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추기

from diary 2011/02/09 15:46

 

그러고보면 친구들의 제안을 늘 거절하기만 했던 것 같다. 만나자는 약속에 흔쾌히 만나자 라고 했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열일곱살 때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열여덟살 때는 한 해 일찍 수능 친다고 공부한답시고 집에만 쳐박혀있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한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 때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나를 신경써줬고 배려해줬다. 열여덟살에 딱 한번 만났던가. 그 해에 친구들이 우리집 앞까지 찾아와 수능 잘치라고 응원해준다고 잠깐 본 거 외에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열아홉살 때는 친구들을 꽤 그리워했는데 다들 고3이라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여유가 없었지.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Y가 미대입시 준비한다고 다 같이 모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다다프로젝트 한다고 바빴고. 얼마전에 Y 없이 다 모여서 여행 계획을 짰는데 그게 흐지부지됐고 우리의 관계는 틀어졌다. 그리고 Y의 입시가 끝나고 모이려하니 각자 시간이 안된다. 조금 있으면 다들 떠나야하는데 시간이 안맞네. 아니 생각해보니 다들 떠나는것도 아니다. Y, J, H는 울산에 남아있으니까.

 

솔직히 뭐가 그리 급한건지 모르겠다. 안되면 다음에 만나면 되는데 어떻게든 만나려고 애쓰는게 이해가 안된다. '안되면 그만' 이런식의 나의 태도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최근에 깨닫고 오늘은 거절하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자 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일 한진중공업 촛불 집회 가기로 했는데 못 갈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을텐데 이번만큼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 아마 J 입장에서는 답답할거다. 누군가 주도적으로 만남을 추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만 지켜보니까. 아 나만 그런가. 솔직히 이번에 안되면 일년 후에라도 만날 수 있는거라 생각한다. 그러할 수 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지. 만나지 않는다해서 관계가 멀어지는것도 아니고. 설령 만나지 않아서 관계가 멀어지면 그건 어쩔 수 없는거다. 그 정도의 관계 밖에 안됐던거지. 이런식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법도 한 태도다. 생각해보니 이게 딱 W의 태도네. 나와 같은 태도였어? 하하.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다거나 애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내가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시키고 싶다면 그 사람들의 생각대로 맞춰줘야겠지. 어쨌든 이해는 안되지만 그들도 내가 이해가 안되는것은 마찬가지일것이고, 나에게 많이 맞춰줬으니까(그게 완전한 배려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도 조금은 맞춰야지. 그래. 맞춰가는게 관계일테니. 나 혼자 살 수 없으니. 하긴ㅡ.

 

그런데 B가 재수한다는 소식은 좀 놀라웠다. 자세한 설명 없이 졸업식 하고 바로 서울로 떠난다니. 그래서 내일 밖에 시간이 없다니. 솔직히 황당할 따름. 자세한 상황 설명도 해주지 않고 그런식으로 말하니까 조금 서운하다. 짜증도 좀 나고. 평소 같았으면 재수를 왜 해? 라고 말할텐데 그건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말하는것이라는걸 최근에 깨닫고 (최근에 깨달은게 꽤 많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말못할 사정이라는게 있는거겠지.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도 있는거고. 그걸 이해해주는게 친구인거겠지. 친구. 친구. 친구…. 어렵군. 근데 정말 재수는 할게 못되는데!

 

 


 

내일 오전에는 카메라 들고 학벌사회를 조장하는 교문 앞 플랜카드를 다 찍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부산 한진중공업 집회에 갈 예정이었고. 둘 다 물건너갔네. 솔직히 친구들과의 만남보다 이러한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데 어이없는 생각인가. 친구들을 늘 내 곁에 있어주며 이해해주는 존재 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근데 그러한 착각을 하고 사는건 참 행복한일인데. 결국 그 한계를 직시하며 살아야한다니 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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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9 15:46 2011/02/09 1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