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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계속 같은 책(<<열하광인>>)에서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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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아끼는 소리는, 어떤 이들은 그것도 소리냐고 비웃지만 분명 내 귀에는 똑똑히 들리는 소리는, 글자를 쓰는 붓 소리다. 점을 찍을 때 획을 내리그을 때 둥글게 감아 올릴 때 붓이 내는 소리는 모두 다르다. 서책을 펴 먼저 서체부터 살핀다. 글자 위로 붓이, 그 붓을 잡은 손이, 그 손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필사의 즐거움은 단순히 멋지고 아름다운 글을 옮겨 적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글자의 의미를 새기기에 앞서 종이를 메워 나가는 붓 소리를 듣는다. 비 그친 하늘을 낮게 나는 제비처럼 날렵한 소리도 있고 바위로 누르는 무거운 소리도 있다. 이덕무처럼 작디작지만 맵시 있는 소리도 있고 박지원처럼 호방하고 거칠지만 짚을 건 다 짚는 소리도 있다. 그 소리를 하나하나 되살리며 붓을 놀린다. 어떤 놈은 전혀 다르다. 방금 쓴 글자를 그어 버리고 다시 벼루에 먹을 찍는다. 눈을 감고 허공에 글자를 쓴다. 손목에 힘을 빼고 두 어깨를 가지런하게 맞추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면서 쓰고 또 쓰다 보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글자를 적어 내려간 지은이의 심정까지 잡힌다. 밤을 꼬박 새워 필사를 해도 지치지 않는 까닭은 새로운 소리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지은이가 만든 소리를 내 서책에 옮겨 오는 작업은 거문고를 뜯고 폭포 속에서 소리를 가다듬는 일과 다르지 않다.

 

(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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