 바깥에서 결정될 수 없다. 맑스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사람들은 따라서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서로 가치로서 관련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사물들을 동질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사물적인 외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서로 교환 속에서 가치로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서로 다른 노동을 서로 인간노동으로 동일시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행한다.” (Ⅱ.6/104f; 23/88, Herv. v. mir)

 

이러한 분석이 개인들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고 오히려 개인 그 자체가 해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으로 인용된 글(문장)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는『자본』의 초판에서 좀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 왜냐하면 개인들이 물질적인 사물을 가치라는 추상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개인들의 두뇌의 자연적이며 따라서 무의식적인 본능적 작동인데, 그 작동은 개인들의 물질적 생산의 특수한 방식과 이러한 생산으로 인해 개인의 위치가 정해지는 관계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Ⅱ.5/46)

 

여기에선 특히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장(Feld)과의 단절이 분명해진다. 경제적 현상들은 더 이상 거래하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즉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는 특정한 인간학과 연관해서 그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것 대신에 (개인들이 보통 결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는)거래의 형태내용(Formgehalt)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우선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 즉 개인들의 거래 행위의 기초가 되는 특수한 생산관계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개인들과 경제적 행위의 동기가 고찰될 수 있다.(주23-) 

 

노동이 노동생산물의 기치형태로부터 이윤과 이자까지 다양한 경제적 형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에 관한 서술은 맑스 노동가치론의 유일한 핵심이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가치론이, 그 본질적인 과제가 이윤의 기원을 셀 수 없는 노동(질적인 노동-옮긴이)의 특정한 양에서 찾게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양적인 노동량 이론(Arbeitsmengentheorie)으로서 파악된다면, 맑스는 “사회주의적 리카르도주의자”의 이론적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맑스는 좀더 근본적인 다양한 질문에 처하게 되는데, 그 문제는 사적 생산자들의 사회 속에서 일관성 있는 사회적 연관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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