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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혁명가의 과제

우연하게 미국인 철학 연구자 앨런 재닉(Allan Janik)과 영국인 철학 연구자 스티븐 툴민(Stephen Toulmin)이 함께 쓴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Wittgenstein's Vienna, 1973,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2005)을 보게 됐다. 총 51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라, 처음엔 대강 분위기 파악만 하려고 훑어보다가 빠져들고 말았다.

 

이 책은 1장 문제와 방법에 관하여를 넘기고 나면 19세기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상황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150쪽 이상의 분량이다. 당시 정부와 부르주아의 기만성과 이중성을 보여주는 대목, 질식할 것 같은 당시 상황을 조롱한 사상가 카를 크라우스, 음악을 무기로 맞선 쇤베르크, 미술 양식으로 대응한 클림트와 분리파 등등 눈을 떼기 어렵게 만드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그리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첫 저서 <논리철학논고>를 이런 시대 상황의 산물로 재해석하는 대목이 이어진다. 이 재해석을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듯이 윤리 문제를 고민한 철학자이며 <논리철학논고>는 사실과 윤리(가치) 영역을 분리하고 윤리는 말할 수 없고 다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ber muß man schweigen)는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이 전혀 다른 뜻을 담게 된다. 윤리에 대해 헛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지, “형이상학자들이여, 입을 다물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구절 만큼은 아니지만, 이 책의 마지막 구절도 아주 멋지다.

 

어떤 특수한 상황이 여전히 내적 개선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시점, 혹은 아예 가망이 없어서 진정한 혁명적 상황으로 변모하게 되는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가피하게도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달리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일 20세기의 경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음에 틀림없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점차 그 속도가 빨라지는 역사적 변화의 시기에는,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과학적이든, 지성적이든 어느 분야를 가리지 않고, 혁명에 착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새롭고도 중차대한 책임이 부여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는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의 결과가 단지 하나의 정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체제를 또 다른 유사한 체계로 대체한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더 많은 무언가를 성취한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후대 역사가들이 20세기를 평가하면서 정치, 예술, 사상 등의 분야에서 전개된 우리의 모든 비판과 번민과, 그리고 혁명이 단지 무능한 왕(King Log)을 폭군(King Stork)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한글 번역판 452-453쪽)
2005/07/13 18:14 2005/07/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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