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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08
    메모 4.
    곰탱이
  2. 2015/06/08
    메모 3
    곰탱이

메모 4.

* "관계의 외면성이란 다른 것과의 관계의 외면성이며, 달리 말해 타자의 타자성이다. 즉 자기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타자성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라이프니츠 증후군>, 147쪽)

 

** "우리는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차이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대립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 173쪽)

 

*** 무엇인가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항상 이원론적인 대립구조를 정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은 늘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길들여져 있는 존재이며, 선은 권력이고 악은 비권력임을 이 구조 속에서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확실히 나카노는 '알기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 '느낌'으로 파악되고, 그 느낌에서부터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히라노 켄은 그것을 '정치와 문학'뿐 아니라, '조직과 개인', '예술과 실생활', '표현자와 실천자'라는 식으로 정식화했다. 이는 알기 쉽다. 이 이원적 도식 안에서 나카노는 아주 애매하게 보인다. 히라노는 나카노를 파악하고자 필사적으로 시도했으나, 결국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나카노의 저항은 이 이원적 대립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중 <나카노 시게하루와 전향>,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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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3

* 커뮤니케이션은 동시대의, 그리고 어떤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의 성원들 속에서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대화'는 '자기 독백'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하나'의 '동일한' 공동체의 '외화태'(소외형태)이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반드시 동시대의, 특정한 동일한 공동체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타자에 의해 '동일한 공동체'의 단순한 외화태(소외형태)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은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소통이며, 이를 추구하는 실천적 활동(Praxis)이 바로 '코뮤니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동의'를 넘어선 '초월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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