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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이냐, 다중이냐

조정환과 이택광의 ‘촛불 담론 논쟁’이 일간 신문에까지 소개됐다. 본업이 본업인지라, 이쯤되면 바빠서 세세한 논의를 따라가기 힘든 이들을 위해 간단한 요약 정리를 해드려야 하지 않나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 기질을 버리기 어렵다^^) 하지만 이 논쟁을 요약 정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쟁점이 되는 문제 한가지를 따져보는 데 그칠 생각이다.

 

(이제 이 논쟁에서 더 나올 건 없는 것 같다. ‘인신 공격’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전체 과정은 조정환의 블로그이택광의 블로그에서 찾아보면 된다. 그리고 이 논쟁에 나중에 뛰어든 최원의 블로그도 참고하시라.)

 

두 사람이 쓴 많은 글들 가운데 딱 두개를 고르라면, 이택광의 주장은 인디피크닉2009 촛불영상 미니강연 녹취록을 추천한다. 조정환과의 논쟁 이전에 한 강연이지만 “기본적으로 촛불에 대한” 이택광의 “생각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글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택광의 다른 글들은, 그가 거론하는 이론들에 익숙하지 않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다.)

 

조정환의 글을 하나만 추천하라면, 이번 논쟁 와중에 쓴 생산력, 제헌권력, 대도시, 다중을 꼽는다. 이번 논쟁의 쟁점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는 따져보고 생각해볼 문제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나는 앞에서 조정환의 글은 내가 감당할 수준을 초월한다고 했는데, 이 글은 그래도 좀 쉽다. 전통적인 좌파 이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글이지만.)

 

나중에 이 논쟁에 뛰어든 최원은 글을 많이 쓰지 않았고 두 사람보다는 좀더 쉽게 글을 썼으니, 굳이 딱 하나를 골라 추천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이 논쟁이 처음에 ‘촛불 비판자’와 ‘촛불 옹호자’의 논쟁 구도로 가면서 별 소득없이 끝날 것을 걱정했는데, 그래도 한가지 쟁점은 선명해졌다. 촛불 주도자들이 ‘다중’이냐(조정환의 주장) 아니면 ‘중간계급’이냐(이택광, 최원)는 것이다.

 

조정환은 촛불 주도자들을 ‘다중’으로 규정하면서 ‘다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다. ‘다중’으로 규정하는 것은 많은 함의를 지니지만, 이는 이론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문제다. 나라면 ‘대중’이라고 부르지만, 이름이야 ‘다중’이든 ‘대중’이든, 크게 상관없다고 본다. 조정환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의 역량을 무시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힘을 긍정하지 않는 ‘좌파’가 있을까?) 다만 ‘다중’이라는 규정에 담겨있는 많은 함의들을 전면에 내세우려면, 조정환은 촛불 주도자들이 ‘다중’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는 이미 증명했다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가 증명한 것은 거의 없다.(이택광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이택광과 최원이 사용하는 ‘중간계급’이라는 용어의 문제는 ‘다중’과는 조금 차원이 다르다. ‘다중’이 이론에 관심 있는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나 문제가 되는 ‘전문적인 용어’인 반면, ‘계급’은 훨씬 더 대중적인 용어다. 그래서 ‘중간계급’이라는 말은, 대중들에게 구체적인 인상을 준다. 덜 급진적이라거나, 타협적이라거나, 절충적이라는 인상을 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중간계급’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비판하되, 문제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킨 최원의 논의를 중심으로 할 것이다.

 

최원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에 올린 글에서, ‘사실 촛불이 변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진보진영 내지 조직된 노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약소자들과의 거대한 합류였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촛불과 공장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마주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약소자들과의 합류(특히 비정규직과의 합류)를 말했다.” 또 “촛불과 기층민중/운동권을 선명하게 구분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여 온 갈등선이고 대립선이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니까 최원은 ‘중간계급적 성향을 지닌 촛불’과 ‘비정규직을 비롯한 약소자(기층민중)’의 뚜렷한 구별 또는 대립이 “엄연한 현실”이었고 이 둘의 ‘타협적이면서도 대립적·투쟁적인 합류’가 없었기에 지난해 촛불이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협적’이라는 말로 그의 주장을 표현한 것은, 촛불이 됐든 약소자가 됐든 단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 또 대립적·투쟁적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이 둘은 필연적으로 주도권 다툼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최원 주장의 핵심이다.)

 

최원은, 중간계급 대 약소자의 구도가 자신의 이분법적 관점이 아니라 ‘미선·효순 싸움’ 때부터 엄연히 존재한 현실이라고 강조하지만, 내가 보기엔 “엄연한 현실”이 아니다. ‘미선·효순 싸움’ 당시 ‘네티즌 대 운동권’의 갈등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은 이른바 ‘다함께 논란’이다. 하지만 ‘다함께 논란’은 극히 부분적인 문제다. 이 논란을 ‘중간계급 대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약소자’의 갈등으로 확대 해석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이런 식의 갈등이 촛불 정국에 존재하지 않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난해 촛불의 선구자였던 10대 특히 여학생들과 20-30대 초반 여성들은 소수자들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10대가 제 주장을 펼 ‘몫이 없는’, ‘자격 미달자’로 취급된다는 건 긴 설명이 필요없다. 20-30대 초반 여성들 또한 다를 게 없다. “이제 여성은 비정규직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말이 모든 걸 말해준다.

 

게다가, 이택광이 암시하듯이, 거리로 나선 여성들의 일부가 강남 중상류층일지라도(내가 전해들은 ‘촛불에 대한 강남 사람들의 냉소와 반감’에 비춰볼 때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들 또한 소수자의 정서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비록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에 힘입어 ‘번듯한 직장 여성’이 됐을지라도, 직장 안에서는 여전히 차별받는 약자이며 ‘중상류층의 끝자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불안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피속에도 ‘소수자의 정서’는 흐른다고 봐야 한다. 극소수 ‘강남 출신 커리어 여성’들조차 이런 측면이 있다면, 나머지 대부분의 ‘촛불 여성’들은 오죽하겠는가?

 

물론 촛불 선구자들이 ‘소수자’라고 해서, 그들이 ‘중간계급’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간계급 지향성은, 외환위기 이후 자리잡은 “1997년 (이후) 체제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약소자’들이 이들과 다르다면, ‘중간계급’이 한낱 희망사항일 뿐임을 알기에 ‘절망하는 소수자’라는 점뿐이다.

 

내 주장을 요약하자면, ‘서울공화국’의 10대와 젊은 여성들은 ‘중간계급의 끝자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소수자의 피’를 ‘촛불’로 승화시키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간계급’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소수자들의 반란이라는 중요한 측면을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행위다. 촛불이 ‘소수자들의 반란’으로 시작됐다는 것은, 촛불집회가 ‘축제’ 성격으로 진행된 것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동안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기회가 없던 ‘젊은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떠들고 노래 부르는 ‘표현 행위’만으로도 큰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 표출은 일회적인 발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말에 담긴 ‘(진정한) 국가의 구성’ 요구까지 나아갔다. 물론, 이 질적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촛불 주도자와 그 이후 촛불 합류자들이 이 요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소수자’(촛불 주도자)와 ‘기존 권위에 대한 총체적 거부자’(이후 합류자 상당수)는 사실 동떨어진 이들이 아니다. 그래서 쉽게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촛불의 급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촛불이 ‘진정한 국가’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보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조직도, 동료도 없는 ‘모래알’들이기 때문이다. 의지할 데 없는 그들의 처지는, 미국산 쇠고기 무차별 수입 결정에서 ‘국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고, 또 그래서 ‘국가의 구성’을 절실히 요구하게 만든 것이다. 1987년 대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에겐 ‘노조’가 있었고, 반독재 투쟁을 벌인 대학생들에겐 ‘학생회’가 있었지만, 지금 촛불의 주역들에겐 아무것도 없다. 굳이 있다면 ‘소울드레서’ 카페나 미국 야구 동호회 ‘MLBPARK’이 있었고, 이것도 없는 이들이 의지할 마지막 보루는 ‘다음 아고라’였다.

 

촛불 주도자들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 모두에게 해법은 ‘국가’라는 점 때문이다. 미국 쇠고기 저지, ‘미친 교육’ 몰아내기, 건강보험와 깨끗한 물 지키기, ‘공정한’ 언론 바로세우기는 국가만이 보장할 수 있다. 다만, 주권자인 국민을 존중하는, 제대로 된 국가여야 한다.

 

촛불 주도자들과 비정규직이 갈라지는 지점은 그 다음이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주권자인 국민을 존중하는, 제대로 된 국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로 가면, 필연적으로 ‘계급’을 만나게 된다. 촛불 주도자들은 아직 이 ‘계급적 국가’를 직면하지 않았기에, (중간계급적인 게 아니라!!) ‘무계급적’ 또는 ‘비계급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촛불이 노동문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것도, 이 점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촛불을 논할 때는 ‘비계급적 국가주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촛불을 한 단계 진전시켜야 하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2009/05/19 22:45 2009/05/19 22:45
10 댓글
  1. 김우재 2009/05/20 05:28

    잘 읽었습니다. 이제 좀 명료해 지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어들의 지나친 남발에는 불만이 있습니다만, 학자들의 논쟁이란 점에서 무조건 탓할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진지한 이런 종류의 토론이 계속되리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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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udium 2009/05/20 18:30

    잘 정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국가의 구성을 열망하는 모래알들', 여러가지 전망들이 근거할 수 있는 출발점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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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회사원2 2009/05/21 10:38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늘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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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련 2009/05/22 11:58

    '롤즈도 안본 것들이'라는 말을 돌려주고 싶은 논쟁이었습니다. 저 역시 촛불의 핵심적인 문제가 '국가의 구성'이라고 봤는데,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이론은 현행 헌법의 이론적 토대이며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사회계약론이지 않겠습니까. 이걸 완전히 개무시하고 자기가 선호하는 이론끼리 티격태격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스러웠습니다. 계급 이론이 등장해야만 할 지점도 주류 사회계약론보다 나은 설명력을 보여주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언급하신대로 비정규직 부분이나, 소수자 부분이 그럴 가능성이 있는 지점인데, 물론 과연 그럴지는 롤즈와의 치열한 대결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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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09/05/22 16:49

      저련님 반갑습니다. 롤스를 잘 모르지만, 계급 문제를 논하는 데까지 롤스와 치열한 대결이 필요할까 싶은 의문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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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련 2009/05/22 19:06

      사회계약론이 설명력이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려면 롤즈와 대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호혜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계약의 허점을 찾는 일이라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이 허점을 찾는 것은 물론 깊은 전통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치열해야 할 것이고. 계급 이론이 현상에 대해 발언하는 넓은 의미의 과학이라면 롤즈와 대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것을 지도할 규범에 대한 발언이라면 롤즈가 어떤 면에서 적어도 부족하다는 점 정도는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쓴 코멘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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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2010/01/09 01:31

    정말 억울하게 죽은 故홍성인군의 한을 풀어줍시다...
    故홍성인군의 어머니께서는 많은것도 바라지않으셨습니다.
    단지 정말 진심어린 사과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죄책감은 커녕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않고,
    살인이 마땅하다고생각한 최원의군은 부모님의 권력으로인해
    모든 포털싸이트에 작은기사조차 삭제되어버렸습니다..
    이일을이렇게 묻어두고 계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지금 서명운동중입니다.. http://club.cyworld.com/YourHelp
    이곳으로와서 서명좀해주세요 정말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관련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DN8FYrD_xk8 이곳으로 오셔서 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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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촛불논쟁' 초간단 정리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5/22 11:48

    아무리 생각해도알레프님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조금 더 중요한 (vide. http://aleph.textcube.com/102, #)거 같아서, 정리를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정리는하나도 성실하지는 않으나, 기본 가정만알면 나오는 추론들이 핵심인 것 같은데 그걸 가지고 쓸데없이비비 꼬아놓을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기왕에 보는거 재미도 있어

  2. Subject: 촛불대중은 통계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5/27 19:14

    일의 순서, 아이추판다에서 촉발:http://nullmodel.egloos.com/1907884 어떻게 하느냐고? 연행자 1천여명이 있다(그 중에 한 명이 나다-_-). 그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민변을 통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역시 그 중에 한 명이 나다-_- 6월 5일에 서울지법에서 2차 공판 받는다는). 즉 수백명에 달하는 촛불 사건 연행자의

  3. Subject: 보충: 이론 인류학을 제대로 하기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6/04 16:26

    촛불에 대한 중간계급 이론, 그에 관한 이해와 공박 (http://blog.naver.com/non_organ/70048200572)에서 이어진다. 앞선 글에서 내가 산만한 논변을 벌이게 된 이유는 앞선 글 5절에서 지적했듯 두 층위의 질문을 계속 함께 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 규범의 층위 역시 대단히 중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지 촛불을

  4. Subject: 촛불논쟁 링크와 신기섭 기자의 글에 대한 논평 먼 댓글 보내온 곳 2009/06/10 03:03

    자율평론에서 일전에 있었던 촛불논쟁을 갈무리하여, 웹진에 올렸습니다.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글도 있는데, 예를 들어 신기섭 기자의 글(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357&p_no=1)이 그렇습니다.   신기섭 기자의 반론에 간략히 답해보겠습니다. 먼저 오해부터 하나 풀자면, 저는 촛불대중의 중간계급적 성격을 이유로 그/녀들에게는 급진성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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