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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27
    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만주개장수
  2. 2005/08/27
    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만주개장수
  3. 2005/08/27
    인권
    만주개장수
  4. 2005/08/27
    민주주의
    만주개장수
  5. 2005/08/18
    소비는 금욕의 파트너
    만주개장수
  6. 2005/08/18
    沒個性을 强要하는 軍隊라는 制度
    만주개장수
  7. 2005/08/18
    보편적 인권
    만주개장수
  8. 2005/08/11
    평화선언
    만주개장수
  9. 2005/08/11
    沒個性을 强要하는 軍隊라는 制度
    만주개장수
  10. 2005/08/11
    노동자 세상을 원하는가
    만주개장수

폭력적인 남성 우위 사회

'남성 우위 사회'는 오직 성을 잣대로 삼아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수하다고 판단하고, 남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같은 직업이라도 남성이 높은 임금을 받는 사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남녀 성의 역할에 대한 차별을 사회적으로 용인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남성의 지배가 통하는 체제, 남성이 여성보다 큰 권력을 쥐고 남성과 여성의 성격까지 구별하면서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교육에서는 남자다움을 특히 강조했다. 남자다움이 군국주의를 떠받치는 힘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전쟁터에서 남자답게 전사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겨졌다.

일상생활에서의 폭력은 전쟁으로 통하는 길을 용납하는 기초가 된다. 작은 폭력은 점차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성이 여성에게 행하는 폭력은 전쟁의 폭력과 뿌리가 같은 것이다.

 

- 아키 유키오 '비폭력 교과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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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평화주의인가, 힘에 의한 사회정의인가

기독교의 일파인 퀘이커교도는 절대 평화주의와 비전주의(非戰主義)를 신조로 삼고 있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퀘이커교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개인적 윤리로서 살인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써서라도 사회 정의를 지켜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절대 평화주의에 의한 평화는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생기는 평화이며, 신의 나라의 평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제적 평화일 뿐이다. 사회 정의를 확립하려면 사랑뿐만 아니라 힘이 필요한데, 절대 평화주의자는 힘에 호소하기보다 불의를 견디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퀘이커교도는 '힘에 호소하기보다 불의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견디든가, 불의를 가하든가'라는 문제라고 대답했다."

 

- 이시다 유 '평화의 정치학(平和の政治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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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 人權의 存在와 正當性은 무슨 運星 같은 데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人間 相互間의 行爲와 바람직한 社會 構造에 關한 理想은 歷史의 흐름 속에서 開明된 個人들이 생각해 내고 가르쳐 온 것입니다. 歷史的 經驗과 아름다움과 造和를 渴求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런 理想과 信念은 理論으로서는 선뜻 받아 들여졌지만 動物的 本能에서 벗어나지 못한 같은 人間에 依해 恒常 蹂躪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人類 歷史의 많은 部分은 人權을 爲한 싸움으로 點綴되어 있으며, 이런 鬪爭은 한番도 窮極的 勝利를 爭取하지 못한 永遠한 鬪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에 싫증을 낸다면 그것은 곧 그 社會의 破滅을 意味합니다.
오늘날 人權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主로 다음과 같은 것을 指稱합니다. 他人이나 政府의 任意的 權利 侵害로부터의 個人 保護, 勞動權과 勞動을 通해 適當한 收入을 얻을 수 있는 權利, 討論과 敎授의 自由, 政府 構成에 對한 個人의 適切한 參與 等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이 같은 人權이 理論的으로는 保障되고 있지만 數많은 形式主義的, 法的 策略에 依해 한 世代 前보다도 훨씬 더 甚하게 蹂躪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주 言及되지는 않지만 앞으로 대단히 重視될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다른 人權이 있습니다. 옳지 않거나 破壞的으로 判斷되는 活動에 協力하지 않을 個人의 權利 또는 義務가 그것입니다.
이와 關聯해 첫째로 軍 服務를 拒否해야 합니다. 나는 道德性과 誠實性이 非凡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性情 때문에 國家 機關과 衝突을 빚는 境遇를 알고 있습니다. 獨逸 戰犯을 다룬 뉘른베르크 裁判은 政府의 命令에 따라 行動했다고 하더라도 刑事 訴追를 免除받을 수 없다는 原則을 默示的으로 認定하는 바탕에서 進行되었습니다. 卽 良心이 國法의 權威를 代替하는 것입니다.
-後略

 

-아인슈타인 '나의 世界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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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얼마나 <소수자에게 열려> 있는지, 소수자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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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는 금욕의 파트너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혐오하고 적대시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자 계급에게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과한 기쁨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마초와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마초를 통해 얻는 기쁨은 물질적 소비의 기쁨을 희석할 수도 있었다. 소비는 금욕주의가 조장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금욕과 마찬가지로 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보다 많은 소비를 위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시간을 연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비는 금욕의 파트너였다.
대마초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협하는 존재로 비추어졌다. 자본주의는 대마초를 거두는 대신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대마초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극적으로 완화시키면서도 대마초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다. 담배의 미덕은 대마초보다 훨씬 기쁨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에도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담배가 대마초보다 해롭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금욕을 둘러싼 계급 간의 불화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부터 빚어졌으며 부단한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 대중의 지위는 향상되었지만 금욕적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때는 없었다. 대마초는 바로 그 억압과 저항 사이에 위치해왔다.
- 후략


- 유현 '대마를 위한 변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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沒個性을 强要하는 軍隊라는 制度

...... 내가 獨逸의 政治制度에서 값지게 생각하는 것은 個人이 病들거나 困窮에 處할 때 그에 도움이 되는 對策을 한層 폭넓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虛飾에 휩싸인 人間의 삶에서 참으로 값진 것은 政治制度가 아니라 創意的이고 知覺이 있는 個人, 卽 個性인 듯하다.
大衆이 생각도 느낌도 다 같이 무딘 채로 남아 있을 때 그런 個性만이 高潔하고 氣品 있는 것들을 創造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集團 生活의 가장 좋지 않은 形態로서 내가 嫌惡하는 軍隊 問題로 話題가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밴드의 旋律에 맞춰 四列 縱隊로 行進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餘地없이 輕蔑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큼직한 頭腦를 갖게 되었다면 이는 오로지 失手 때문이다. 그에겐 保護膜이 없는 脊髓만 있어도 될 것이다.
文明의 災殃을 상징하는 이런 行爲는 可能한 限 가장 빠른 時間 안에 없어져야 한다. 命令에 따라 發揮되는 勇猛性과 無分別한 暴力, 愛國心이란 이름으로 恣行되는 온갖 메스껍고 어리석은 行爲야말로 내가 몸서리치게 嫌惡하는 것이다. 나에게 戰爭이란 얼마나 嫌惡스럽고 卑劣하게 비치는가! 나는 그런 可憎스러운 일에 끼어드느니 차라리 亂刀질을 當하겠다. 나는 人類를 높이 評價하기 때문에 萬若 商業的, 政治的 利害 關係者들이 敎育과 言論을 通해 사람들의 健全한 意識을 組織的으로 墮落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惡鬼는 오래 前에 사라졌을 것으로 믿는다.
-後略

-아인슈타인 '나의 世界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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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인권

어떤 나라든 인권 상황이라는 게 그 나라의 지배 계급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인권이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인권, 인권 해도 인권이 다 좋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인권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실은 지배 계급의 정치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人權은 처음부터 國家 權力과의 對抗 關係 속에서 태어난 槪念이다. 그리고 나는 階級 社會에서 普遍的인 人權이란 存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世界人權宣言文의 私有 財産의 權利나 知的 財産權 같은 건 事實 매우 資本主義的인 槪念이다. 人權의 槪念은 歷史的으로 變해 왔고 앞으로도 變해 갈 것이다. 人權 運動의 于先 課題는 資本主義 社會를 爲해 만들어진 人權 槪念을 普遍的인 人權 槪念으로 바꾸는 일이다. 

 

보편이라는 말은 참 폭력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반드시 힘 센 놈이 강요하게 되어 있다. 서구 자본주의 강국들이 제3세계에 침략해서 자원 같은 걸 막 가져가면서 자본주의의 틀을 잡았는데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가톨릭의 보편적 가치다. 보편을 강요하고 보편의 이름으로 자기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거다. 물론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사회 구성원 간이나 나라들 간에 이해 관계의 대립 조건 속에서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게 불가능하다.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을 때 한쪽 인권을 보장해 주면 다른 쪽 인권은 무시되는 법이니까. 기본적으로 지배 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지배 계급의 기만일 뿐이다. 결국 이해 관계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하는데 결국 계급의 문제다. 원칙적으로 계급이 없어지고 계급 지배가 없어지지 않는 한 보편적 인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서준식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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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선언


 


전쟁에서 승리를 획득하기보다는 평화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반군국주의자들이며 반식민주의자들이며, 반종교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은 2차대전 전에 "당신들의 전쟁도 반대" "당신들의 평화도 반대"라는 요란한 제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여전히 옳다.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상대편에 굴욕적인 자세를 강요하는 강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은 이 점을 확인시켜 주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점을 계속 확인시켜 줄 것이다. 강제로 평화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은 쪽은 두고두고 복수할 기회를 노릴 것이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여전히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와 유사한 "평화"를 얻기를 원한다. 이는 정말 한심한 착각이다. 이 두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착각에 빠져 자만해서는 안 된다.



-후략

알랭 쥬프로와_Alain Juff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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沒個性을 强要하는 軍隊라는 制度

...... 내가 獨逸의 政治制度에서 값지게 생각하는 것은 個人이 病들거나 困窮에 處할 때 그에 도움이 되는 對策을 한層 폭넓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虛飾에 휩싸인 人間의 삶에서 참으로 값진 것은 政治制度가 아니라 創意的이고 知覺이 있는 個人, 卽 個性인 듯하다.
大衆이 생각도 느낌도 다 같이 무딘 채로 남아 있을 때 그런 個性만이 高潔하고 氣品 있는 것들을 創造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集團 生活의 가장 좋지 않은 形態로서 내가 嫌惡하는 軍隊 問題로 話題가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밴드의 旋律에 맞춰 四列 縱隊로 行進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餘地없이 輕蔑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큼직한 頭腦를 갖게 되었다면 이는 오로지 失手 때문이다. 그에겐 保護膜이 없는 脊髓만 있어도 될 것이다.
文明의 災殃을 상징하는 이런 行爲는 可能한 限 가장 빠른 時間 안에 없어져야 한다. 命令에 따라 發揮되는 勇猛性과 無分別한 暴力, 愛國心이란 이름으로 恣行되는 온갖 메스껍고 어리석은 行爲야말로 내가 몸서리치게 嫌惡하는 것이다. 나에게 戰爭이란 얼마나 嫌惡스럽고 卑劣하게 비치는가! 나는 그런 可憎스러운 일에 끼어드느니 차라리 亂刀질을 當하겠다. 나는 人類를 높이 評價하기 때문에 萬若 商業的, 政治的 利害 關係者들이 敎育과 言論을 通해 사람들의 健全한 意識을 組織的으로 墮落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惡鬼는 오래 前에 사라졌을 것으로 믿는다.
-後略

-아인슈타인 '나의 世界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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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세상을 원하는가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또 고용시장 유연화가 이루어져야 경제가 산다고 한다.
저 놈들은 왜 당당하고 뻔뻔한지 아는가.
왜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아는가.
노동계급에게 혁명의 전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계급의 원칙과 변혁의 열망이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노동자 세상을 원하는가.
그러면 단결하고 투쟁하라.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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