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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비판에 얽힌 두가지 태도

대학원 2학기가 시작됐다. 1월말부터 5월초까지가 2학기다. 3월15일부터 4월13일까지 거의 한달동안 부활절 휴가 기간이 있어서, 실제로는 두달이 조금 넘는 기간이다.

 

1학기에는 전공 필수 과목 외에 '프로파간다' 강의를 선택 과목으로 들었는데, 2학기에는 '언론 비판' 강의를 선택했다. 대학원 과정에 처음 개설된 과목이다. 주류 언론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나로서는 흥미있는 과목인데, 언론인 경험이 있는 미합중국인 학자(크리스 패터슨)와 영국인 학자(폴 테일러)가 나눠서 강의를 맡는다. 미합중국인 학자는 국제 커뮤니케이션 전공 책임자(학과장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고 영국인 학자는 이 사람보다 학과내 위치가 불안한 사람이다. (강사격이라고 할까?)

 

이 수업에 배정된 강의실을 보니 꽤 큰 강의실이었다. 그래서 이 강의가 꽤 인기가 있는 줄 알았다. (이 강의의 대상 학생들은 4개 세부 전공 곧 커뮤니케이션학, 국제 커뮤니케이션, 정치 커뮤니케이션, 국제 저널리즘 전공자들이고 숫자로는 대략 120명쯤이다. 대다수는 외국인 학생이다. 내 전공인 국제 커뮤니케이션에는 영국 학생이 딱 한명이다.)

 

하지만 막상 첫 강의를 들어가보니, 수업 들으러 온 학생이 20명이 안됐다. 결석한 학생까지 해도 20명을 많이 넘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두 학자가 야심차게 새로 시작한 강의가 정원 미달로 폐강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수강 신청자가 적어서 폐강된 과목이 이번 학기에 하나 있다.)

 

이 수업이 개설된 과정에 대해 미합중국인 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 과목 아이디어는 테일러가 냈다. 그가 내게 제안을 해서 학교에 개설을 신청했는데, 놀랍게도 받아들여졌다. 마지못해 받아들여줬지만.”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영국인 학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과격한 사람이어서 혼자 강의를 해서는 안될 것 같아서 패터슨에게 제안을 했다. 과격한 내 강의 내용을 패터슨의 강의가 보완해줄 것이다.”

 

이 영국인 학자는 수업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말을 했다. 그로서는 이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주 기분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언론에 대해 노엄 촘스키 같은 인물들과 비슷한 강도로 비판하는 학자인 그로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상황이니 말이다. (언론학자들은 어디나 대체로 언론인들에 비판적이다. 영국 언론학자들도 비슷하고, 내가 다니는 리즈대학 언론학 분위기도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막상 몇개월동안 받은 인상은 아주 심하게 비판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미합중국 언론에 대해서는 꽤 비판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냉소적이다'.)

 

아무튼 이 영국인 학자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학생들에게 국적을 차례차례 묻더니,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페퍼민트 캔디'라고 하길래, 왜 갑자기 사탕 이야긴가 했다.) 좋은 영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영화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런데 이 학자가 한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 그건 지젝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두시간 동안, 사실 두 학자가 절반씩 말을 했으니 정확하게는 한시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여러번 지젝을 입에 올리는지... 나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인기인' 지젝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개인이 싫은 게 아니라 그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젝은 정확한 사실, 구체적인 내용을 철저히 파헤지는 걸 강조하는 촘스키 같은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은 비판을 한다. “촘스키가 미 중앙정보국의 니카라과 개입을 분석한 책을 봅시다. 많은 세부 사항들을 알려주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게 있나요? 극적으로 새로운 걸 얻은 게 없습니다.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진정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어로 된 인터뷰 원문)

 

(“근본적으로 새로운 게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이미 몇천년전 이스라엘왕 솔로몬이 확실한 답을 줬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지젝은 아무래도 성경 읽을 시간이 없었나보다!)

 

나는 이것만큼 멍청한 생각이 없다고 본다. 진짜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세세한 사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출발하는 진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언론을 논할 때라면 더욱 그렇다. 미합중국 언론이 이라크 침공을 위해 온갖 거짓말을 퍼뜨린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고 정부의 나팔수 구실을 한 사실은 철저하고 세세하게 까발리고 분석해야 한다. 이 작업이 첫번째 작업이고 이것이 없이는 그 어떤 '언론 비판'도 유식한 인물들의 냉소적인 자기만족에 그치게 된다.

 

지젝 같은 얼치기 '대중 스타'가 절대로 촘스키를 따라갈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사실'의 힘이다. 촘스키의 현실 비판을 누구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실에 대한 해박함이다. 역사적인 사실부터 현대의 구체적인 국제 분쟁 관련 사실까지 그는 철저히 챙기고 그걸 근거로 삼아 비판하는 인물이다. 골방에 처박혀 할리우드 영화를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본다고 이런 힘이 나오는 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중세 유명론자 '얼간이 둔스 스코투스'의 후예라고 한 테리 이글턴의 말이 딱 맞는 소리다. (Terry Eagleton, 'On Telling The Truth', 소셜리스트레지스터 2006년호, 273쪽.)

 

대학원 수업 이야기가 지젝 이이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언론 비판에서 '사실'(fact)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이 사실은 진실과 어떤 관계인가,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사실에 관한 두가지 태도 곧 촘스키가 추구하는 태도 그리고 지젝이 '순진하게'(그는 “나이브하게 말하자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했다. 나이브하지 않게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만, 말장난 수준의 수사학을 구사한 것이다.) 대변하는 태도를 따져보는 것이, 2학기에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이다.

2008/01/30 10:41 2008/01/30 10:41
14 댓글
  1. 민중의소리 2008/01/3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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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리내 2008/03/25 04:11

    저희 언론개혁 카페에 도움이 되는 글이라 퍼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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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ㅇㅇ 2008/06/28 01:39

    지나다가..
    재미있는 글이군요^^ 지젝이 촘스키를 지적한 글을 몇번 보긴 했는데, 이론적인 비판이라서 긍정과 부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촘스키의 정치적 비평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 매우 고도의 이론적 작업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촘스키를 지루한 양반이라고 생각하고 지젝에게 흥미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블로거님이 지적한 촘스키의 모용에 대해서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클리셰같은 반복되는 지루함이 있는거죠..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해서 말해보자면, 촘스키는 매우 단선적이고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요. 그러나 지젝의 경우는 매우 모호하고 어떤 경우는 모순되는 주장을 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두 사람의 학문적 차이에 있는데, 지젝의 경우는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에크리같은 투의 어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자는 환자든 청중이든 정답을 내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모호한 말 즉 미끼를 던져서 환자로 하여금 정신분석가를 해석하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지요. 그것이 통산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건 그런 모순을 통해서 진리가 밝혀진다는게 지젝의 논리지요.

    반면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자 저명한 과학자이니 아무래도 팩트에 중심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팩트는 촘스키에게 중요한거지만, 지젝에게 중요한건 팩트가 아니라 비 팩트 즉 거짓과 실수에 있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중요한게 빈말에 관한 것들이지요. 즉 스스로 주체화하지 못하는 모순과 오류가 바로 주체의 진실을 더 많이 보여준다는 겁니다.

    고로 사실 촘스키가 이라크 전쟁을 말했을 때 단순히 팩트에 치중해 문제를 다룬다면, 지젝은 이라크 전쟁의 그 실패의 지점, 즉 예전에 이라크 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성적 학대를 비틀어, 그것이 미국 사회의 단면을 맛보게 해주는 사디즘적인 장면이라고 말하고,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 집착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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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ㅇㅇ 2008/06/28 01:48

    포로 학대의 경우에서 촘스키가 인권 문제에 촛점을 맞춘다면, 지젝은 그것이 바로 세계 민주주의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본질이자 분열이라고 말합니다. 즉 촘스키는 미국식 자유주의적 멘탈리티에 속해있다면 지젝은 미국 그 자체의 병질과 세계 민주주의의 경찰이라는 언어와 그 행위의 불일치라는 모순에 관심을 두는 거죠. 촘스키가 그것이 일어났다는데 놀라고 당혹해한다면 지젝은 그것이 바로 미국이라고 까발리고 이라크인들에게 그것을 아주 조금 맛보게 했다고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고로 제가 봤을때 겉으로 보기에 지젝이 mtv스럽고 그렇게 보여도, 오히려 더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은 지젝이라고 봅니다. 또한 영화 비평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이미 국내에서는 지젝이 대세라고 말해지는 분위기로, 지젝의 삼저서는 이미 철학적-정치적으로 완성작이라고 말해지는 분위기지요. 심지어 칸트나 헤겔 전공자들이 지젝의 책을 보고 다시 헤겔과 칸트를 읽고 읽노라고 하는 말들도 많지요. 그러므로 블로거님이 표현한것 처럼 아카데믹한 측면에서 봐도 지젝은 쉽게 말할 사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촘스키의 책이 회전목마라면 지젝의 책은 롤러코스터죠. 내 머리 속에 모든걸 개워내야 멈추는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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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marishin 2008/06/28 06:33

    저는 지젝과 촘스키는 같은 층위에서 논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젝이 촘스키를 비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젝이 촘스키를 비판하지 않았다면, 저 또한 촘스키와 지젝을 함께 거론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마디로 지젝은 쓸데없이 촘스키를 걸고 넘어가는 것이죠. (이런 행동의 동기는 짐작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만.)

    학문 측면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국에서 지젝의 인기가 높죠.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지젝이 아주 인기 있다는 것과 함께 흥미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굳이 두 사람 문제를 논하려면 정리가 필요합니다. 언론과 사실, 진실의 문제에 국한하자면, 촘스키는 ‘사실’ 곧 내용을 따지는 사람이고 지젝은 ‘형식’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가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보완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라크 문제를 논하려면, 미합중국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해서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했는지를 따지는 것과 함께 미국의 이라크 포로 학대가 이미지 측면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 곧 미합중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사실과 진실, 그리고 거짓과 모순의 문제에 한정한다면, 논리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젝이 거짓과 모순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사실을 모르고 거짓을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 세세한 사실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말하는 건 바보나 가능한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 혼자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요. 솔직히 지젝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이건 스코투스의 후예들이 흔히 보이는 특징이죠. 지젝은 엄밀하게는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아니지만, 스코투스의 후예들과 비슷한 면이 있죠.)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제가 본문에 언급한 이글턴의 글이 간결하면서도 명쾌해서 읽어볼만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담인데, 반복되는 지루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젝도 촘스키 못지 않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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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ㅇㅇ 2008/06/28 11:18

    지젝이 촘스키를 거론한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젝은 예전 촘스키가 쓴 포스트모던에 반 이론적 비판을 비꼬는듯한 표현을 썼지요. 촘스키가 팩트를 거론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론을 알아야 했던가라고 말이죠. 그 이후로 흥미로운 비판은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사실 지젝에게 촘스키식 팩트는 별로 중요한게 아닙니다. 아마도 지젝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촘스키가 지적하고 있는걸 대중들이 모르겠나? 대중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있다. 그럼에도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식의 인식이 가능합니다. 예컨데 삼성 부패라는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 문제는 더이상 감춰진 어떤 것이 아니라 덮어놓아야할 외상처럼 말해지고, 건들지 말아야할 문제로 인식 되지요. 거기에 바로 외상과의 마주침이 있습니다.

    마찮가지입니다. 오늘날 대중들은 조악하게나마 권력을 그 자체로 보고, 회의적이며 매우 냉소적으로 보고있습니다. 제가 촘스키의 책을 처음 접했을때 들었던 느낌은, 깨우침이 아니라 막연하게 알고있던 사실이 명확해졌다는 느낌 뿐이었습니다. 즉 애초부터 나의 앎에 아무련 변화를 주지 못했고, 단지 거기서 알고있는 정보들만 늘어났다는 느낌 뿐이었지요. 대다수 사람들도 그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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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ㅇㅇ 2008/06/28 11:30

    오늘날 심각한 것은 앎 자체가 그다지 신선하지도 않다는 겁니다. 아마 촘스키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계몽주의적 전통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것은 징후적인 일일텐데, 촘스키를 따르는 사람들은 마치 오늘날에도 계몽주의의 상투적 어법, 즉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를 가정하고 그것의 팩트를 거론하는 아주 낡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즐겨 사용하거든요. 저는 그게 바로 기만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그런식의 인식은 이미 우리 세계의 기본적 요건이 되어버렸거든요. 어디가던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이 넘쳐 납니다. 시니컬하게 말하고 냉소적으로 권력의 빈자리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촘스키 보다는 지젝이 더 적실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물론 정치적 성과를 내기에 어려운 텍스트지만, 비판적 측면에서 보면 지젝은 꼭 우리가 해야될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거든요? 예를들어 어째서 앎과 행위의 차원이 서로 모순되게 나타나는가 라는 현대의 징후들에 대한 지젝의 물음은, 촘스키같은 학자들에게 없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주체의 태도를 고착화하는 오늘날의 시선은 권력에 대한 냉소와 동등하게 깔려있는 믿음에 관련된 겁니다.

    삼성 문제를 또 거론하면, 그 문제가 터져 나왔을때 사람들은 놀랐던게 아니라 으례 이미 알고있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거든요. 문제는 그걸 봉합하는 반응들인데, 특검의 불충분한 발표가 끝난 후에 삼성 임원들의 타협적인 발표들들이 이따라 나오자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을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즉 지젝적으로 말하자면 부패적 권력이라는 외상을 대하는 것은 이미 깨우친다는 앎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게 두드러진다는 거죠. 현대 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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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ㅇㅇ 2008/06/28 11:41

    사실 저는 촘스키야 말로 가장 미국적인 팍스 아메리카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지성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열정은, 심지어 신자유주의를 퍼트려대는 세계 은행에서도 추앙받는 '어떤 것'이지요. 즉 미국의 위대함은 힘 그 자체가 있는게 아니라, 이런 비판하고 사고하는 지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는 겁니다. 권력 그 자체를 더 공고히 만드는 방법은 그 외부의 적을 끌어 안을 때 입니다. '예컨데 너희들은 마음껏 지성 사회 안에서 비판하고 까발려라. 그것이 바로 미국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척도니라!' 그리고 실재적인 변화는 없지요..

    예를들어 파티장에 난동꾼이 있다고 치면, 어수선한 가운데 그 사람을 일종의 파티의 흥을 돋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반면 지젝적 반전이라면, 파티장 자체를 파괴하는 변수는 난동꾼이 아니라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나누는 표피적인 대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 대한 지루한 대화들.. 그러나 뭔가 빠진듯한 느낌. 그 자체가 지젝에게 진실이지요. 난동꾼은 오히려 파티의 흥을 더 돋구는 구실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진정한 위협은 파티장에서 나누는 그 상투적인 대화들과 마음속 공허함 사이의 분열, 그 사이에 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가능한 변화를 꾀하는게 바로 지젝적 비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사실을 지젝에게서 듣고나서 촘스키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젝의 작업에 대해서 말하자면, 요즘 번역되는 책들은 반복되는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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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ㅇㅇ 2008/06/28 11:53

    이런 이런 댓글이 길어졌네요. 이글턴은 별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차라리 스티글리츠의 경제학 관련 텍스트를 읽는게 났다고 생각하네요. 잠시나마 저의 소회였고, 학문을 형질로서 파악하는 방식은 좀 아니라고 생각하네요--

    참고로 말하자면, 지젝에게 저 혼자 알고있다는식의 판단은 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식이면 촘스키고 이미 그런 전제를 깔고 있는거 아닙니까. 알튀세르만 읽어도 자명한 사실을 무슨 지젝에게만 그런걸 묻는건지, 이해를 못하겠네요. 제가 봤을땐 필요없는 문구였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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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marishin 2008/06/29 04:09

    제가 보기에 ㅇㅇ님이 지금 쓰신 내용은 아주 징후적입니다. 지젝이 뜨는 이유, 그것도 다른 나라가 아니라 미합중국에서 뜨는 이유, 그것이 바로 ㅇㅇ님이 ‘진실’에 대해 지금 이야기하신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포스트모던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계몽주의가 현대 사회에 끼친 해악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강 모두 아는 듯 한 내용, 세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우리도 이미 많이 들은 이야기’라는 생각, 이것이 사람들을 ‘세부적인 사실’ 강조를 부질없는 짓으로 여기게 만들죠. 자신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만한 계몽주의적 지식인’들이 저지른 죄악상의 결과죠.

    문제는, 대중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깨우침만 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촘스키가 주장한다는 지젝의 ‘요약’입니다. 제가 촘스키가 아니어서 정확하게 모르지만, 적어도 사실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실’을 모르고 어떻게 판단을 하고 주장을 펼 수 있겠는가, 라고 묻는 겁니다. 이걸 지젝이 편의적으로 엉뚱하게 요약하고 있는 겁니다. 주장과 판단의 근거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싸구려 계몽’으로 치부하는 겁니다.

    이글턴의 글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글턴에 대해 잘 모르고, 이글턴이 정답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진실’, ‘권력’, ‘객관적 세상’ 따위의 문제를 진지하게 따져보도록 자극한다는 뜻에서 그의 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요점은 계몽주의가 아니고, 인식의 근거 문제 그리고 인식과 ‘객관적 현실’ 또는 ‘실체’의 상관 관계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촘스키도 전제를 깔고 있다’는 말씀은 제가 쓴 취지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는 지젝은 자신의 주장을 ‘검증’할 어떤 사실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 제시하려고 노력은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적어도 촘스키는 어떤 사실적 근거를 충실히 따지고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는 ‘태도’만큼은 보입니다. (물론 누구나 나름의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고,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관점 없이 세상을 볼 길이 없으니까요.)

    여담이지만, 이글턴과 스티글리츠를 대비시키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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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ㅇㅇ 2008/06/29 08:45

    포스트모던이요? 전혀... 지젝은 포스트모던을 경멸합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지젝은 진실이 없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진실은 나 자신이 책을 읽어서 얻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나 자신을 산산조각내는 어떤 파괴와 모순, 그 자체가 진실입니다. 고로 포스트모던과는 어떤 이질감이 있는 거지요. 설명해 드렸는데 포스트모던이라니...ㅎㅎ

    계몽주의란 개념에서 보면 오히려 지젝이야 말로 아주 전통적인 계몽주의자입니다. 예컨데 헤겔 철학의 변증법은 들뢰즈같은 사람에게 자주까이지만, 지젝은 그게 아니라고 보거든요. 헤겔의 변증법이야말로 자신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그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헤겔주의자들이 이런 지젝의 해석에 경탄을 보내는건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오늘날 헤겔은 마치 포스트모던에 의해서 죽은 개 취급 당하고 일자를 말하는 닫힌 세계를 말하는 사람이라고들 이해하거든요?

    오히려 헤겔에 대한 최고의 연구 사례들은 본질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고, 지젝은 그런 헤겔 해석을 독자적으로 해서 라캉의 주체 개념과 연결시킵니다. 또한 칸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칸트야 말로 순수 이성에 가기 위해서 모든 모순율과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이 곧 자신의 모순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라캉적 주체와 연결되어서 라캉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하게 되지요. 고로 사실 가장 계몽주의(이건 통상적 계몽주의와 다릅니다)적인 전통 안에 있는 사람은 지젝입니다.

    앎으로서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처음에 지적했듯 촘스키식 작업에 동의를 보냅니다. 그러나 깊이와 통찰력에서 매력적이지 않는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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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ㅇㅇ 2008/06/29 08:53

    제가 지적했던 촘스키식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통상적인 이해의 지식인들 맞습니다. 그건 오만과 상관없이 어떤 계몽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정식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거지요. 그걸 오만으로 이해했다니.. 난감할 뿐이네요. 계몽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오만으로 전치시키는 이해는 철저히 포스트모더니즘 같습니다. 아니면 20세기 자유주의자들 논조거나.

    그게 아니라 앎을 단정하고 파헤치고 그걸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예컨데 라캉적으로 대타자의 위치를 점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즉 이데올로기 비판에 통상적인 절차를 따르른 사람들이지요.

    네 부류로 나눕니다. 데리다는 진리의 가능성을 영원히 연기 시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옵니다. 고로 데리다에게 진리는 어떤 불가능성에 가깝습니다. 포스트모던이지요? 촘스키의 방식은 진리를 까발리고 그게 옳다는 방식으로 취합니다. 이건 상투적인 계몽주의 비판이지요. 반면 알튀세르와 그람시는 문제를 헤게모니 싸움으로 봅니다. 이 사람들에겐 프레임이란 철저히 주관적이어서 어떤 이념이나 개념도 이미 진리를 단정하는 관념일 뿐이란 겁니다. 고로 문제는 어떤 진리냐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지젝이 있습니다. 지젝에게 진리는 모순에 있습니다. 고로 문제는 주체가 그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이냐하는 거지요. 그건 앎의 차원에 있는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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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ㅇㅇ 2008/06/29 09:08

    그러므로 상이한 이런 절차들에 지젝은 세가지 방식을 모두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앎도, 알튀세르식 구조주의도, 데리다식 차연도 모두 불충분하다는 거죠. 진짜 힘든건 자기 자신을 깨는 모순,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저는 이런 양태들에서 지젝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지젝의 촘스키 비판은 정당한 겁니다. 적어도 자신의 이론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거니까 말입니다. 그냥 까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지요. 지젝은 위 세가지 이데올로기 비판적 사례들을 모두 라캉의 임상적 차원에서 까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젝은 처음부터 나는 계몽주의자지만 통상적 이해의 계몽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계몽주의 철학에 정점인 헤겔에겐 더 섬득한 헤겔이 있다는게 지젝의 생각이지요. 칸트도 마찮가지 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지젝의 길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헛갈리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글을 읽다보면 계몽주의자인지 포스트모던을 말하고 있는건지 헷갈리거든요? 그러나 이론적으로 추적해 보면 아주 강력한 계몽주의자인게 드러납니다.

    스티글리츠를 거론한건 제가 막 스티글리츠의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학문상 연결이 있어서 그런거 아니고요. 지젝은 폄하하는 분들은 지젝에 관해서 숙고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제가 그래도 이것저것 다 읽어 봤는데, 지젝만큼 중독성을 가진 철학자는 여태 없었습니다. 그는 찬탄할만한 해석능력과 이론으로 무장한 사람입니다. 고로 한국에서도 유행을 타는 거지요.

    한 때는 발리바르같은 알튀세르 후학들에게 꽂혔는데, 제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 지젝에 의해서 풀렸지요. 교수님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지젝읽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변합니다. 지제키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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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ㅇㅇ 2008/06/29 09:25

    보충하자면 자기 자신을 깨는 것을 죽음충동이라 말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상징적 죽음이지요. 지젝에게 죽음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실재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 이 두 차원이 주체를 탄생하게 만들지요. 예컨데 정신분석에서 많이 거론되는 안티고네의 경우 오빠의 죽음이라는 실재적 죽음과 자신을 폴리스에서 스스로 추방시키는 상징적 죽음을 택합니다. 그러므로서 스스로 완전한 죽음을 욕망하지요.

    예를들어 김용철 변호사를 들자면, 김용철 변호사는 스스로 자신이 삼성 권력에 가담했던 것을 공공에 알림으로서 스스로 상징적 죽음을 택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고착된 것들(삼성 권력에 가담한 자신)을 인정함으로서 스스로 완전한 주체에 이른거지요. 그리고 이런 주체들은 곧 어떤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가장 강력하게 혁명을 쟁취합니다. 그게 바로 지젝이 말하는 진정한 혁명이 걸린 내기의 사례입니다.

    여기서 김용철 변호사가 받아들여야 했던 진실은, 어떤 앎을 가장한 지식이라기 보다, 자기 자신의 모순을 인정한 실천에 있습니다. 고로 지젝에게 앎은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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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사실은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1/30 15:37

    marishin님의 [언론 비판에 얽힌 두가지 태도] 에 관련된 글. 사실 트랙백하기에 적당한 포스팅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농성에 결합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다. 적당한 전술인지, 목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인권 활동가에게 국가기구는 어떤 의미인지, 사실 나는 매우 단순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활동을 해야 한다,라고 결정하면 그 주변의 논의를 묻어버리는 편이다. 그런데 우리 단체 내부에서 이번 농성에 대해 다른 의

  2. Subject: 평론가-철학자 먼 댓글 보내온 곳 2008/02/01 00:49

    언론 비판에 얽힌 두가지 태도 어제 우연히 참석한 술자리에서 새들이 자기 울음 소리와 다른 새의 울음 소리를 지각할 때 일어나는 뇌세포 활동 패턴에 대한 얘기가 어떻게 곁길로 새서 키엡슬롭스키 영화에 대한 지젝의 평론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사실은 맥락이 있는 데 설명하긴 좀 길다) 그런데 지젝 얘기를 꺼낸 사람 말이 "내가 키엡슬롭스키 영화를 수 십 번을 보면서도 말로 풀어내지 못하던 것을 지젝이 정확하게 얘기해줬다"는 거였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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