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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계 속 국가

리오 파니치(Leo Panitch)

<먼슬리 리뷰> 1998년 10월호

원 제목 =The State In A Changing World

 

리오 파니치 교수가 같은 제목의 세계은행 97년 보고서를 꼼꼼히 분석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세계은행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세계화를 계속 추진하는 방편으로 사민주의적 색채를 조금 띄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변화가 없다는 것이 파니치 교수의 분석입니다. 그래서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서구 사민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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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핵심적인 발전이 우리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하나는 대중 노동계급 중심의 공산당이나 사민주의당을 만들겠다는 사회주의적인 기획이 역사적인 실패를 겪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자본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상당히 연관된 것이다. 또 둘은 서로 분리해서 분석해야만 하는 나름의 운동 원리도 지니고 있다.

 

공산주의의 실패가 단지 전세계 자본주의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사회주의가 숨 쉰다는 점을 공산당과 공산당 정권이 이해하지 못한 것도 실패의 원인이다. 언론결사의 자유가 없는 일당 독재 밑에서는 노동자들이 지배계급이 되는 방법을 배울 수 없다. 레닌이 제헌의회를 해산한 직후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를 질책했듯이 말이다. 정치적 자유가 없다면 "수천가지 문제"에 부딪힐 때 혁명적 변화가 뒤따르는 "수천가지 해법"을 만들 수 없다.

 

사민주의는 반대의 실패를 보여준다. 자유민주주의의 조직 형태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의회사회주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의회사회주의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사회 변화의 동력을 잃었다. 일정한 기간동안 개혁된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있었지만 사회를 변혁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곧 전망을 잃었고 점차 사회주의자다운 수사조차 버렸다. 20세기 말로 향하면서 우파가 국가관료주의와 사민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막스 베버가 20세기 초에 지적한 것이 옳았음이 증명됐다. "결국, 지자체나 국가를 장악하는 것은 사민주의가 아니다. 국가가 당을 정복하게 된다"는 그의 지적 말이다.

 

사민주의에서 동력과 전망이 사라진 사실은 근대화와 제3의 길이라는 요즘의 "현학적 유행어" 뒤에 감춰졌다. 좌파가 세계화에 대해 정치적 도전을 시도할 능력을 갖춰야 할 때인 지금, 이런 용어들은 자본주의 세계화에 조응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 능력은 세계화의 역사적 흐름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그래서 구조적 저항 체계를 갖출 때 얻을 수 있다.

 

세계화의 뜻

세계화는 뭔가? 멋스러운 말이기는 한데 정말 뜻하는 것은 뭔가? 이 말에 얽힌 신화와 오해가 너무 많다. 이런 현상은 특정한 흐름을 너무 단순화하고 특정한 발전을 근거 없이 일반화하는 데서 나온다. 어찌됐든, 오늘날 세계화라고 불리는 것에 공통적인 5가지 차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중요하다. 이 가운데 세가지는 위기 상황이라는 성격을 보여주며, 두가지는 구조적이다. 긴급한 위기상황이라는 성격을 통해 볼 때, 세계화의 의미가 제대로 보인다.

 

(i)자본주의의 공간 확장. 이는 중국과 베트남이 자본주의로 전환한 점, 소련 및 동구권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과 직접 관련된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공산당 간부들이 새로운 부르주아로 탈바꿈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다.

 

(ii)신자유주의 시대를 규정하는 자본주의적 생각과 가치가 이념·문화적으로 지배하는 현상. 부르주아는 여기에 맞춰 "자신의 형상으로 세계를 만든다." 마르크스가 이 말을 쓴 150년 전 이래 한번도 비교된 적 없이 말이다.

 

(iii)최근 몇년의 국제적 계급형성 과정. 특히 자본가 계급의 초국가적 통합. 선두에 선 다국적 기업들의 소유주와 이사회의 소재지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과정은 아직 그리 많이 진전되지 않은 상태다. 다음의 것들을 참조하면, 가장 강한 의미에서 세계화를 좀더 결정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iv)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자본 축적의 새로운 단계. 이는 전후 케인스적이고 브레튼우드적인 질서의 모순에서 시작됐는데, 외국 투자와 무역의 규모와 흐름, 속도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게 특징이다. 국제 신용, 외환 유통, 투기, 선물시장, 개인이나 공공의 부채가 훨씬 더 급격한 속도로 형성되는 것도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v)국가의 국제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는 국민국가에서 도망치는 초국적 자본의 관점이 아니라 국가가 세계적인 범위의 자본 축적을 조장하고 돕는 일에 날이 갈수록 더 장단을 맞춘다는 점에서다.

 

이 각각의 차원은 주의 깊게 분석할 가치가 있다. 특히 네번째 차원이 그런데, 이 차원은 단지 새로운 단계의 자본의 힘만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갈등과 인플레와 이윤의 하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전의 "황금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 네번째 차원은 대량 실업과 대규모의 빈민화가 이뤄지는 지역뿐 아니라 투자와 무역의 중심지에서도 다시 나타나는 경제 위기의 공격을 받고 있다. 국가의 구실이 본질적으로 뭔지를 이해하려면 이 점을 필히 강조해야 한다.

 

세계화 과정이 새로운 우익의 이념적 보호 아래 출발해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개념적 시각에 따라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화는 국내 및 국제 시장 두쪽에서 국가의 구실을 줄이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세계화 과정의 결과, 계급간 힘의 균형이 변하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생기면서 국가의 능동적인 구실은 모호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가? 먼저 국가 스스로가 계급 관계의 터이기 때문에, 자본의 국제화는 외국 자본이 특정한 지역에 뿌리박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 속에 침투해 당사자로 자리잡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국가는 시장과 사적 자산 및 계약에 필수적인 기반과 법적인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을 계속한다. 셋째로, 국가는 자본 이동과 투자, 외환거래, 무역 등과 관련된 규정을 바꿔 세계적 축적이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세계화의 실질적인 주창자다. 넷째, 이 과정에서 국가는 경제에서 손을 뺀 것이 아니라 경제와 국가의 관계를 재조정했으며 사회적 주체와 시장을 대표하고 규제하는 개별 정부기관과 이 기관의 구실을 정비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세계적인 자본 축적의 국제법적인 조건과 기반 구조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간 관계를 통해서다. 이 관계란 국제적 합의나 조약, 국제기구를 관리하는 규칙 등을 통해 형성된다.

 

이것들이 자동적으로 작동한다고 이해하면 안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모두 실험과 실패와 계약과 타협, 긴장과 모순을 통해 생긴다. 여기에 부수되는 긴장과 모순, 계급 투쟁은 국가의 한 지역에서 사라질 수는 있지만 꼭 다른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패와 정치적 매수가 급격하게 느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개별 자본가들이 국제 경쟁에서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그동안 자본 일반에 제공되던 지원금이나 금융 독점, 관세 보호를 특정 정치인을 통해 개별적으로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모순 때문에 신자유주의 우파의 정치·이념적 지도력이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다. 이는 유럽연합 15개 국가 가운데 14개국에서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이 부시와 돌을 이기고도 취한 태도에서 이미 본 것처럼, (대부분의 영역에서 미국 민주당과 더 이상 정책 차별을 시도하지 않는) 유럽 사회민주당들이 모든 차원에서 세계화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시도는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신자유주의에 순응하지 않으려 할 거라는 뜻은 아니다.

 

대처만큼 이념적 신념이 강하지도 않고 자본의 힘과 맞서거나 세계화의 대가를 책임지겠다는 생각도 없는 정치인들에게 가장 편리한 것은, 국제 금융시장과 채권 거래 세력이 "우리의 손을 묶어 버렸다"고 변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증명됐다. <이코노미스트>가 95년 10월7일치의 "힘 없는 정부의 신화"라는 중요한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변명은 "세계적 통합이 이뤄졌어도 각국 정부는 그전에 지니고 있던 경제적 힘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춘다. "정부가 완화한 장벽이 다시 강화될 수 있고, 뜻만 있다면 정부가 실제로 할 수도 있다. 이를 국가주권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하는 <이코노미스트>로서는 "두려운"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 "세계적 통합이 중단돼 거꾸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이코노미스트>는 정치인들한테 정부가 자본가적 세계화를 지원할 책임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도록 요구한다. 또 "(국제무역과 금융의 장벽을 낮추는) 좋은 명분에 (우리의 손이 묶여버렸다는 식의) 나쁜 주장"을 내세우는 걸 중단하라고 요청한다.

 

1997년 세계은행 보고

세계화의 모순 속에서, 국가의 세계화에 대한 물질적·이념적 지원의 성격 변화가 쟁점이다. 세계화는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신자유주의는 한계에 도달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은행의 1997년 세계개발보고서 <변화하는 세계 속 국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이것은 세계은행의 중요한 개입이다. 세계화를 21세기까지 끌어가려는 전략적인 전망에 따라, 지난 1976년의 유명한 3자 위원회 보고서를 이 보고서로 바꾸려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의 주제는 지난번 보고서의 핵심 주제인 "과잉 정부"와 아주 대조적이다. 지난 보고서는 "최소한의 정부"(새 보고서는 이것이 각국에 너무 과한 조처를 유발했다고 암시했다)를 옹호했지만, 이제 세계은행은 시장을 보호하고 시장의 결함을 해결하는 데 정부의 구실이 크다는 주장을 옹호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물론 지난 10년동안 사민주의적 지식인 계층이 흔히 외치던 주장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세계화의 사민주의화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은행이 전하는 핵심 주장은 "세계화가 안방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12쪽] 세계은행은 정부를 필수적인 "동반자이며 촉매자, 육성자"로 볼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은 실효성 있는 재산권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41쪽] 그래서 세계은행은 "정부 주도 개발"이 실패했다고 해서 "효과적인 정부가 없이는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감춰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세계은행이 정부의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시장의 실패를 고치기 위해 시장과 협력해 일하며 (그렇다고) 시장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고유한 힘은 세금을 물리고 어떤 것을 금지시키고 처벌하며 참여를 요구할 수 있는 점이다. 정부가 세금을 물릴 수 있기 때문에 공공재 확보에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다. 금지하고 처벌하는 힘 덕분에 개인의 안전과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다. 또 참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무임 승차를 최소화할 수 있다."[25쪽]

 

세계은행의 목표는 "관심을 국가와 시장에 대한 쓸데 없는 논쟁에서 더 근본적인 정부의 효율성 위기 문제"로 돌리는 것이다.[25쪽] 보고서는 효율성을 "시장의 활성화를 돕는" 일종의 공공 규칙과 공공 제도를 개발하는 차원에서 정의한다.[1쪽] 그러나 이는 정부의 입법 기능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 또한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역과 국경을 넘는 자본의 이동에 대한 규제 완화를 지지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변부화가 아닌 세계적 통합의 많은 선결 조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보고서는 "무역 자유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93개 개도국 가운데 44개 국가에서 국내총생산 가운데 무역의 비중이 지난 80년 중반보다 90년대 중반에 도리어 줄었다"고 지적했다.[134쪽] 또 보고서는 특히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극을 지적하면서 이들을 "내부에서 붕괴하는 국가"로 봤다.

 

보고서는 선진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 관련해서도, 현재의 사회보장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15개 유럽연합 국가 모두에서 명백한 다수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얻기 위해 사회보장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은 12%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 대해서도 미국의 반평등적이고 반복지국가적인 여론과 대비하면서 비슷하게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보고서는 미국의 경우를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111쪽]

 

이런 관점을, 특히 세계은행이 제시할 때는 신자유주의의 묘약 때문에 오랫동안 곤란을 겪은 이들이 상당히 열광하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세계화 비판자들은 열광을 잘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보고서는 국가가 더 국민에 가깝게 가야 하고 시민사회에 더 의존해야 하며 "사회적 이해관계 전체"를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는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베어 물지 말고 자신의 구실을 능력 범위 안에 한정해야 한다는 경고와 조언도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보고서는 특정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쟁점이 될 때는 자신들이 "기본"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정교하게 연결시킨다. "자유 무역, 자본시장, 투자 조직(또는 제도)을 유지하는 것은 경제 성장에 기본적인 것"[48쪽, 강조는 본문] 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보고서가 "안전한" 개혁 곧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통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하는 능력을 국가가 갖추는 개혁만 언급한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세계 통합 때문에 법인세와 개인의 재산세, 관세를 줄이고 대신 부가가치세 같은 소비세를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보고서는 외부의 위험에 직면한 개방 경제에 금융시장이 요구하는 재정적자 해소책도 승인해준다. 또 "선한 행위를 촉발하는 또 다른 자극제 (구실을 하는) 국제적인 조약의 규정, 관습"에 맞춰야 할 필요성을 내세우며 이런 조처를 더 강화하고 싶어한다.

 

보고서의 "좋은 정책을 위한 요리법(대안)"과 "나쁜 정책"에 대한 규정은 사실 엇비슷한 것 이상이다. 나쁜 정책은 "이익을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준다. 예를 들면 “개인에게 예상하지 못한 세금을 비밀리에 부과하거나 경제적 이익을 비밀리에 분배하는" 거시경제 정책이 이런 것이다. 미시경제 정책으로는 "시장이 작동하는 데 제한을" 가하는 것을 꼽는다. 여기에는 "수입 제한"과 "지역독점 특혜"가 포함된다. 반면에 좋은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제한하는 데 우선권을 두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인플레를 "고정시키는" 조처를 옹호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 확보와 "인플레를 사회 평균치보다 더 반대하는 보수적인 이를 중앙은행 총재에 앉혀" 이것을 달성하라는 것이다. "과잉 확장된 국가"에서 후퇴할 수 있게 하는 요소는 "경쟁 시장에 헌신하고 시장의 운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없애려는 의지"다.

 

도시의 병원이나 대학, 교통 분야처럼 정부의 사회간접자본과 사회사업 관련 지출이 집중되는 분야에 대해서조차, 보고서는 극빈층을 뺀 나머지는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시장이 작동하게 하면 충분히 수요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진료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사유재이다. ㅡ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가장 가난한 이들을 뺀 모두는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53쪽] 지역사회와 각 가정이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면 더 적은 비용으로도 사회보장을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발도상국은 서구의 사회보장 수준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인정하기 때문에, 세계화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세계은행의 우려는 훨씬 더 희석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요리책이 신자유주의적 요리책과 뭐가 다른 건가? 다른 것이라면 시장자유화라는 목표를 정부가 사적인 시장을 유지할 관리 능력을 갖추는 것과 연결시킨 점뿐이다. 중요한 분야인 금융에서는 이것이 "통제에서 신중한 조절"로 전환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보고서가 "거의 보편적인... 금융시장과 금융 분배의 통제를 포기하는 것"을 승인하고 있지만, 또한 "자유화가 탈규제화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금융 조절은 어느 때나 그랬듯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마음에 드는 쪽에 신용을 몰아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목적이 금융체계의 건전성을 지키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65쪽]

 

규제개혁에는 사유화가 따라야 한다. 보고서는 사유 영역뿐 아니라 공공 영역의 독점도 반대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유화를 선호하며 특히 공공사업과 사회보험을 사유 영역에 "하청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유화는 해고 수당을 넉넉히 줘서 "노동자들의 동의를 얻고", "매력적인 가격"으로 공공에 주식이나 증서를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또 "독점시장에서 힘의 남용이 생기기 않도록 확실히 억제하는 규제체계"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보고서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ㅡ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최대 관심사는ㅡ 국가-자본 관계에 따르는 지역적 부패다. 이 보고서를 위해 세계은행은 69개국 3685개 기업을 조사해서 부패가 어느 정도인지와 이것이 투자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 알아봤다. 결과는 "심각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부패"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103쪽] 사법기관의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고 규정을 더 투명하게 만들며, 관리의 재량권을 줄이고 정부 입찰 과정에 경쟁을 도입하는 것 모두가 행정 개혁에 따라 진전된다. 물론 이 개혁은 언제나 "무역에 대한 통제를 낮추고 민간 산업 진입 장벽을 제거하고 경쟁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과 연관되어야 한다.

 

보고서가 부패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밝혀낸 요소의 하나는 평균 제조업 임금에 비해 공무원의 임금이 줄어드는 것이다. 보고서는 해결책으로 공공부문 임금 구조의 긴축 완화를 제시했다. 인원을 줄이고 하위직 임금을 억제해 전체 공공부문 임금 예산은 규제하면서 고위 공직자에게는 임금을 더 주는 것이다. 상층부한테는 제 주머니 채우기를 그만둘 만한 물질적인 보상을 하는 것이다. 하위층에 대해 보고서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돈이 아닌 보상 곧 (사회적) 인식, 평가, 특권, 포상, 여기에 덧붙여 적정한 임금과 능력 위주의 채용과 승진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노동자의 헌신"을 확보하는 길을 모색한다.

 

세계화는 진정 "집안에서 시작되고 있다." 세계은행이 옹호하는 더 효율적인 정부를 위한 개혁은 정부 조직의 구조조정과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국세청장을 포함한 요직에서" 시작되는 공무원의 책임감 정립에 의존한다. "집행 계통 확립으로 대부분 달성할 수 있는" 이런 기관의 구조조정은 극적인 예산 삭감과 세제 개혁, 가격 자유화, 규제 완화, 약간의 사유화, 그리고 무엇보다 "고립된 전문 고급관료가 주도하는 효율적인 거시경제적 관리체계 확립"을 목표로 이뤄진다. 그러나 완전히 효율적인 정부는 스스로를 이런 "일세대 개혁"에 한정하지 않고 점차로 입법, 사법, 공무원, 노조, 정당, 언론, 국가와 지방정부, 심지어는 사적 영역에 이어 관료 자체를 구조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마지막에는 "규제 능력을 개선, 확장하는 데"까지 나아갈 것이리라. 이는 보고서가 "공공 영역의 중간 관리에 많이 의존하는 기구 조직의 개발"이라고 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세계화를 지원하는 국제기구가 스스로의 기능을 국가를 넘어서거나 대체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특정한 국가 구조조정을 보장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뜻한다. "자체 개혁의지가 없이 외부의 지원만으로는 얻을 것이 별로 없는"데도, 세계은행은 국제기구의 구실을 전문적 조언과 금융지원에서 더 나아가 "개혁을 되돌리기 어렵게 만들어서 각국이 외부에 의지하도록 유도하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계속 강조한다.[15쪽] 여기에는 국제 상업조약이나 외환조약이 포함된다. 이 조약을 통해 국가는 "스스로 규제하는 법규 곧 정책 내용을 특정하게 규정하는 동시에 정책을 되돌리려면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 구조에 각국을 묶는 법규"에 따르게 된다.

 

결론: 그리기

자크 들로르(Jacques Delors)부터 토니 블레어까지 오늘날 사민주의 정치인들은 진보적인 사회 가치를 지키면서 세계화에 발맞출 수 있는 방안을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자크 들로르 자신의 "사회 헌장"의 운명과 세계은행 보고서의 교훈은, 통화 단일화가 추진되는 유럽에서 좌파가 이 과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국제조약의 노동권, 환경보호 관련 부속 합의서에 집착하는 것은 기껏해야 세계은행이 주창하는 두번째 순위의 정부개혁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당면한 우선 순위의 과제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가치가 전세계 구석구석과 인간 생활의 모든 면에, 또 국가-사회 관계의 모든 차원에 침투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국가'가 아니라 더 효율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세계은행의 인식을, 갈수록 사민주의도 지지하고 있다. 사민주의는 전세계적인 경쟁을 언젠가 극복해야 할 족쇄라고 보는 대신 정부가 내세울 목표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사민주의는 아직 자유민주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더 폭넓은 민주적인 전망을 잃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 원칙 대신 협조 원칙에 따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런 제도를 이용하도록 했다.

 

사민주의의 세계화 수용 정도가 계속 강해지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듯이 동유럽의 과거 공산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엄청난 실업 사태에도 아랑곳 않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위한 사회복지 감축을 단행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직업훈련이라는 새로운 "화물 숭배" ("직업훈련을 시키면 일자리가 생길 거다")까지 퍼뜨리고 있다. 이것은 길거리의 노숙자 문제를 접근할 때, 자본주의 체제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시각에서 보지 않는 것이다. 대신 노숙자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동기를 부여받지도 기술을 익히지도 못했고 사업가적 의식도 없다는 시각에서 보는 것과 같다. 도덕적으로 첫번째 시각에서 시작하지 않는 가치체계에는 사회주의적 요소란 거의 없다.

 

"성공"을 위해 수출 경쟁력에 더 의존하는 사민주의 경제전략에 대해서는 거론할 것이 거의 없다. 이런 전략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윤리적 딜레마 곧 성공적인 국가는 그렇지 못한 나라에 실업을 수출하는 꼴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화에 잠재한 위기 또한 무시한다. 이 위기는 두가지 측면 곧 모든 이들이 수출을 늘리면서 수입은 억제하는 체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과잉생산 측면과 이런 체계의 자유 변동환율에 장단을 맞춰 이동하는 자본 때문에 생기는 금융 불안정 측면에서 발생한다.

 

지난 10여년동안 사민주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을 예로 들면서 국가 기능의 최소화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했다. 동아시아 국가는, 효율적인 시장을 만들려면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특징짓는 "정실 자본주의"적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계급적 성격조차 보통 감춰졌다. 세계은행 보고서도 동아시아 국가를 세계화에 "성공적으로" 통합한 전형으로 꼽았다. 이 지역에 심각한 금융위기라는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는데도 이렇게 추켜세운 점은 이 보고서를 상당히 엉터리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보고서의 핵심ㅡ자유화를 위해서는 규제가 필수적이다는 주장ㅡ은 앞으로도 국제금융과 관련해 더 자주 거론될 것이다.

 

세계은행 보고서가 지난 7월 토론토에서 발표될 때 인디아의 민간단체를 통해 자수 생산을 하고 있는 여성들 비디오가 상영됐다. 이 비디오에서 여성 노동자 대표는 "여성이 단순히 생산자가 아니라 소유자, 관리자가 되는 상황"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발표회에서는 누구도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영감은 세계은행 보고서가 촉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세계화의 모순을 밝혀서 이 시대에 침투해있는 자본의 힘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할 때만 촉진될 것이다.

 

이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정당과 운동의 등장은, 세계화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충돌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세력이 등장하면, 이들은 적어도 세계은행 보고서에서 몇장은 취하고 싶어할 것이다. 세계화의 대안을 만드는 것은 국내에서 꼭 시작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관련된 부분만큼은 말이다. 물론 이런 세력들간의 국제적인 협조의 확대도 필요할 것이다. 각자 특정한 나라에 속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이나 정당은 국경을 넘어 서로를 격려해야 할 것이다. 한 나라의 성공은 또 분명히 비슷한 운동 때문에 변화되는 다른 국가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운동은 자본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국가간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에 장기적인 전망을 내놓고 국민들에게 구조조정의 즉각적인 고통에 집착하지 않고 더 멀리 보게 함으로써, 자국민들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한"[14쪽] "앞을 내다보는 정치 지도자들" 곧 자본주의 세계화의 공헌자들에게 세계은행이 보내는 찬사도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사물의 운동방식에 대한 명확한 전망과 이 전망을 현실로 바꾸려는 전염성 있는 의지가 있는" [144쪽] 자본주의 정치지도자가 더 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세계은행에 대항해, 21세기의 새 세대 사회주의 정치지도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은 세계은행이 지적한 바로 그 자질과 능력을 갖춰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능력을 세계은행이 목표로 삼는 것과 전혀 다른 구조개혁을 위해 사용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이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지도자들의 목표는 정부를 자본주의세계화가 아니라 협력과 탈상품화, 민주주의의 촉진제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번역: 신기섭

2004/07/18 19:07 2004/07/1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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