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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지름길 또는 사파티스타의 각국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리샤르 그레망(Richard Greeman)

<뉴 소셜리스트> 1998년 6/7월호

 

멕시코 농민운동체 사파티스타를 지지하는 이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보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에 집착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밑에 깔린 자본주의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따지자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나는 최근에 스페인에서 열린 "신자유주의 반대와 인간성을 위한 대륙간 만남" 행사에 참석해서 사파티스타 운동에 감명을 받았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을 파괴하려는 세계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공격에 대항하는 진정한 뜻의 첫번째 국제적 대응이 사파티스파의 깃발 아래 열린 것은 아주 적절한 것 같다.

 

올해 스페인 회의가 잘 조직된 것은 아니지만, 이 회의에 감도는 열린 분위기, 당파적이지 않은 성향,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 등은 나를 즐겁게 했다.

 

"신자유주의" 대 "자본주의"

회의 내내 나는 세계화와 삶의 상품화에 저항하는 각종 시도뿐 아니라 경제 대안과 저항의 형태에 대한 흥미로운 의견들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누가 정확하게 "인간성"을 대표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혼란과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해야 하느냐에 대한 혼란을 느꼈다. 마침내 나는, 우리가 반대하는 체제를 지칭하는 이념적 "지름길"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부정확하고 방향이 잘못됐으며 위험하다는 걱정을 하게 됐다.

 

첫째, 나는 "자본주의" 대신 "신자유주의"를 쓰는 것이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경제 이론도, 그렇다고 그 이론에 뿌리를 둔 정책도 지칭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본주의라는 말은 경제, 정치 체제 전체를 지칭한다.

 

둘째, 나는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방향이 틀렸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성 억압과 자연 파괴를 막거나 많이 줄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권력층에게 다른 이론(예를 들어 신케인스주의)이나 다른 경제 정책(예를 들면 복지국가 자본주의)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희망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최근 주장(조직 감축, 합병, 구조조정, 자유시장 도그마, 세계화)에만 반대하고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 곧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을 통해 이윤을 얻는 ‘임노동과 상품교환 체계’에 대한 공격을 소홀히 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는 다른 방식의 국가자본주의 아래서는 인간성이 훨씬 더 잘 지켜질 것처럼 잘못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전망은, 각국의 지역 활동가들이 자유무역과 국제자본의 침투에 대해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애국주의적 지배계급의 보호주의 성향과 결합하도록 초청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점 하나만으로 지역 착취자들, 예컨데 지주나 공장 소유자, 정부 사업 관리자들을 "인간성"을 옹호하는 이들로 여길 수도 있다.

 

이런 환상은 위험하다. 돈은 민족도, 피부색도, 국적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세계적이었다. 자본주의는 "개혁"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본성을 바꾸려는 시도는 상어를 채식 동물로 바꾸려는 것만큼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 상어가 고기와 피를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사람과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체제를 뿌리뽑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두렵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 훨씬 쉽고 안전하며 멋스럽다고 느낀다. 그러나 "위험! 상어가 들끓는 바다임!"이라는 경고도 없이 사람들에게 사회 투쟁의 바다로 뛰어들라고 초청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

 

내가 이 문제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 같다면, 내가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2세대 동안 실패한 급진적인 활동가들을 봤다. 이들은 "반자본주의" 앞에 멈춰선 채 다른 이념적 지름길을 선택하거나, 훨씬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다른 어떤 것에 반대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쉽다는 것을 받아들인 결과, 비참한 실패를 경험했다. 이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반파시스트주의자들과 내 세대의 반제국주의자들이다.

 

오늘날 질문은 "자본주의 대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위험한 지름길로 가는 것이냐?"이다.

 

마르크스공포증

"ㅈ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거의 병적으로 피하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내가 들은 것은 딱 한가지다. 칼 마르크스가 이 말을 썼고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싫다(마르크스도 이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분명, 많은 이들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완고하고 빛바랬으며 무엇보다 한물 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바퀴를 새로 만들어내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바퀴가 돌아간다"고 어설프게 바꿨다.

 

사물을 본래 이름으로 부르기, 내 생각에 이것이 지혜와 일관성의 시작이다. 아이에게 죽음이나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에 대해 말할 때나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단어란 없다. 모든 단어는 그것의 밑바닥에 깔린 이념적 배경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지배적인 언론의 이념은 반 마르크스주의다. 이미 널리 퍼진 이런 분위기는 우리에게 "진부하고" 한물 간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피해 가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고, 포스트산업화를, 포스트포드주의를,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한다. 또 가장 먼저인 동시에 가장 적확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한, 불쌍하고 아무도 읽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졌고 20번은 배척당한 철학자, 마르크스의 오명을 피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묘하게도, 사파티스타의 자극을 받은 운동 진영이 제시한 현재 상황 분석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설득력있는 것조차도 마르크스가 1867년에 자본에 대해 쓴 책의 1997년판보다 못하다. 마르크스의 이른바 "자본의 초기 축적"에 대한 분석은, 1492년부터 자본은 자본가들의 노력과 근면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라, 무력을 써 자본주의 이전 단계 지역 사람들을 "털고 노예화하고 매장"함으로써 축적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세계적인 과정은 계속 강화돼 토착민은 물론이고 환경까지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세계 자본은, 전지구를 장악하고 임금노예건 그의 말대로 "실업자군대"건 모든 사람을 상품의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들 때까지는 결코 확장을 중단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 냈다.

 

그런데도 1997년 마르크스의 이름은 저주받은 채로 남아있다. 이 저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부사령관 마르코스조차 자신의 최근 선언문 "4차대전이 시작됐다"에서 마르크스나 그의 이론을 내비치지도 않은 채 마르크스의 6가지 지적을 "6조각의 퍼즐"이라며 설명하고 있다. 그 결과 마르코스 퍼즐의 "일곱번째 조각"에 가면, "4차대전"이 부자와 가난한자의 전쟁인지 아니면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와 "국가 주권"의 전쟁인지 모호해진다. 분명히 말하건데, 신자유주의같은 개념은 현재 우리의 조건을 밝혀 보여주고 이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핵심 곧 자본주의 체제 문제를 피해가면, 또 적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지 못하면, 우리의 운동은 다음 위기를 접할 때 이념적으로 무장해제당할 것으로 우려된다. 예를 들어 다음번 증시 붕괴 때 기회주의 자본가 정치인은 표를 얻으려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것이며, 월가는 대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들이 선거에서 당선되고 우리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놔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자유주의 반대"는 무슨 뜻이 남겠는가?

 

이상한 동침자

오늘날 프랑스와 미국에서 세계화의 시종일관된 적은 파시스트에 버금가는 민족주의자 르펭과 패트 부캐넌뿐이다. 그들은 명백하게 신자유주의에 맞서 "국가 주권"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정치가 이상한 동침자를 만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자본주의를 반대하기를 꺼린다면 어떻게 우리의 운동이 이런 운동(예를 들어 공장폐쇄반대운동)과 한 침대에 눕지 않을 수 있을까? 사파티스타가 추동한 운동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각종 난관에 맞서 쟁취하려는 것 곧 인간답게 사는 것은 사악하고 돈이 지배하는 상품교환 체계(임금-노동을 포함해)를 제거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휴머니즘은 과거 운동과 대조를 이룬다. 과거 운동은 단순히 노동자의 몫을 더 많이 요구하거나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면 자본주의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본주의 게임’에 갇혀 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임노동 상품 사회를 거부하는 자본주의 이전 원주민들의 휴머니스트 철학에 기초한 사파티스타적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대부분보다 수천배는 더 본래의 마르크스 사상에 가깝다.그리고 우리는 복지국가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국유화주의자, 관료주의적 만병통치약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자"보다 몇광년은 앞서 있다. 마르크스가 바로 그랬듯이 치아파스 사람들은 자본이 사물이 아니라 인간 관계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 관계란 다른 사람의 땅과 노동력을 훔쳐놓고선, 이 도둑질을 노동력을 사고 파는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는 힘의 관계다. 본래 마르크스처럼, 이들은 또 이런 왜곡되고 돈을 매개로 한 관계를 뿌리뽑아, 평등과 협력과 공동체에 기초한 새로운 인간관계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과업이 우리가 직면해서 정복해야하는 괴물의 이름 곧 자본주의를 거론하기 않은 채 성취될 수 있을까?

 

나는 답을 모른다. 하지만 이 질문은 탐구해 볼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상어를 채식 동물로 바꾸려다가 다리를 물리고 마는 운동을 지켜보는 데 지쳤다. 또 "폭넓고" "이념적이지 않고" "일관되려고" 애쓰는 것도 지쳤다. 이는 지옥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일 뿐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옳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에는 ‘선의’가 깔려있다."

 

연대의 뜻을 전하며 리샤르 그레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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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그레망은 빅토르 세르게의 소설 번역자로 가장 잘 알려진 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보이지 않는 인터내셔널... 이는 온 세상에 퍼져 있다"라는 것으로 곧 인터넷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의 주소는 16 r. de la Teinturerie, Montepellier 34000, France이며 전자우편 주소는 richard.greeman@hol.fr 이다.

 

 

번역: 신기섭

2004/07/09 21:12 2004/07/0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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