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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학자

별로 거론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만, 다시 '장하준'이라는 사람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주간지 <한겨레21>은 4월12일치에 김창근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의 글 재벌을 위한 '국가 옹호론'을 실었다. 이에 대해 장하준 교수가 5월15일치에 반론 '재벌을 때려잡으면 '서민'에게 이익인가'라는 글을 썼다. (이 반론 글은 아직 인터넷에 올라있지 않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에서 핵심은 장하준의 제안이 대안이 될 수 있느냐다. (그의 주장이 진보적이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따질 때 염두에 둘 것은, 장하준 비판론이 대안을 담고 있느냐 여부는 일단 미뤄둬야 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빠지다보면 장하준의 제안이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핵심 쟁점을 놓칠 위험이 있다.

 

내가 보기에 김창근의 글에서 핵심은 이 말이다. “장하준·정승일 교수는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산업정책을 위해 노동자들이 자제하고 정부와 재벌들에 협조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재벌들도 원하지 않고, 정부는 그럴 의사도 없는 ‘가상의 정책’에 노동자들이 목을 매라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핵심어는 '가상의 정책'이다. 그리고 이 정책의 내용을 장하준의 반론에서 인용하자면 “재벌들을 외국 금융자본에서 보호해주는 것을 대가로 그들에게 복지국가와 적극적인 정부 규제를 받아들이게 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도 협조하라는 것이다.

 

장하준은 “재벌을 부정하면 우리에게 남는 대안은 국제금융 자본이 들어와 단기 이윤을 위해 경제를 굴리는 것이다”면서 “진보를 자부하는 사람들은 정부와 재벌들이 싫어하더라도, 아니 싫어하기 때문에라도, 그러한 모델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라고 한다. 재벌들도 원하지 않고 정부도 추진할 의사가 없는 정책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 것이 힘없는 서민들에게 이롭다는 것이다.

 

계급 타협으로 요약되는 이 정책은, '재벌이 원하지 않고 정부도 의지가 없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 가능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 (이 정책이 좋으냐 나쁘냐는 또 다른 문제다.) 계급 타협은 역사적으로 아주 특수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1. 자본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2. (이를 부연한 것이지만) 노동계급이 상당한 힘을 확보하고 있으며 3. 그래서 어느쪽도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이되 4. 자본이 호황을 누리고 있어서 조금 떼어줄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다만 1, 2, 3의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4가 충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엔 1, 2, 3, 4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없다. 특히 중요한 것이 조건 1인데, 이 조건은 앞으로도 당분간 가능하지 않다. 이건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에서 자본의 압도적인 우위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대공황에 따른 자본의 붕괴 같은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당분간 찾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상황을 깨려고 투쟁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다. 가능성이 적어도 포기해선 안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4의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른바 경제의 세계화, 아니 자본의 세계화는, 자본이 조금 떼어줄 여유를 얻을 가능성을 점차로 줄여가는 듯 하다.

 

그러니 계급 타협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공상에 빠져있는 이들은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리고 이들은 다양한 변종의 주장을 펴고 있다. 아마 가장 기이한 주장은 <제국>을 함께 쓴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주장일 것이다. 두 사람은 왜 우리는 다자주의적 마그나 카르타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에 대해 “지구적 질서를 지배할 군주적 권력으로 행동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지구적 귀족제를 구성하는 다른 지배적 민족 국가들, 다국적 기업들, 초국적 기관들과 협력”하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들 지구적 귀족들에게 “(반세계화 운동 세력을) 잠재적 동맹자들로, 그리고 오늘날 지구적 정책을 정식화하기 위한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귀족들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 지구적 공존과 공생을 위해, 제국주의 미국과 전세계 자본가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처럼 멋지고 감동적이긴 하나, 돌아올 것은 자본가들의 비웃음뿐이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공상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 다만 제 일기장에 조용히 써놓을 때만 그렇다.

2007/05/08 17:17 2007/05/08 17:17
3 댓글
  1. 케산 2007/05/08 17:40

    저도 장하준씨나 정승일씨의 주장에는 비판적인데, 김창근씨가 '가상의 정책'이 '재벌이 원하지 않고 정부도 의지가 없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님은 '가능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며 4가지 이유를 따로 드셨네요.
    근데 그 4가지로 대표되는 '가능하지 않은 상황'과 김창근씨의 전제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건지 선뜻 잘 이해가 안됩니다.
    결국 님이 든 4가지 조건이 안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재벌이 원하지도 정부도 의지가 없는 것'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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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arishin 2007/05/08 17:58

    케산님, 반갑습니다. 제 말씀은 이 4가지 조건이 안되면 재벌은 절대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본은 타협을 어느정도 나눠주는 '양보'로 보는데, 어쩔 수 없지 않는 한 양보할 일이 전혀 없다는 거죠.

    그리고 김창근 교수가 재벌도, 정부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은 ‘유리한 대외 조건’ ‘강력한 국가’ ‘약한 자본’ ‘억압된 노동’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한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역사적 조건들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다.”

    장하준의 모델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과거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면에서는, 저와 비슷한 논법을 펴는 겁니다. 다만 주장의 내용은 저와 다릅니다. 저는 '계급 타협' 일반론을 말하는 것이고, 김창근 교수는 '한국의 국가발전 모델'이라는 특수한 문제를 논하는 게 차이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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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自由魂 2007/05/14 00:39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미셀 쵸스도프스키(정확한가요?) 교수가 99년인가 2000년인가 아직 IMF 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한국에 와서 한 집회에서 한 발업니다. 요지는 그거였죠. 외국의 투기자본들이 노리는 것들이 한국 재벌을 무너뜨려 한국 경제를 날로 먹으려는 것이니까 지금은 재벌을 지켜줘야 한다는... 뭐 이런 주장이야 쌔고 쌨지만 장하준 교수가 그래도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주류 경제학'의 패러다임 내에서 주장한다는 것과 무엇인가 '혁명적 혹은 변혁적' 전략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 현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는 느낌 때문이겠죠. 물론 그래봤자 한국의 자본가들과 정부는 콧방귀도 뀌지 않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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