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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

뒤늦게 읽게 됐는데,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 대한 아주 상식적이고 분명하면서도 설득력있는 비판 글이다.

손호철 교수는 <제국>이 내세우는 가설을

  • 가설 1. 제국과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며 필연이다.
  • 가설 2. 제국과 지구화는 역사적 진보이다.
  • 가설 3. 따라서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이다.
  • 가설 4. 우리의 대안은 (반지구화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는 것, 이를 통해 대항지구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 지구적 시민권 2) 사회적 임금권 3) 재전유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로 정리한다. 그리고

  • 가설 1에 대해, 미국 부시 정부를 볼 때 제국주의가 끝났다는 것에 회의적이라고 지적한다. 또 하트와 네그리도 최근에는 제국이 필연적이라는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서 미국이 제국주의로 나가는 걸 인정하고, 제국으로 나아가지 않는 '어리석음'을 통탄한다고 덧붙인다.
  • 가설 2에 대해서는, 제국의 진보성의 근거로 두 사람이 제기한 것이 사실과 먼 낙관주의라고 비판한다. 손호철을 따르자면, 하트와 네그리는 지구화가 1)북에서 남으로의 자본유동성을 통한 균등화와 2)남에서 북으로의 노동유동성(이주)을 통한 균등화를 통해 다중의 실존적 조건을 균등화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제국이 해방의 기회를 과거보다 훨씬 많이 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역사적 진보라는 것이다. (진보라는 근거가 이렇다면 정말 심히 어이없다.)
  • 가설 3에 대해, 하트와 네그리는 인도 문제에 대해 평할 때 마르크스가 보여주었던 유럽중심주의에 오염되어 있고 좌익관념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주권국가를 형성한 이후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진보성을 잃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신식민주의에 맞서는 민족주의의 진보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손호철은 지적한다. (물론 손호철이 민족주의의 폐해를 인정하지 않거나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가설 4에 대해서는, 반지구화와 대항지구화가 배타적이고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99년의 시애틀 반세계화 투쟁을 들고 있다.
  • 결론적으로 손호철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대안은 지구적 시민권과 같은 대항지구화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해야한다는 식의 좌익관념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본의 지구화에 대항해 국지적인 것, 국지적인 민중생존권을 방어하는 반지구화투쟁과 단순한 반지구화 투쟁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민중적인 대항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는 대항지구화투쟁을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고 주장한다.

 

추가: (9월9일 오전)

 

김강님이 덧글을 달아놓으셔서 부연이 필요합니다. 덧글 내용은

 

하트와 네그리는 반세계화 운동이 역사적 반동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손호철 교수가 약간 오버를 한 듯 하군요. 국지적인 반세계화 투쟁이 오직 국지성에만 매몰되는 것을 비판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손호철에 대한 반비판이 자율평론 게시판 어딘가에 있었는데...^^

 

역시 반동적이라는 게 예민한 문제입니다. 반동적이라는 부분은 원문 44쪽, 번역본 81쪽입니다. 원문은

 

Today the operative syllogism at the heart of the various forms of "local" Leftist strategy seems to be entirely reactive: If capitalist domination is becoming ever more global, then our resistances to it must defend the local and construct barriers to capital's accelerating flows. From this perspective, the real globalization of capital and the constitution of Empire must be considered signs of dispossession and defeat.

We maintain, however, that today this localist position, although we admire and respect the spirit of some of its proponents, is both false and damaging.

 

문제의 표현은 reactive입니다. 반동적이라는 말은 보통 reactionary를 쓰는데 여기선 다릅니다. 하지만 reactive 또한 반동적이라는 뜻이 배제된 단어는 아닙니다. 사전을 보면, “반작용을 나타내는, 반발하는; 반동적 경향의; 복고적인” 등 대략 3가지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트와 네그리가 강조한 의미는 아마도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반작용적이라는 게 반동적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건 두 사람이 지역적 좌파 전략이 “false and damaging”(그릇됐고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번역자 윤수종은 “오늘날 다음과 같은 '국지적'인 좌파전략의 다양한 형태의 핵심에 작동하는 추론은 완전히 반동적인 것 같다”고 옮긴 듯 합니다.

 

추가: (9월12일 오후)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 42쪽부터 46쪽까지를 덧붙입니다. 제가 한글 번역본이 없는 관계로 직접 번역해봤습니다.

 

*-----------*

 

1.3 제국내 대안들(Alternatives within Empire)

헤겔을 지분거려보자면, 제국 건설이 그 자체론(in itself) 좋지만 그 자체를 위해선(for itself) 좋지 않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제국주의 권력 구조의 가장 힘있는 작용 한가지는, 지구의 대중들을 서로 맞서는 진영들로 또는 서로 싸우는 실로 수많은 정당들로 나눔으로써 그들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배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무리들은 자신들의 이해가 자신들의 국가적 정체성 및 제국적 운명과 전적으로 얽혀있다고 믿도록 유도됐다. 그래서 근대 권력 구조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반역과 혁명의 사례는, 착취에 맞서는 투쟁을 국가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함께 일으킨 것들이다. 이런 종류 사건에서는 공통의 해방 욕구로 단결하게 되는 마술적인 순간을 위해 인간성(휴매니티)이 출현했고, 우리는 근대 지배 구조(메카니즘)가 최종적으로 파괴될 미래의 찰라를 포착한 듯 했다. 반역을 꾀하는 대중들, 그들의 해방 욕구, 그들의 대안 건설 시도, 그들의 제헌 권력 요구들은 최고의 순간에 국가 지배, 식민 지배, 제국적 지배의 구별을 넘어서 관계들의 국제화와 지구화를 지향했다. 우리 시대에 다중이 작동시킨 이 욕구는 제국 건설에 의해 (기이하고 왜곡됐지만 현실적인 방식으로) 처리됐다. 제국 건설과 제국의 전세계적 네트워크는 근대 권력 기계에 맞서는 다양한 투쟁, 그리고 특히 다중의 해방 욕구가 추동한 계급투쟁에 대한 응답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중이 제국의 형성을 불렀다.

 

하지만 제국이 그 자체론 좋다고 말하는 것은 제국 그 자체를 위해 좋다는 뜻이 아니다. 제국이 아마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종말을 가져오는 데 구실을 했겠지만, 그럼에도 제국은 많은 면에서 자신이 파괴한 것들보다 더 잔인한 착취에 바탕을 둔 그 나름의 권력 관계를 구축한다. 근대성의 변증법의 끝은 착취의 변증법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다. 오늘날 인간성 거의 대부분이 어느 정도까지 자본주의적 착취의 네트워크에 흡수됐거나 종속됐다. 이제 우리는 엄청난 부를 장악한 극소수와 무기력의 한계에서 가난하게 사는 다중들의 구별이 더 심해짐을 목격하고 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억압과 착취의 지리적, 인종적 경계들이 여러 측면에서 쇠퇴하는 게 아니라 지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모두를 인식함에도 우리는 제국 건설이 그 이전의 권력 구조들에 대한 어떤 향수를 일소하기 위한 일보 진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구적 자본으로부터 보호하려고 국민국가를 되살리려는 시도처럼 낡은 제도로 돌아가는 데 관여하는 정치 전략을 거부하기 위한 진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그 이전의 사회 형태와 생산 방식보다 더 낫다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제국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새 상황에서 해방의 잠재력이 더 커졌다는 인식에 근거할 뿐 아니라 이전 사회의 종교적이고 엄격한 위계질서에 대한 건강하고 올바른 거부감에도 근거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우리는 제국이 잔인한 근대 권력 체제를 일소하고 해방의 잠재력을 높이는 걸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테제를 주장하면서 좌파내 우리의 친구들과 동지들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1960년대 이후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적 좌파의 현재의 오랜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지배하는 나라들과 그에 종속된 나라들 내부의 비판적 사상의 큰 부분은 종종 투쟁의 국지화에 대한 정치적 분석에 근거해서 사회적 주체 또는 국가적이고 지역적인 집단의 정체성에 뿌리를 둔 저항의 장소들을 재구성하려 했다. 이런 주장들은 때때로 '장소에 근거한' 운동 또는 정치 측면에서 구성됐는데, 이 속에서 장소의 경계들은 (그것이 정체성으로 인식됐든 아니면 영토로 인식됐든) 지구적 네트워크의 무차별적이고 균질적인 공간에 맞서는 것으로 제기된다. 다른 때에는 이런 정치적 주장들은 좌파 국가주의의 오랜 전통의 모습을 취하는데, 이 국가주의에서 국가는 (최선의 경우) 외국 자본 그리고/또는 지구적 자본의 지배에 맞서는 주요 방어 체제로 인식된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국지적' 좌파 전략들의 핵심에서 작동하는 논법(추론)은 전적으로 반작용적인 듯 하다. 자본주의의 지배가 날로 더 지구화하면 그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국지적인 것을 지키고 점점 빨라지는 자본의 흐름에 걸림돌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선, 자본의 진정한 지구화와 제국 구성이 빼앗김과 패배의 표시로 여겨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국지적 태도가 그릇되며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이런 태도를 지지하는 이들 일부의 정신을 칭찬하고 존중하지만 말이다. 이런 태도가 그릇된 것은 무엇보다 문제가 서투르게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많은 묘사를 보면, 지구적인 것은 균질화와 무차별적인 정체성을 수반하고 반면에 국지적인 것은 이질성과 차이를 보존한다고 가정하면서, 지구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을 나누는 잘못된 이분법에 의지해 문제가 제기된다. 종종 이런 주장에서 암시되는 것은, 국지적인 것의 차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럽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차이의 기원이 확실히 존속한다는 가정이다. 국지적인 차이들은 현재 상황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이고 지구화의 침입에 맞서 지켜지거나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 아래서 국지적인 것을 옹호하는 많은 주장들이 전통적인 생태학의 용어들을 차용하거나 심지어 이 '국지적' 정치 기획을 자연과 종다양성 옹호와 동일시한다고 해서 놀랄 게 없다. 이 관점은 사회적 관계들과 정체성들을 고정시키고 낭만화하는 일종의 원시주의로 쉽게 옮겨갈 수 있다. 집중해야 할 것은 이게 아니라 바로 국지성의 생산, 곧 국지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정체성들과 차이들을 창출하고 재창출하는 사회적 기계다. 국지성의 차이들은 앞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런 것도 아니다. 도리어 생산 체제의 결과들이다. 지구성도 이와 비슷하게 문화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 균질화 측면에서 이해하면 안된다. 국지화처럼 지구화도 정체성과 차이의 생산 체제 또는 진정한 균질화와 이질화의 체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구화와 국지화의 차이를 표시하는 더 나은 뼈대는 흐름과 걸림돌의 서로 다른 네트워크들을 지시할 것이다. 이 네트워크에서 국지적인 계기 또는 전망은 영토를 재확장하는 방벽과 경계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지구적 계기는 탈영토화하는 흐름의 이동성에 특권을 부여한다. 어떤 경우든, 어떤 측면에서 자본과 제국의 지구적 흐름 에 있고 이 흐름으로부터 보호되는 국지적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지구화에 저항하고 국지성을 지키는 좌파 전략은 또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국지적 정체성으로 보이는 것들은 자율적이지도 자결적이지도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기계의 발전에 밑거름을 제공하고 이 발전을 후원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기계에 의해 작동하는 지구화 또는 탈영토화는 사실 국지화와 재영토화에 반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차별화와 일체화의 유동적이고 변조하는 회로를 작동시킨다. 국지적 저항 전략은 적을 잘못 지목하고 그래서 감춘다. 우리는 결코 관계들의 지구화 그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말했듯이 좌파 국제주의의 가장 강력한 세력들이 이 과정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왔다. 도리어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지구적 관계 체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는 전략이 해를 끼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전략은 제국 내부에 존재하는 진정한 대안들과 해방의 잠재력을 모호하게 하고 심지어 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를 찾는 시도를, 우리의 정치를 위한 정화를 상상하는 관점을 최종적으로 처리해 버려야 한다.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서 우리의 분석을 지구적 다중의 힘에 기초해 제국의 복잡함 속에서 균질화하는 흐름과 이질화하는 흐름을 직면하는 게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더 낫다.


1.3
Alternatives within Empire

Flirting with Hegel, one could say that the construction of Empire is good in itself but not for itself.[1] One of the most powerful operations of the modern imperialist power structures was to drive wedges among the masses of the globe, dividing them into opposing camps, or really a myriad of conflicting parties. Segments of the proletariat in the dominant countries were even led to believe that their interests were tied exclusively to their national identity and imperial destiny. The most significant instances of revolt and revolution against these modern power structures therefore were those that posed the struggle against exploitation together with the struggle against nationalism, colonialism, and imperialism. In these events humanity appeared for a magical moment to be united by a common desire for liberation, and we seemed to catch a glimpse of a future when the modern mechanisms of domination would once and for all be destroyed. The revolting masses, their desire for liberation, their experiments to construct alternatives, and their instances of constituent power have all at their best moments pointed toward the internationalization and globalization of relationships, beyond the divisions of national, colonial, and imperialist rule. In our time this desire that was set in motion by the multitude has been addressed (in a strange and perverted but nonetheless real way) by the construction of Empire. One might even say that the construction of Empire and its global networks is a response to the various struggles against the modern machines of power, and specifically to class struggle driven by the multitude's desire for liberation. The multitude called Empire into being.

 

Saying that Empire is good in itself, however, does not mean that it is good for itself. Although Empire may have played a role in putting an end to colonialism and imperialism, it nonetheless constructs its own relationships of power based on exploitation that are in many respects more brutal than those it destroyed. The end of the dialectic of modernity has not resulted in the end of the dialectic of exploitation. Today nearly all of humanity is to some degree absorbed within or subordinated to the networks of capitalist exploitation. We see now an ever more extreme separation of a small minority that controls enormous wealth from multitudes that live in poverty at the limit of powerlessness. The geographical and racial lines of oppression and exploitation that were established during the era of colonialism and imperialism have in many respects not declined but instead increased exponentially.

 

Despite recognizing all this, we insist on asserting that the construction of Empire is a step forward in order to do away with any nostalgia for the power structures that preceded it and refuse any political strategy that involves returning to that old arrangement, such as trying to resurrect the nation-state to protect against global capital. We claim that Empire is better in the same way that Marx insists that capitalism is better than the forms of society and modes of production that came before it. Marx's view is grounded on a healthy and lucid disgust for the parochial and rigid hierarchies that preceded capitalist society as well as on a recognition that the potential for liberation is increased in the new situation. In the same way today we can see that Empire does away with the cruel regimes of modern power and also increases the potential for liberation.

 

We are well aware that in affirming this thesis we are swimming against the current of our friends and comrades on the Left. In the long decades of the current crisis of the communist, socialist, and liberal Left that has followed the 1960s, a large portion of critical thought, both in the dominant countries of capitalist development and in the subordinated ones, has sought to recompose sites of resistance that are founded on the identities of social subjects or national and regional groups, often grounding political analysis on the localization of struggles. Such arguments are sometimes constructed in terms of "place-based" movements or politics, in which the boundaries of place (conceived either as identity or as territory) are posed against the undifferentiated and homogeneous space of global networks.[2] At other times such political arguments draw on the long tradition of Leftist nationalism in which (in the best cases) the nation is conceived as the primary mechanism of defense against the domination of foreign and/or global capital.[3] Today the operative syllogism at the heart of the various forms of "local" Leftist strategy seems to be entirely reactive: If capitalist domination is becoming ever more global, then our resistances to it must defend the local and construct barriers to capital's accelerating flows. From this perspective, the real globalization of capital and the constitution of Empire must be considered signs of dispossession and defeat.

 

We maintain, however, that today this localist position, although we admire and respect the spirit of some of its proponents, is both false and damaging. It is false first of all because the problem is poorly posed. In many characterizations the problem rests on a false dichotomy between the global and the local, assuming that the global entails homogenization and undifferentiated identity whereas the local preserves heterogeneity and difference. Often implicit in such arguments is the assumption that the differences of the local are in some sense natural, or at least that their origin remains beyond question. Local differences preexist the present scene and must be defended or protected against the intrusion of globalization. It should come as no surprise, given such assumptions, that many defenses of the local adopt the terminology of traditional ecology or even identify this "local" political project with the defense of nature and biodiversity. This view can easily devolve into a kind of primordialism that fixes and romanticizes social relations and identities. What needs to be addressed, instead, is precisely the production of locality, that is, the social machines that create and recreate the identities and differences that are understood as the local.[4] The differences of locality are neither preexisting nor natural but rather effects of a regime of production. Globality similarly should not be understood in terms of cultural, political, or economic homogenization. Globalization, like localization, should be understood instead as a regime of the production of identity and difference, or really of homogenization and heterogenization. The better framework, then, to designat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global and the local might refer to different networks of flows and obstacles in which the local moment or perspective gives priority to the reterritorializing barriers or boundaries and the global moment privileges the mobility of deterritorializing flows. It is false, in any case, to claim that we can (re)establish local identities that are in some sense outside and protected against the global flows of capital and Empire.

 

This Leftist strategy of resistance to globalization and defense of locality is also damaging because in many cases what appear as local identities are not autonomous or self-determining but actually feed into and support the development of the capitalist imperial machine. The globalization or deterritorialization operated by the imperial machine is not in fact opposed to localization or reterritorialization, but rather sets in play mobile and modulating circuits of differentiation and identification. The strategy of local resistance misidentifies and thus masks the enemy. We are by no means opposed to the globalization of relationships as such-in fact, as we said, the strongest forces of Leftist internationalism have effectively led this process. The enemy, rather, is a specific regime of global relations that we call Empire. More important, this strategy of defending the local is damaging because it obscures and even negates the real alternatives and the potentials for liberation that exist within Empire. We should be done once and for all with the search for an outside, a standpoint that imagines a purity for our politics. It is better both theoretically and practically to enter the terrain of Empire and confront its homogenizing and heterogenizing flows in all their complexity, grounding our analysis in the power of the global multitude.

2005/09/08 16:44 2005/09/08 16:44
댓글1 댓글
  1. 김강 2005/09/08 18:41

    하트와 네그리는 반세계화 운동이 역사적 반동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손호철 교수가 약간 오버를 한 듯 하군요. 국지적인 반세계화 투쟁이 오직 국지성에만 매몰되는 것을 비판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손호철에 대한 반비판이 자율평론 게시판 어딘가에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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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제국> 비판 관련. 먼 댓글 보내온 곳 2005/09/10 15:34

    marishin님의 ['제국'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 에 관련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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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