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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2.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물음을 발전시키기

 

여성 억압 이론이 좋은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억압 받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Psychoanalysis and Feminis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가 보기에 “그것이 왜 일어났느냐”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제”라는 이 두 질문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질문들을 대체해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처음 질문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정말로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지금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그것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넘어서서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성적 위계와 억압이 왜 유지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는 서로 연관된 질문들이다. 둘을 분리시켜서 어느 한 쪽을 택한다면 대답의 일부분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와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현존하는 권력 배치를 규정하는 직접적인 관계, 즉 억압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왜와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44쪽) 이런 동일한 관계를 살펴볼 수도 있지만, 또한 실제적인 강제력으로서 가부장제 역사의 현존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질문은 필수적이다. 이 둘은 남성 우위의 특수한 측면들과, 그렇지만 여전히 (특수한 측면들의 이면에 있는-옮긴이 삽입) 보편적인 측면들을 상호 연관시킴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여성 억압에 관한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물음은 페미니즘 이론 속에서 통합되지 못했다. 급진 페미니즘은 권력 과정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묻기보다는 여성이 왜 억압 받고 있는가를 물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여성의 재생산 기능이 본래적으로 여성 억압의 중심이라고 대답했다. “권력의 성적 불균형은 생물학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은 재생산자들로서, 하나의 성 계급으로서 존재한다. 여성이 어떻게 억압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왜 억압 받고 있는가와-옮긴이 삽입) 구별되는 것이 아닌데, 이를 처음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사람이 티 그레이스 애킨슨(Ti Grace Atkinson)이다. 애킨슨의 개념에 따르면, 성 계급은 정치적 구조물(political construct)이 된다.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생물학적 사실 때문에 억압 받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재생산 “능력”(capacity)을 하나의 기능으로서 규정하는 암성에 의해 억압 받는다. “사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의 기능이 아니다. 아이를 낳는 기능은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기능이다.” 사회가 바로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과 더불어 그녀의 목적을 상실시킨다. 성 계급은 생물학적 억압이 아니라, 바로 문화적인 억압이다. 억압의 요인(the agent)은 인간의 성을 문화적 정치적으로 “헤테로 섹슈얼리티”로 정의하는 것이다. 가족과 결혼 제도, 그리고 헤테로 섹슈얼리티를 강제하고 보호하는 법적 문화적 시스템은 여성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토대이다.

급진 페미니즘이 여성이 현재 왜 억압 받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억압이 현재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고 있지만, 급진 페미니즘은 거의 대개 역사를 한 부분으로서, 즉 가부장적 역사로서 바라본다. 이러한 역사 파악은 여성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부장제 하나로-옮긴이) 통일시킴으로써 급진 페미니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우리는 다른 역사 시기에서 가부장제의 가부장적 형태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가 아니라 추상적인 역사에 머무르게 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는 봉건시대와 자본주의 시대에서 유사한 형태들을 나타났기도 했지만 다른 형태들로도 나타났다. 여성 억압의 형태는 이 두 시대 모두에 걸쳐 있지만 서로 구별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45쪽) "그 시대(봉건 시대)가 모계 쪽의 삼촌과 그 조카 사이의 관계들에 부여했던 감정의 중요성은 여성 쪽의 유대 관계가 거의 부계 친족의 유대 관계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았던 시스템의 한 표현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것의 한 증거로는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로 잘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 쪽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것에 대해 고정된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가족은 세대가 바뀌면 이름이 바뀌는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로흐에 따르면, 봉건적 관계들에서 초점을 맞춰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그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경제 관계 형태들과 더불어 가족은 점점 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안정성의 근원지로서 규정되었다. 가족은 초기 경쟁 자본주의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지만, 그 반면에 봉건적 관계 자체는 불안정한 가족 질서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을 설명해야만 한다. 하나는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된 역사, 즉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으로 명명되는 역사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시기에 의해 구조화되면서도 이런 시기를 구조화시키는 가부장제 역사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임(motherhood), 가사(housewifery), 그리고 가족은 여러 역사적 순간에서의 가부장제 표현 형태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전(前)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르게 규정되고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순간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속되는 실재(reality), 즉 특수한 형태로 이해되지 않는 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태가 되지 않는 실재의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실재는 하나의 추상이 되며 나아가서 하나의 왜곡된 일반화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가부장제가 서로 구별되는 계급 역사를 관통해 나가면서 현존하고 있다는 관점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특수한 순간에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가부장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이 가부장제는 결코 그 보편적인 현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을 밝혀주며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모든 사회적 변화가 이전 사회의 찌꺼기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가부장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배워야만 한다. 오늘날의 권력 기반은 자본주의가 성적 위계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억압을 통해, 그러나 동시에 (46쪽) 부분적으로 전(前)자본주의 가부장제, 더 특별하게는 봉건적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관계들을 통해 현존한다. 가부장제 관계들을 이해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 관계들을 그 특수한 역사적 틀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가부장제 역사의 요소들을 단일화시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추상의 수준에 머무르게 되지만, 보편적인 것을 언급하는 어떤 경우도 또는 요소들을 단일화시키는 어떤 경우도 하나의 추상이 된다. 권력 관계들의 특수성과 보편성 양자 모두 남성 지배의 특수한 동력이 포함된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이의 변하지 않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유사점들이 새로운 사회에서 지속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확신하고자 할 때 이 유사점들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이 전(前)자본주의 형태들과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는 전(前)자본주의 요소들에 도전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들 수 있는 예가 성별 노동 분업이다. 이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문맥 속에서 규정되고 있지만 특별히 자본주의 욕구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前)자본주의 형태들의 유지를 통해 우리는 가부장제 역사가 세워짐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점이 아니라 페미니즘 사회주의 관점으로 삶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 가족과 성적 위계라는 낙인이 더 이상 찍히지 않은 혁명적인 가족 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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