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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의 언어

피터 마쿠스(Peter Marcuse)

<먼슬리 리뷰> 2000년 7/8월호

원 제목 = (The Language of Globalization)

 

컬럼비아대학 도시계획학과 교수가 쓴 글로, 지구화 논의에 주로 등장하는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는 지구화라는 말은 개념이 모호하며, 이런 모호함 때문에 쟁점이 은폐된다고 지적합니다. '국가' '인적 자본' '통치' '자유시장' 등등의 용어 사용도 문제삼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구화 (또는 세계화)의 물적 기반으로 여겨지는 정보산업 기술의 진보는, 지금 나타나고 있는 지구화 곧 '경제권력의 지구적 집중'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진보를 다르게 이용했다면 다른 지구화 (대안적 지구화)가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국제주의를 위해서는 지구화 찬양자들의 언어 분석과 언어의 명확화가 시급하다고 말합니다.


 

 

지구화의 언어는 관심을 뚜렷하게 기울일 가치가 있다. 지구화라는 단어부터 보자. 이 단어가 쓰이는 대부분의 경우는 개념이 없다. 예컨데 1970년 이후 그 전과 달라진 것 같은 것 모두를 단순히 나열한 목록이다. 달라진 것이란, 정보기술의 진보일 수도, 항공 수송의 이용 확대일 수도, 외환 투기일 수도, 국가간 자본 흐름의 확대일 수도 있다. 또는 문화의 디즈니화거나 대규모 판촉활동이거나, 지구 온난화거나, 유전공학이거나. 아니면 다국적 기업의 힘 또는 노동의 새로운 국제 분할 또는 노동의 국제간 이동 또는 개별 국가의 권한 축소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포드주의 등등. 문제는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 문제 정도가 아니라는 데 있다. 지적인 면에서 보면, 용어의 이런 흐리멍탕한 사용은 원인을 결과와 분리하고 누가 누구에게 어떤 일을 벌여서 무슨 결과를 유발했는지를 분석하려는 노력을 흐뜨린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이 용어를 모호한 상태로 방치하고 이 용어가 스스로 생명이 있는 어떤 실체로 전환하도록 트릿하게 허용해 이 용어가 힘을 얻게 하며, 사람의 의지에서 벗어난 피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존재로 물신화하게 된다. 용어사용의 투명성 결여는 또한 지구화에 대한 논의의 다른 요소들에도 분석적이고 정치적인 결론을 내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영역을 개괄하고 중요한 몇가지 차별화를 제안할 것이다.

 

먼저 지구화 자체의 개념 문제. 이 글에서 다시 지구화는 해 아래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라고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구화가 자본주의의 특정한 한 형태이며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리적인) 넓이와 깊이를 (나날이 인간 삶의 여러 측면에 파고듦으로써) 확장하는 것이라는 지적만큼은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1970년 이후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에는 서로 구별되는 두 측면이 있다. 보통 지구화라는 규정으로 뭉뚱그려지는 이 두 측면은, 기술의 발전과 권력집중의 심화다. 기술의 진보를 경제권력의 지구적 집중과 분리시키고 이 둘의 조합이 어떻게 계급 관계를 바꿨는지를 살피는 것은, 분석을 위해서나 정치적 전략을 위해서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기술의 진보와 경제권력의 집중화, 이 두가지의 결합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정보기술 진보로 가능해진 컴퓨터화와 통신 속도의 증가, 대륙을 넓나들 수 있는 중앙의 통제 범위 확장, (여객 및 화물용) 교통수단의 속도 증가와 효율성 향상, 생산 유연화의 촉진, 일상 업무의 자동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경제 권력 집중화의 실질적인 심화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의 진보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기술의 의도했던 용도가 달랐다면 이용방식 또한 상당히 다를 수 있었겠지만.) 기술 진보는 일정한 양의 재화와 용역을 힘 덜 들이고 생산하거나, 일정한 노력으로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리지 않고 있다. 기술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을 쥔 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넓히고 모으는 쪽으로 기술을 이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기술은 계급간 힘의 균형을 바꾸는 데 이용됐다. 관심을 기울일 부분은 이 부분이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기술의 지구화와 권력의 지구화를 구별하는 것은 단지 분석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이는 "두가지가 분리됐다면 어떤 가능성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현재 기술의 지구화와 권력의 지구화의 결합을, 다른(대안적) 지구화 (alternative globalization)의 가능성을 강조할 수 있는 용어 곧 현존하는 지구화 (really existing globalization)라고 불러야 한다. 현존하는 지구화의 악영향를 자유주의적 전망에서 반대하는 이들 뿐 아니라 좌파적 전망에서 반대하는 이들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문제에 관해서는 분열되어 있다. 세계무역기구에 대항한 시애틀의 슬로건 곧 "고칠 것인가 내칠 것인가 (fix it or nix it)", 지난 4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대항한 워싱턴 시위에서 제시된 슬로건 곧 "줄일 것인가 죽일 것인가 (shrink it or sink it)", 또 우리가 (협상) 탁자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를 원하는가, 다른 탁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탁자 자체를 원하지 않는가에 관한 의문, 이 모든 것은 목표에 대한 상반되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문제는 실로 까다롭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지구화를 생각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목표에 대한 논쟁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지구화를 현존하는 지구화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놓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화에 대한 개별국가의 통제력 약화 또는 소멸에 대한 잦은 언급 또한 개념적, 언어적 명확성이 필요하다. 힘없는 국가라는 신화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지적인 분석을 모호하게 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국제적으로 확산되면서, 산업화 세계의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국가의 행위는 중요성이 늘고 있지 줄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각국이 자본 또는 재화의 움직임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포기이지 권력의 결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제 산업계의 이권이 세계무역기구를 중요하게 보는 점, 관세협정, 정부의 협정에 포함된 권리 이행과 정부의 지적 재산권 보호 등은, 개별 국가의 중요성 증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중요성 지속을 보여준다.

 

게다가, 물신화의 강력한 요소가 "국가(state)"라는 용어의 사용에 아주 두드러진 정치적 편향을 띤 채 자주 스며들고 있다. 이는 균질적인 국가의 오류 (fallacy of the homogenous state)라고 부를만한데, "경쟁력있는 국가" (또는 내 전공 분야에서라면 "도시들의 경쟁력"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 또는 북쪽이나 남쪽 "국가들"의 이익 또는 손해 등을 운운하는 정식화에서 나타난다. 국가들과 도시들은 그 안에서도 서로 나뉘어있다. 한 국가의 어떤 단체 또는 계급 또는 특정의 이해에 유리한 것은 다른 집단에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부는 일정한 자율성을 분명히 갖고 있으며, 이런 제한된 의미에서 국가 또는 도시는 특정 정치지도자들과 관료들 또는 좀더 폭넓게 보면 정권의 특정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행위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부는 다양한 이해에 반응하며 특정한 이해가 정부의 행위 대부분을 규칙적으로 지배한다. "국가적 이익" 운운은 보통 어떤 특정한 이해를 은폐한다. 정부가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현실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 관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언급하는 것에는 - 한가지 면에서는 중요하지만 - 마찬가지로 미국 정책을 지배하는 사람들과 이 정책 형성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는 다른 나라에도 마찬가지다. 이 점은 남쪽 국가에서 온 개인들이 자국 정부와는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인 시애틀의 몇몇 논의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국가와 국민의 구별이, 국가의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행위의 측면에서 중요하다면 경제적 대표성의 측면에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국제 경제 협상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이들은 그 국가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균질적으로 대표하지 않는다. 여기서 균질성은 협상자리의 이해 관계의 특성으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계급적 성격과 유사한 부문별 밑바탕에 따라 갈라지는 산업 및 금융적 이해관계의 집단인 것이다. 핵심적인 분리는 국가간이 아니라 계급간 분리이다. 균질성은 한 국가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지구화 논의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는, 지구화 지지자들이 퍼뜨리는 것이긴 하지만, 종종 비판자들 사이에서도 쓰이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예컨데 "인적 자본(Human capital)"은 뜻을 꽈놓은 것이다. 이는 "노동 기술(또는 기능)(labor skills)"이라고 부르면 문맥에 적합한 것이다. "통치(Governance)"는 작은 정부의 완곡표현이며 이렇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자유(free)" 시장은 무료 공교육 경우처럼 아무런 댓가가 없는 일은 그물다. 정확한 용어는 "사적 시장(private markets)"이며, 이 사적 시장은 사람의 자유 대부분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한다. "개혁(Reform)"은 물론 언론들이 쓸 때는 사유화를 뜻한다. 무분별하게 쓰이는 "생산자 서비스(producer services)"는 "생산자"의 사회적 의미를 배제시킨다. 증시보고서 인쇄는 "생산자 서비스"라고 불러선 안된다. 인쇄자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노동자지 "서비스 제공자(service providers)"가 아니다. 생산자라는 말이 어떤 실질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면, 주식중계인은 생산자라고 부르면 안된다.

 

이런 문제들은 단지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현존하는 지구화 때문에 생기는 병폐에 맞서려고 하는 다양한 조직 사이에 뚜렷한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는 못했다. 가장 온건한 목표는 단순히 참여와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지구적 기구들의 구조 개편과 규제를 요구한다. 급진적인 관점에는 일국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 현재의 지구적 기구들을 완전히 없애거나 정치, 경제적인 관계가 전혀 다른 체계로 대체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다. 시애틀 이후 논의는, 미국 의회, 무역대표부, 국제연합의 미국 대표부 또는 다양한 국제기구와 단체의 미국 대표에게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 같은 국가 차원의 조직적 요구로 집약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단체와 개인이 목표와 정책과 행동요구를 정식화하는 어려운 일에 매달려 애쓰고 있다. 특정한 관점에 입각한 요구가 꼭 다른 관점의 요구와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목표의 공통점과 차이, 전략과 전술의 공통점과 차이는 더 깊은 생각과 명확화를 요구하고 있다. 용어의 모호함은 단기적으로 연합전선 구축을 촉진하지만, 더 강력하고 장기적인 협력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기반을 두는 법이다. 기술의 지구화와 권력의 집중화의 차이를 유념하고, 대안의 지구화를 계속 논의 대상으로 유지하고, 힘없는 국가라는 신화를 버리고 균질적인 국가의 오류를 피하고 지구화의 오웰적 언어(Orwellian language)의 덫을 조심하는 것은, 장기적인 목표와 다음의 행동단계에 대한 공통된 합의를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피터 마쿠스는 컬럼피아대학 건축, 계획, 보존 단과대학의 도시계획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구화하는 도시들: 새로운 공간적 질서?"(옥스포드: 블랙웰, 2000)의 공동 저자이다.

* Peter Marcuse teaches in the Division of Urban Planning in the School of Architecture, Planning, and Preservation at Columbia University. He is co-editor of Globalizing Cities: A New Spatial Order? (Oxford: Blackwell, 2000)

 

 

원문: www.monthlyreview.org/700marc.htm

번역: 신기섭

2004/07/15 16:09 2004/07/15 16:09
댓글1 댓글
  1. 달군 2004/07/15 17:02

    에구머니 트랙백을 잘못걸었네요.. 쥬디리빅 인터뷰글은 트랙백 걸려고 한게 아닌데.=ㅗ= 아, 그리고 화면 관리에서 메뉴 부분을 200px로 늘이시면 화면이 더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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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국가와 좌파'에 대한 여성운동가 쥬디 리빅 (Judy Rebick) 인터뷰 먼 댓글 보내온 곳 2004/07/15 16:25

    marishin님이 번역하신 글을 퍼옴 : 원문 --&gt;http://blog.jinbo.net/marishin/?pid=31 &lt;진저&gt; 1998년 7월호원 제목 = `국가와 좌파'에 대한 여성운동가 쥬디 리빅 (Judy Rebick) 인터뷰 여성 지위에 관한

  2. Subject: 언어화의 문제 먼 댓글 보내온 곳 2004/07/15 17:00

    marishin 님의 블로그에는 어렵지만 재미있는 칼럼들이 많다. 영어든 뭐든 외국어는 하나도 못하고 우리말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이런 번역 작업들로 좋은 글들을 접할 수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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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