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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문 이야기

영국 생활이 한달을 넘겼다. 이제는 촉촉하게 비에 젖은 거리와 낙엽, 물을 머금은 잔디가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걸 보면 마음의 여유를 얻은 것 같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지금까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역시 신문이다. '가디언'과 '인디펜던트'를 주로 사서 보는데, 인터넷이 아니라 막상 종이 신문을 보니 신문인지 잡지인지 구별이 어렵다. '가디언' 지난 2일치를 보면 일반 뉴스면만 40면에, 섹션으로 나뉘어 있는 스포츠면이 12면, 요일별 특집면(2일치는 교육면)이 28면이다. 게다가 타블로이드로 매일 나오는 'G2'라는 별지가 또 있다. 이것은 36면이다. 모두 합치면 116면(타블로이드면을 절반으로 계산해도 98면)이다. 아무 할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루에 모두 보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특히 'G2'면은 읽을거리가 꽤 많다. 화제의 책 요약문이 며칠동안 나뉘어 실리기도 한다. 9월에는 <<노 로고>>라는 책으로 유명한 나오미 클라인의 새 책 'The Shock Doctrine: The Rise of Disaster Capitalism'의 요약문이 3회로 나뉘어 실렸고, 10월 초에는 남녀의 언어가 서로 많이 다르다는 통념을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언어학자 데보라 캐머런의 새 책이 역시 3회 연재됐다. '인디펜던트'는 '가디언'보다 부피가 적지만, 그래도 역시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주말로 가면 더 하다. 영국엔 일요판 신문이 따로 있고 분량도 아주 많지만, 토요일치도 일요판에 버금간다. 지난 주말(6일) '인디펜던트'의 구성을 보면, 스포츠면을 포함한 뉴스면이 96면이고, 별도 섹션(돈 모으고 쓰기, Save & Spend)이 16면, 또 다른 섹션면인 '여행'이 28면에 이른다. 게다가 '인디펜던트 매거진'이라는 진짜 별책 잡지가 88면이나 되고, '인포메이션'이라는 제목의 68면짜리 공연, 방송, 예술 정보 별책이 또 있다. '가디언' 주말판도 엇비슷하다.

 

물량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비정기 부록도 있다. 얼마전 '가디언'은 '20세기 최고의 인터뷰'라는 부록을 제공했다. 과거에 화제가 됐던 인터뷰 가운데 10여건을 뽑아서 팸플릿 형태로 만들어 매일 하나씩 신문에 끼워줬다. '인디펜던트'도 얼마전 바하부터 말러까지 유명 작곡가들을 소개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제공했다. 이 쯤 되면, 신문 하나로 모든 정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값은 '가디언'이 평일 80펜스(한국돈 1540원), 토요일 1.5파운드(2885원)이고 '인디펜던트'는 10펜스씩 싸다.)

 

'가디언'이나 '인디펜던트'는 지식인이나 전문직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신문들이고,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선정적인 보도를 주로 하는 황색 신문들이 따로 있다. 이런 신문들은 볼 시간도, 살 돈도 없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이 둘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 또 있으니, 그건 무료신문 '메트로'다. 지하철이 없는 리즈에서는 보통 버스 안에 두고 승객들이 가져가게 한다. 무료니 꽤 많은 버스 승객들이 보는데, 대충 훑어보니 내용은 고급지와 황색지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다. 1면은 비교적 선정적이지만, 편집의 중심은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비중있게 다루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 '가디언'과 '인디펜던트'는 언급하면서 전통의 신문인 '더 타임스'는 거론하지 않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는데, 이 신문은 몇년전부터 질이 많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첫면을 보면 싸구려 느낌이 온다. 편집이 싸구려같다는 것이 아니라 첫면에 싣는 기사들이 그런 느낌을 준다. 책임있는 신문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 물론 내용은 본 적이 없으니, 내 편견일 수도 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가디언'은 진보적인 신문, '인디펜던트'는 '가디언'에 비해 보수적인 신문으로 알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최근 한달동안 본 느낌은 '가디언'은 교양있고 고상한 신문을 지향하고, '인디펜던트'는 비판적인 신문을 지향하는 것 같다. 1면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인디펜던트' 9월11일치는 미국의 이라크 관련 보고서 내용과 기획 취재한 이라크의 현실을 대비한 기획으로 첫면과 3면을 장식했다. '가디언'은 이라크 보고서를 첫면에 실었지만, 3면은 (파바로티를) 바디숍 설립자 사망 소식을 다룬 기사로 채웠다. 9-11에 맞춘 기획을 펼쳐보이는 신문과 (세기의 성악가를 잃은 걸 안타까워하는) 바디숍 설립자 사망 소식을 크게 다루는 신문의 차이,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덧붙임: '가디언'이 3면에 다룬 내용은 파바로티가 아니라 바디숍 설립자 애니타 로딕이다.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실수했다.)

 

차이는 버마 사태 보도를 봐도 알 수 있다. 두 신문 모두 버마 이야기를 비중있게 다뤘지만, 지난 2일 '인디펜던트'는 첫면을 영국의 위선적인 정치 망명 시스템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장식했다. 영국 총리가 버마, 수단의 다르푸르 등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와중에도 정부가 버마와 짐바브웨 출신자 두명의 망명 신청을 거부해 이들이 위험에 처하게 생겼다는 내용이다. 첫면에 두 사람의 사진까지 큼직하게 실었다. 토요일인 6일치 '인디펜던트'의 1면 기사 제목은 '왜?'였다. 아프간 침공이 6년이나 이어지면서 또 다시 영국 병사 한명이 숨졌다며, 도대체 왜 이들이 계속 희생되어야 하느냐고 추궁하는 것이다. 2면부터 5면까지 모두 4개면에 걸쳐서 아프간 현실을 분석했다. 많은 '신문쟁이'들은 토요일에 이렇게 무거운 내용을 싣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디펜던트'의 지면은 마치 이런 생각을 비웃는 듯 했다.

 

신문 이야기를 했으니, 다음에는 방송 이야기도 조금 해야겠다. 방송 이야기는 무거운 내용이 아니라 황당한 프로그램들 이야기니, 기대하시라.

2007/10/10 06:25 2007/10/10 06:25
4 댓글
  1. 김천희 2007/10/10 09:40

    마치 제가 그곳에서 그 신문들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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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세호 2009/04/17 02:37

    영국 신문 가디언의 가격이 바뀌었습니다, 0.90 펜스로, 네 아쉽게도 좀 더 비싸졌습니다 ...
    그리고 제가 생각을 해보니, 영국에 사는 한인들이 영국신문을 잘 않보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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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lice 2012/09/18 08:16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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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당신은 진보적입니까? 먼 댓글 보내온 곳 2007/10/30 22:59

    안녕하세요? 논쟁과 소통이 있는 메타블로그 맞짱입니다. 맞짱에 대해서 궁금하시죠? - 맞짱은 어떤 곳이죠? 맞짱은 진보적 논쟁, 토론을 지향하는 메타블로그 입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자기 블로그에서 멤돌고 있는 진보적 블로거들의 논쟁공간이자 안식처로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 맞짱에서는 뭘 하나요? 맞짱의 주된 컨텐츠는 말 그대로 '맞짱 논쟁'입니다. '블로그 vs 블로그' 라는 이름의 컨텐츠 이지요. 주제를 정해놓고 찬반 토론을 벌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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