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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

<제트 매거진> 2000년 5월

원 제목 = (The Suicide of New Left Review)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이론지 <뉴 레프트 리뷰>가 2000년 1월호를 계기로 전면적인 지면 혁신을 단행했습니다. 편집인 페리 앤더슨은 "갱신(Renewal)"이라는 글에서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 승리를 거뒀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좌파 세력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현 체제에 대한 순응도, 그렇다고 막연한 변혁의 희망도 아닌 "타협없는 사실주의"를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반박 글에서 러시아의 좌파 지식인 카갈리츠키는 변혁을 포기하는 리뷰의 자살 선언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맞서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는 비현실적인 비판이라고 일축합니다. 카갈리츠키의 글은 이김정씨가 번역해주신 것입니다. 참고로 앤더슨의 글 갱신 한글 번역본은 여기 (http://copyle.jinbo.net/reader/lr6-45.hwp)에 있습니다.


 

 

40년간, 뉴 레프트 리뷰는 전세계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뉴 레프트 리뷰의 논문들은 좀 더 성공적이거나 그렇지 않기도 했고, 그 관점들의 피상적 급진주의나 무력한 중도주의로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영어를 읽는 모든 좌파들에게 뉴 레프트 리뷰는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정보원이 되었다. 새로운 명사들이 그 페이지를 통해 등장했으며 발표되었던 입장들을 중심으로 한 근본적인 중요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발행되었고 대다수 저자들은 영국이나 미국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뉴 레프트 리뷰는 다른 국가의 저자들에게도 열려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본질과 접근법,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국제적인 발행물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이 저널은 더 이상 없다. 물론 또 다른 저널이 같은 이름으로 발간되지만 이 간행물들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180도 다른 개념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2000년 1월부터 뉴 레프트 리뷰는 편집인을 바꾸고 장정과 호수 체계를 달리했다. 우리 앞엔 포스트모던한 양식의 제1호의 작은 연습책이 있다. "두번째 시리즈 (Second Series)"라는 부제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40년간 살아남은 다음, 세번째, 네번째의 시리즈가 또 있을 것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념의 변화는 의미심장한 "갱신"(Renewal)이란 제하의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서문에서 선언되었다.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의 뒤를 이어 편집을 맡은 페리 앤더슨은 뉴 레프트 리뷰에 새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뉴 레프트 리뷰의 창간도 함께 했다. 편집진의 구성도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피의 수혈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혀 반대의 이야기이다. 우리 앞엔 그저 그들의 기획과 이데올로기를 바꾸기로 결정을 내린 똑같고 오래된 집단이 있다.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정치가들의 상승세를 따라 이 새로움이란 말이 유행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에 신좌파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구현된 "구좌파"와 구별되는 아주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 정치적 선명성은 신, 구 좌파의 공통점을 분명히 하는 구실을 했다.

 

21세기 전환점에서 상황은 바뀌었다. 새로움이란 발상은 다른 모든 생각의 대체물이, 또 어떠한 긍정적 자기동일성의 상징적 대체물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양심에 따라서도) 새로움이라는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주문이 된다. 새로움에 근거한다면 무엇이든 정당화되지만 새로와 진다는 것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게다가 새로움이 "궁극적인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건 더 중요한 점이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어떤 것은 다시 새로운 것이 된다. "새로운" 기획이나 "새로운" 생각에 대한 언급은, 그 기획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혹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숨김없이 선언할 정치적, 지적 용기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그가 논설에서 신중하게 경고했듯이 페리 앤더슨이 토니 블레어의 지지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앤더슨의 관점에서는 블레어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블레어나 슈뢰더 그리고 유사한 "신 사민주의자"들은 전세계적인 범위의 신자유주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증명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이전에 뉴 레프트 리뷰의 초기 설립자들을 고무시켰던 세계를 변혁하는 오래된 기획은 효력을 잃었다. 세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근본적 변화에 대한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회는 통합의 과정을 겪고 있다. 좌파에게 남은 것은 이 과정을 지켜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뉴 레프트 리뷰도 떠오르는 상황에 순응하여 오래된 전통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세련된 영국 신사인 페리 앤더슨은 머드 6가의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서 좌파 기획의 붕괴에 대해 축 쳐져 논하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의 이상과 급진적인 과거를 부인하지 않을 만큼의 지적 정직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의 붕괴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그가 뉴 레프트 리뷰의 첫번째 시리즈와 함께 1960년대의 기획을 묻어 버릴 준비가 되었지만 그의 서문에는 한 절, 한 문장의 정치적인 자기 비판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 좋다. 페리가 다른 젊은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영국의 사회적 사상과 정치적 생활을 혁명화하려던 시도와 그리고 지금,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전복시키려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무슨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는가? 어떤 특별한 고통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가? 서구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론 말고 실제로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가? 아무도 감옥에 갇히거나 분노한 군중 앞에 세워지진 않았다. 그들의 가정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그들의 도시도 폭파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신 것도 아니고 수지가 안 맞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출판사에 공짜 책을 구걸하려고 굽실거릴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동구나 제3세계에서는 일상적인 경험의 일부이지만 번영하는 서구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떤 것도 학문적 엘리트들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앤드슨에겐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상의 역사,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유행이 지난 사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매력을 잃었고 그리고 사르트르는 잊혀졌다. 새로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자는 회한도 없이 이것에 대해 쓰고, 마치 성공한 여성이 자신이 학생시절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던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급진적 과거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러워함이 없다. 시대는 변했고 패션도 그렇다. 유토피안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와 혁명의 희망에 대한 평형추로 페리는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uncompromising realism)"를 내어놓는다.

 

이 현실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쓰레기 같은 진실이라도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나왔다면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좌파 운동의 붕괴를 승인하는 것 이외에 그 논설은 아무런 실재적인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거긴 아무런 분석도 없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반성이나 세계화의 모순과 역학에 대한 이해의 노력도 없다. 이 "분석"은 월 스트리트 저널과 그 경제학자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그 주류 논설을 그대로 요약하는 데까지 갔다. 잘 봐줘도 이것은 전형적인 학교 훈련을 떠올린다. 전체를 읽은 다음 네 말로 바꾸어 말하라. 이 경우 영감의 주요한 근원이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학교의 주석자들이고 페리는 그들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좌파는 그가 보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제안할 능력이 없다. "대조적으로 이 시대에 직접적으로 정치 건설 분야를 지휘하는 우파는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와 어디에 멈추어 있는지에 대한 한가지 풍부한 전망을 제시한다. 후쿠야마(Fukuyama)와 브레진스키(Brzezinski), 헌팅턴(Huntington)과 예르긴(Yergin), 루트웍(Luttwak), 프리드만(Friedman)이 계속 뒤를 이으면서. 이들은 유일하고 강력한 하나의 명제를 학문 영역의 독자들이 아닌 폭 넓은 국제 공공 대중을 위한 유창하고 인기 있는 문체로 써내는 저술가들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이 확신에 찬 양식은 좌파에서는 어떤 대응물도 찾을 수 없다."(19쪽.)

 

이것은 어떻게 앤더슨의 말이 러시아 공산당수 겐나디 쥬가노프(Gennady Zyuganov)의 발언을 반복(과장함 없이 말 그대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적이고 반 마르크스주의자적인 태도에서 이런 방법으로 "근대성"을 세우려 내놓았던 발언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논쟁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팅턴이 앤더슨보다 더 나은 문체를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난 어떤 차이도 모르겠다. 본질은 어쨌거나 다른 데 있다. 우리는 누가 더 많이 책을 찍어내게 하는지나 누구의 문장 구조가 더 멋들어진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좌파는 주석자나 대중 인기 영합자로 모자란 적이 없다. 실제로 관련된 것은 어떤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이론적 토론이다. 그리고 여기서 후쿠야마와 헌팅턴은 무력하다. 20년 전에 어떤 지식인도 브레진스키가 심각한 이론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제 그는, 헌팅턴, 절반은 잊혀진 후쿠야마와 나란히, 지식인의 정신적 선도자 경지에 거의 다다랐다. 이 저자들이 누리는 성공은 사상가로서의 어떤 장점과는 무관하다. 이것이, 이 현상이 사회학적이고 문화학적인 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유다. 이것은 고찰되고 쓰여질 필요가 있는 주제지만 앤더슨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게다가 그는 그런 어리석고 "유행에 떨어진" 토론을 그의 저널에 허락할 생각도 없다.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는 최소한의 비판적 사고조차 없는 곳에서 구성된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지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더슨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조차 필요 없고 그저 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적에 대한 세련되고 신사적인 형태의 무조건적인 항복이다. 페리는 그의 칼을 부수어 버리고 승리자의 자비에 완전히 무룹꿇었지만, 진짜 신사답게 위엄과 양식을 갖추고 했다. 그는 물론 승리한 적들이 이 "의용군대"로 무엇을 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이론가는 자발적으로 그의 "상아탑" 속에 갇혔다. 바깥에 남겨진 우리들은 그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 생각은 실제의 운동과 마주칠 경험이 완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태어나며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된다. 좌파 운동은 위기에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급진적인 행동과 비판적 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다. 필요한 건 잘 구축된 전략과 최종 분석에서의 원리를 갖춘 견해와 윤리적 기초이다. 이 대신 페리는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의 주석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논의하고 앞으로는 저자들이 좌파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남아있는 건 오직 이름을 뉴 레프트-라이트 리뷰(New Left-Right Review)로 바꾸는 일 뿐이다. 신사가 노동조직가나 거리의 투쟁가가 될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비록 아주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이 20년 전에는 가능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좌파"의 교수들에게 거리에서 경찰관들과 한 데 어울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합당한 자신들의 책무, 비판적으로 생각하기에 바쁘기만 하다면 만족할 것이다. 우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견해에 근거해 판단하기 위한) 우파와의 지적 연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근본적 접근법의 완벽한 논리적 귀결이다.

 

페리는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위기(러시아의 채무 불이행,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봉기, 그리고 1999년 가을 미국 시애틀의 거리에서 그들의 힘을 보여준 새로운 좌파 대중의 운동에도)를 간신히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이 현상들을 고찰한 저자들에 대해 조롱을 덧칠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좌파 상당 부분의 배신이나 겁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훨씬 첨예해질 것이다. 배신은 1914년 제2차 인터내셔널의 항복 문서에서 보듯이 역사적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윤리적 성격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예프게니 슈발츠의 일화들 중에 하나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사악한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누가 당신들을 탁월한 학생이 되도록 강요했는가? "갱신된" 좌파들은 신자유주의의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좌파의 갱신은 필수불가결한 일로 보인다. 잡종 블레어-슈뢰더-쥬가노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갱신자"들과의 단호하고 타협하지 않는 결별과 문자 그대로 우리 눈앞에 군집하고 있는 대중 운동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대체 이데올로기의 필요는 중대하다. 급진주의와 저항은 이론적 근거를 얻어야 한다. 지금은 지식인들이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적기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영향을 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페리의 논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결론부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정치적 옳바름으로 더 많은 비서구쪽의 투고를 환영한다고 선언하다. 여기서 다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구" 뉴 레프트 리뷰가 비영어 사용권과 비서구의 대표자들에 대해 페이지를 충분히 열어주는 데 실패했다고 헐뜯고 있다. 그러나 책꽂이의 "구" 뉴 레프트 리뷰 소장 목록에서 하나 꺼내어 보는 것으로 현실이 이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뉴 레프트 리뷰는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남한, 인도와 아프리카의 저자들을 포괄했다. 그러나 반면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이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불가피하다. 왜 비서구 사람들이 그들 존재의 필수적 문제에 관한 노골적인 무관심을 보이는 저널을 위해 글을 써야하는가? 왜 대서양권 내부 그룹의 지식층에 속하지 않는 저자들이 그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저널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가? 페리는 앵글로-색슨 문화 지식인들의 지적 나르시시즘을 애도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의 끝간 데를 보여준다. 진정한 신사는 물론 외국 학자들의 사상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우리 외국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수사를 해야하는 역을 할당받았고, 더 나쁜 것은 이미 만들어진 문화적 문맥 속에 집어넣어져 "문명화된 토착민"의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전혀 아무런 지적인 요점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이 전혀 서구 지식인들과 차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외국 저자들의 글을 싣는가? 소련의 옛날 농담에 이런 게 있다. 인사팀장이 이야기하길 "우리가 라비노비치에게 일자리를 주었다고 그가 더 이상 유태인이 아니길 기대하지는 마라." 똑같은 이야기다.

 

만약 주변부 저자들의 글을 싣고자 한다면 그들이 서구의 전 급진주의자들의 허약함과 허영심에 그리 감명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진 마라.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잡지의 개념과 세계관이 국제주의여서 서구에서 발행된다는 것에 따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처음부터 그들의 완전한 지역적 발행물이라는 특성을 받아들인다. 황량한 미국의 대학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몇백명 되는 전 급진주의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이러한 저널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유럽과 미국의 급진적인 문화의 최고를 대표했기 때문에 비서구 좌파들에게도 뭔가 가르쳐줄 것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널이 더 앵글로색슨적일 때 다른 나라의 우리들은 더 흥미를 발견했다.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는 페리의 서문으로 판단할 때, 이코노미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의 논설들을 "그들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제공할 듯 싶지 않다. 그러나 원본이 있는데 왜 다시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 담론은 문화들 간의 대화와 공통점이 없다. 나는 현대 중국 영화에 대한 유행하는 프랑스 비평가의 태도를 찾아내기 위해 영국의 저널을 읽는 데는 흥미가 없다. 이건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문화의 사회학에 흥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점은 단순히 이런 거다. 이미 수십개의 저널이 이 분야에 대해서 더 잘 분석하고, 더 상세하고, 더 전문적으로 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와 지식의 매개가 없다는 것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현대 마르크스 이론과 정치적 분석의 국제적 저널이었고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페리의 관점에서는 이 기획은 죽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건 아니다. 수백만이 틀리고 한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편집자 스스로가 신나게 승리에 차서 원래의 기획을 묻어버렸는데 우리가 왜 뉴 레프트 리뷰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페리 앤더슨이 이전의 뉴 레프트 리뷰와 다르게, 그것을 공격하고 새로운 저널을 만들 필요를 느낀다면 차라리 기존의 발행물을 폐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더 정직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유지한 주요한 이유가 친숙한 상표명을 고수하려는 생각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으로 앤더슨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적 지적인 좌표를 뉴 레프트 리뷰의 영향하에 형성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인간적 모욕을 주었다. 옛 이름을 새로운 저널로 그대로 이전함으로써 페리는 우리의 공통의 과거와 공유한 역사의 일부를 훔쳤다. 이것은 더 이상 용서될 수 없다. 제호와 장정이 바뀐 것은 좋다. 이것은 그의 직업적인 정직함을 보여준다. 상당한 수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이것은 신호가 될 것이다. 친숙하고 아주 사랑 받던 저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부모가 그것을 죽였다. 새로운 저널은 월 스트리트 저널의 구독자들 중에 새로운 독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 www.zmag.org/suicidenlr.htm

번역: 이김정

2004/07/15 16:47 2004/07/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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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의 시대를 위한 좌파 정치학: 무엇으로 이행?

<먼슬리 리뷰> 편집진

<먼슬리 리뷰> 2002년 1월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2002년 1월 <먼슬리 리뷰>에 실은 '이행의 시대를 위한 좌파 정치학'이라는 글에서 몇가지 대담한 주장을 합니다. 자본주의가 진정한 체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좌파는 이행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전세계 반체제운동이 위계질서가 없는 가운데 횡적으로 연대하고, 반인종주의, 민주화 확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말인즉은 모두 맞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민주의, 민족해방운동 등 3대 좌파 정치가 모두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거나, 선거에서 좌파는 중도좌파를 전술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 등은 그냥 넘기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월러스틴의 글과 나란히 실린 이 글에서 먼슬리 리뷰 편집진은, 자본주의가 체제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것, 반인종주의나 민주화 확산 등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으면 공허할 뿐이라는 것 등의 비판을 제기합니다. 이에 대한 월러스틴의 답변은 실패한 전략을 부여잡고 기다리기만 할 때가 아니라 지금은 세상을 좀더 나은 쪽으로 바꾸기 위해 실천을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세가지 논쟁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첫째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진정한 체제 위기"를 맞았으며 자본주의와 자본주의를 잇는 그 어떤 체제간의 이행기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5세기에 걸친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근본적 변화의 진정한 전망이 있다"는 주장이다. 세번째는, 1848년과 1917년의 혁명과 연결된 두가지 혁명 전략은 모두 누더기가 됐으며, 그래서 월러스틴이 다른 글에서 "1968년 세계혁명"이라고 규정한 운동의 지속적인 영향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충됐음에도 전략적으로 혼란스런 상황에 좌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1) 이 세가지 주장을 바탕으로 그는 현 시기를 위한 몇가지 정치적 제안을 내놓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세가지 주장과 여기서 도출된 정치적 제안을 논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진정한 체제 위기"에 빠져있나? 흥미있는 질문이다. 월러스틴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유들을 따져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수요의 탄력성과 그에 따른 가격의 탄력성 획득 가능성이 부과하는 제한 안에서 "실제 이윤은 세가지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비용, 투입 및 사회하부구조의 비용, 세금이 그것이다.... 나는 500년동안 자본주의 세계경제 전반에 걸쳐, 이 세가지 비용이 생산된 가치 전체와 비교할 때 꾸준히 비중이 늘어났다고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의 순수한 결과는, 자본가들의 자본 축적 능력에 위협이 되는 전세계적 이윤 압박이 나타나고 있으며 날로 커진다는 사실이다." ("좌파 정치학" 147쪽.) 게다가 이번 글에서 월러스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세계의 탈농촌화"는 노동력 비용 증가를 억제하기 어렵게 한다. (2) "공해 처리의 생태적 한계"는 자본가들이 환경 비용을 외부화하는 데 제약을 가하고 있다. (3) "세계의 민주화 확산"이 "건강, 교육, 평생 소득 보장"을 위한 비용 해결을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려는 점증하는 움직임을 이끄는 요소다. 이 세가지 요소는 그래서 비용 증가를 뜻하며, 전지구적 이윤 압박을 유발하고, 자본주의의 체제 위기를 부른다.

 

이 주장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예컨대 단위 노동비용(곧 물리적 단위 생산량 당 노동 비용)을 줄이는 식으로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이런 난점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다. 월러스틴은 "전지구의 모든 부분을 통틀어서 생산이 100년, 200년, 300년전보다 더 '효율적'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전세계 생산이 생산자 관점에서 더 '효율적'인지에 회의적일 뿐 아니라, 그 추세가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효율적인 생산의 승리라는 것은 단지 이런 하락세를 늦추는 시도에 불과하다. 지난 20년동안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공세 전반은, 첫째 임금과 세금을 낮추고 두번째로 기술 발전을 통해 투입비용을 낮춤으로써 생산비용 증가를 둔화시키려는 거대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이 공격의 예봉을 맞은 이들의 고통은 너무나 클지라도 이 성공의 전반적 성과는 아주 제한적이며, 그 제한적 성과마저 되돌려질 상황에 처했다고 믿는다. ("좌파 정치학" 147쪽.)

 

이것이 자본에 날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 영역의 사라짐 곧 전 세계가 세계경제로 통합되는 것과 주변부의 탈농촌화로 자본이 내재적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옮겨갈 장소가 날로 좁아진다는 점 때문이라고 월러스틴은 지적한다. 이는 대담한 주장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우리 견해는 이런 생각과 더 이상 달라질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장기적인 효율성 하락 추세 곧 자본주의 중심과 주변부의 생산성 하락 추세를 발견할 수 없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비용이 장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인 것은 맞고, 환경 비용과 세금도 늘고 있지만 (물론 세금이 어느 계급에게 떨어지는지도 문제다) 중심부건 주변부건 전지구 어디에서도 착취율을 떨어뜨리는 이윤 압박 같은 현상은 없다. 노동 등 각종 비용 증가를 감당하고도 남는 생산성 증가와 환경 비용을 외부화하는 자본의 능력, 이 두가지가 심각하게 약화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과세 국가의 위기"가 있다면, 그건 슘페터가 관찰했듯이, 계급에 기초한 경제 체제가 세금이 자본/이윤에 너무 깊이 침투하지 말 것을 요구해서 생긴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2)

우리가 주장하듯 전체 체제의 착취율 증가가 나타난다는 점은, 과도한 생산시설과 실업/불안전 고용 문제와 함께 투자처를 찾는 자본의 과잉에 자본이 직면해왔음을 뜻한다.3) 세계의 탈농촌화는 대부분 주변부에 존재하는 실업자 곧 산업 예비군 규모를 더욱 증가시킨다. 그들의 임금과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10억명에 달하는 주변부 사람들이 예비군으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마도 그들은 영원히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실업과 불안전 고용, 영양실조가 만연한 상황이다. 이 상대적인 잉여 인구, 패논이 말한 "지구의 비참한 이들"이 이 세계 어디에서도 이윤을 압박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축적의 절대 일반 법칙은 상대적인 잉여 인구의 증가와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양극화 심화를 지적했다. 이 법칙이 작동하는 영역이 이제는 전세계이다.

 

월러스틴의 두번째 주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 역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근본적 변화의 전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적하는 "근본적 변화"가 꼭 진보적인 성격은 아니라면서, "아마도" 진보적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좌파 정치학" 146쪽) 이 주장은, 오늘날 투쟁이 세계체제 곧 지구화에 대항한 것이며, 각 개별국가에서 국가 장악에만 집착한 과거의 투쟁들과 대조적으로 전지구적 이행의 정치학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의 세번째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번째 주장은 1848년과 1917년이 각각 상징하는 19세기와 20세기의 좌파 전략은 국가의 장악과 그에 이은 사회 변혁을 목표로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실용적이지도 적합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1848~1968년 기간 동안 유행하던 세가지 세계 사회주의 운동 곧 사민주의, 공산주의, 민족해방운동은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세가지 운동 모두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도 세계를 바꾸지 못했다. 그 결과 지금 이 전략에 대한 깊은 환멸이 이 전략과 나란히 존재하게 됐고, 그 사회심리적 결과인 심각한 반 국가주의도 나타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1968년의 세계혁명은 새로운 "정신"을 형성하고 대안적인 전략을 키우면서,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훨씬 더 지구적인 모형을 대변하는 것으로 월러스틴은 여긴다.

 

그는 지금 적용할 수 있는 1968년식 혁명적 정치 기회 몇가지를 제시한다. (1) "포르투 알레그레 정신" 곧 "전세계의 다양한 반체제 운동을 비계층적으로 통합하는 일"을 촉진하기 (2) 권력 장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좌파 세력" 형성을 위한 "방어적 전술" 차원에서 방어적 선거 정치기법을 활용하기 (3) "살살 다뤄서는" 안되는 중도 좌파 정부 아래서도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4) "자유주의 중도세력이 자신들의 이론적 기호를 실천"하도록 요구하기 (5) 반인종주의가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기준"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이기 (6) 비 영리기관의 확산을 통한 탈상품화를 촉진하기 (7) "우리가 기존 세계체제에서 다른 체제로 이행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어떤 이행기 정치 전략에서든 핵심 문제는 "조직이 아니라" "통찰력"이라고 월러스틴은 결론짓고 있다.

 

우리는 월러스틴의 이행 전략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기에 1848년(아마도 마르크스를 뜻하는)도, 1917년(레닌)도 완전히 과거가 아니다. 이 말은 1848년 파리에서 벌어진 일과 1917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또는 혁명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또 그 혁명전략에 변화가 필요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맞서는 혁명 투쟁에는 월러스틴의 견해가 암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 지구화 자체가 국가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 아래 세계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투쟁은 계속 국가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1968년 사건이 비록 극적이기는 하지만 "세계 혁명"이라고 보지 않으며 혁명적 투쟁사에서 근본적인 단절을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정치적 반란의 상징으로서 포르투 알레그레의 중요성에 동의한다. 그런데, 사회운동간 연합이 필수적이라고 우리도 믿지만,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차지하는 계급운동의 핵심 전략적 구실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는 또 선거 투쟁은 단순한 방어적 전술이 아니라 장기 혁명에 통합되는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 필요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화의 개념이 너무나 타락한 나머지, 현재 세계의 진정한 민주화의 가장 큰 적은 미국 제국주의 국가라는 점이 거의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바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유주의 중도세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실로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테러에 대한 지구적 전쟁의 국면에서 미국의 이른바 "자유주의 중도세력"은 사라졌다. 물론 이는 과거 역사를 보면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은 그 어떤 투쟁보다 시급한 것이지만 (마르크스는 "까만 피부색으로 낙인찍히는 곳에서 흰 피부의 노동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고 썼다),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 있는 보편적 뿌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독점에 대한 공격에 시비 걸 이유는 없지만, 그 공격은 자유주의의 반독점(반트러스트)의 환상 차원에서가 아니라 독점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의 한 부분으로 이뤄져야 한다. 탈상품화 또한 가치 있는 목표이며 시민사회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한가지 수단이 된다. 하지만 장기적이고 폭넓은 반자본주의 혁명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 가능하다. 이행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과 관련한 월러스틴의 충고는 잘 받아들였다.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항상 설명했듯이, 우리는 단기적인 조건과 장기적으로 타협해서는 안된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두가지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최근 몇년동안 제국주의에 관해 중요한 분석을 제기했던 월러스틴이 제국주의 곧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두번째는, 물질적 조건, 사회 세력, 정치 조직에 충분히 근거를 두지 않은 좌파적 낙관론의 위험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행이 벌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무엇으로 이행이란 말인가? 전지구적 구조 위기의 시대에, 이 체제는 자기 내부의 파괴적 잠재력을 해소하는 데 그 어느 때보다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곤 한다. 우리는 세계가 좀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이행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는다. 역사상 첫번째의 사회주의 투쟁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상품화와 멸절의 무자비한 세력에 대한 전지구적 투쟁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면 그건 태만한 것일 뿐이다. 사회주의는 더 이상 (만약 과거엔 그랬다면) 단순한 유토피아적 꿈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성과 지구를 지키는 것이다.

 

주석

1. 이 글에서 논하는 월러스틴의 주장은 여기에 실린 그의 글에서 충분히 전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주장의 상당 부분은 과거 그의 저작에서 제기한 다른 쟁점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답변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그의 최근 저작들을 둘러봤는데, 주로 검토한 것은 "21세기를 위한 좌파 정치학? 또는 다시 한번 이론과 실천", [새 정치학], 22:2 (2000), 143~159쪽이다. 아래서는 이 글을 "좌파 정치학"이라고 줄여 부른다.

1. Wallerstein's arguments in the talk reproduced here are not fully explicated, since much of this has to do with points that he has been making for some time in his work. In preparing this response we have therefore turned to some of his other recent writings, principally his article "A Left Politics for the 21st Century?, or Theory and Praxis Once Again," New Political Science, 22:2 (2000), 143-59. In what follows this article will be cited as "Left Politics."

 

2. 조지프 슘페터, "과세 국가의 위기", 슘페터의 [자본주의 경제학과 사회학], 리처드 스웨드버그 편 (프린스턴: 프린스턴대학 출판부, 1991), 112~115쪽.

2. Joseph Schumpeter, "The Crisis of the Tax State," in Schumpeter, The Economics and Sociology of Capitalism, ed. Richard Swedbur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112-15.

 

3. 이 주장의 더 정확한 표현은 이번호 "이달의 리뷰"를 보라.

3. For a more detailed rendition of this argument see the "Review of the Month" in the present issue.

 

 

원문은 인터넷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번역: 신기섭

2004/07/15 16:34 2004/07/1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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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진저> 1998년 7월호

원 제목 = `국가와 좌파'에 대한 리오 파니치 (Leo Panitch) 교수 인터뷰

 

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과의 파니치 교수가 `진저'(Ginger)라는 진보단체와 `국가와 좌파'를 주제로 인터뷰한 것입니다. 파니치 교수는 세계화 또는 지구화 시대에도 국가의 기능은 여전히 막강하며, 지구화의 주도세력도 자본이 아니라 국가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개별 국가를 바꾸면 추악한 세계화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정부기관을 새롭게 바꾸기 위한 진보진영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정훈 님이 번역해주셨고, 제가 약간 손봤습니다.

 

이미 제가 번역한 파니치 교수의 `변화하는 세계 속 국가' (먼슬리리뷰 1998년 10월)도 참고하십시오.


 

 

리오 파니치(Leo Panitch)가 세계화, 국가, 그리고 좌파가 국가의 구실에 대해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관해 진저와 토론했다.

 

▲ 진저 : 당신은 국가의 구실이 상당히 변했다고 생각합니까? 실제로 소멸되어가고 있으며 투쟁의 관점에서 어떤 구실도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 파니치 :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의 소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대한 재미난 변형이겠지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아래에서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가 실제로 이해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관계, 그리고 심지어는 자유시장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람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어쩔 수 없이 유발하는 갈등과 모순을 감당하는 국가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국가의 구실이 축소되고 있다는 관점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시기 내내 국가는 탈규제, 자유시장 등을 둘러싸고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의 삶에서 국가를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자유방임 원칙아래 있던 19세기 국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본 축적 조건을 창출하고 강화하는 것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활발한 국가입니다.

 

레이건주의, 새처리즘, 또는 신자유주의 등 어떤 것도 국가를 우리 삶과 떼어놓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도리어 국가를 이용하거나, 단순히 자본주의에 이용되기보다 스스로 나서는 국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건 국가는 경쟁력 있는 동력의 조건을 만드는 데 적극적인 구실을 자임합니다. 사람들은 세계화가 자본이 국가를 피해 지나가도록 이끌거나, 국가가 세계화 때문에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것은 정말 잘못 이해한 겁니다.

 

▲ 진저 : 기업이 공적, 사적 국제시장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고 좀더 강력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강조점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 파니치 : 기업은 국가가 없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기업이 체결하지 않았고, 기업이 고안하지도 운영하지도 않습니다. 세계무역기구와 국제통화기금은 국가 대표들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기업이 아니라, 이런 전략을 이해한 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관료와 경제학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자본의 압력은 노동계급의 요구와 국가의 재정 위기와 나란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본이 국가를 벗어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사민주의, 비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적 관점에 의해 배워 왔기 때문에 오해를 합니다. 우리는 루즈벨트가 "보라, 나는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 속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국가 통제가 어느 면에서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관념을 고집합니다.

 

어떤 통제는 더 이상 세기말에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이 좀더 자신감을 얻고, 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덜고, 더 전투적이 되게 만드는 실업보험 같은 규제 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각한 반대가 나타났고 그래서 국가는 지금 이런 규제를 완화하면서 다른 양식의 규제를 찾고 있습니다.

 

새로운 양식의 규제는 자본의 움직임에 문을 열어 줬고 모든 제약을 없앴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국가가 자본의 움직임을 보호하는 데 아무 할 일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국가는 외국 자본에 국내 자본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하고 지적재산권 같은 것을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것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국가 통제를 포함합니다. 매우 능동적인 국가인거죠. 최근 해리스(Harris)가 온타리오(Ontario)의 교사들을 공격한 것처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노동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모순을 다루는 것도 역시 포함됩니다.

 

▲ 진저 : 당신은 이러한 점에서 노동계급에 맞서는 싸움을 주도하는 것이 국가라는 데 동의하시겠군요? 10년전 기업 세력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위해 사회복지 프로그램 축소 로비를 벌이는 동시에 기업 자신들의 인력 규모를 줄임으로써 이 싸움을 부추겼습니다. 지금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의 첨병은 다름아닌 국가 그 자체입니다.

 

▲ 파니치 : 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진저 : 세계화 이래 국민국가가 아직도 투쟁의 초점입니까?

 

▲ 파니치 : 만약 국가가 세계화를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세계화를 처리할 국가도 필요합니다. 지금 자본이 국가를 무시하고, 국가가 시종 구실만도 못하게 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국가를 포기하고 다소 공상적인 국제주의에 열중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많이 보고 있잖아요. 이것은, 가상 공간에서 가상 자본을 갖고 뭔가 일을 하는 어떤 국제 시민사회가 생성되리라는 약간 모호한 개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정치 투쟁은 항상 국가 수준에서 해결됩니다. 당신이 나처럼 세계화를 국가가 후원하고 주창한다는 관점을 수용한다면, 마르크스의 이 말이 바로 오늘날에 해당합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국가 대표로 구성됩니다. 변화가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려면 국가를 바꿔야 합니다. 국가 정책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전체 조직 구조까지도 바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히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취하는 행동의 결과가 자본의 해외 도피라면 무엇이 행동의 관건인가? 자본 이동을 통제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자본의 해외 도피를 멈출 수 있는가?"

 

남들은 "그러나 당신이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이크로칩 혁명 - 단추 하나를 누르면 돈이 뉴욕에서 도쿄로 이동합니다 -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거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컴퓨터 혁명 때문에 자본의 움직임을 감시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미국 정부는 돈 세탁을 위해 자본을 이동하는 자를 감시하는 구실을 할 국제 금융 컴퓨터망을 요구해 왔습니다. 모든 국제 거래는 뉴욕에 있는 세 개의 통신망을 통과합니다. 두 개는 사유물이고 하나는 공공재입니다. 감시 문제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입니다. 한 국가의 정책 변화는 다른 나라로 빠져 나갈 힘이 있는 자본 때문에 제한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들 사이에서 자본 통제책을 재확립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고 각 나라에서도 이러한 통제책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여론을 먼저 얻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움직임의 초점을, 자본의 이동을 쉽게 하기 위해 각 국가가 진행하고 있는 협력에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또 통제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간에 협력하도록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이것이 혁명적인 듯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혁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 말미에 자본 통제 개념을 미국과 영국의 협상가들이 논의했습니다. 그 생각은 만약 자본이 국가의 법률에 대항하여 떠난다면 다른 국가가 첫 번째 국가의 허락이 없이는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제안은 그 당시에는 무산되었지만 지금 자본 통제를 주장하는 데 중요한 전례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가 각 나라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의 부흥을 이루어내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벌여야 하는 투쟁의 목표입니다.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은 서로 서로 협력하며 서로를 고무시키며 비슷한 속도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자체와 그 내부는, 각 국가 내부의 움직임에 의해 개별 국가가 먼저 변하지 않고서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리우에서 열린 환경운동 회의 또는 나이로비와 베이징에서 열린 여성운동 회의는 사람들이 자국에서 로비 활동을 벌일 때 기준이 될 국제적으로 합의한 원칙들을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적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자국을 바꾸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 진저 : 요즘 지방 도시정부(또는 도시 지자체, city state)를 자본의 기술적 변화와 혁신의 중심 근거지로 표현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도, 지방 도시정부가 탈규제화하는 대신 노동복지정책과 같은 제도로 규제를 다시 강화하는 움직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 파니치 : 나는 도시 수준의 정부가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별로 확신하지 않습니다. 명백히 작은 나라인 싱가포르와 홍콩은 그런 기능을 하지만 뉴욕 또는 토론토 행정부가 자본 흐름을 촉진시키는 주도적인 기관이라는 견해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도시가 금융 자본이 집중적으로 모여있고, 전체 경제를 후미로 둔 자본 집중의 매듭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토론토, 런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뉴욕은 그런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 옮긴이) 재정부가 베이가(Bay Street)에 하는 것이나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월가에 하는 것같은 구실을 도시 정부가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두 번째 질문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는 복지국가를 훈련시키고 규제를 푸는 데 능동적입니다.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보편적인 복지 제공을 없앰으로써 국가를 없애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복지를 얻는 데 영향을 주는 조건과 복지정책이 결정되는 조건을 결정하는 재량권을 바탕으로 정부가 간섭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가 좀더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을 또 한번 보여줍니다. 자유주의자와 사민주의자 - 이 세상의 클린턴 류, 봅 레이 류(Bob Raes), 토니 블레어 류 - 들은 국가가 매우 능동적인 구실을 한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세계은행까지도 우리에게 최소한의 국가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부패를 제한하고 노동자와 복지 혜택을 받는 이들을 재교육시켜 그들이 경쟁적 자본을 위해 좋은 재원이 될 수 있도록 하고, 기술적 변화를 지원하는 국가 말입니다. 사민주의 기술관료들은 우리에게 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산업 정책을 개발하고 관련 비용을 보증하며 많은 훈련을 촉진시키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론은 복지 혜택에 의존하는 노동자를 훈련시키면 여기(캐나다: 옮긴이)의 임금 비율과 관계없이 제3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많은 관점에서 글러 먹었습니다. 그들은 제3 세계에 상품을 수출하고 그들과 경쟁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교육과 복지국가 프로그램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목표를 채택하는 것이며, 비윤리적입니다. 사회주의자는 항상 이러한 것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비록 사민주의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당신이 집없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보면, "이 사람은 훈련과 교육이 덜되어 있으며 비경쟁적, 비기업가적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엿같은(fucking)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훈련은 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남부 온타리오 지역에서 성공한다면 그것은 실업을 위쪽 뉴욕주에 수출한 댓가일 것입니다. 제3 세계가 기술과 훈련을 채택할 수 없으며 우리 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우리와 경쟁할 수 없다는 전형적인 서구의 개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훈련의 핵심 전략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독일이 만드는 데 100년이 걸린 직업훈련 체제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세대(60년: 옮긴이)가 걸릴 것입니다. 봅 레이(Bob Rae)에게는 장기적인 직업훈련 체제와 분리된 산업 정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정책은 아마도 2030년에나 효과를 보기 시작하겠지만 그는 4년 뒤에 다시 당선되어야 할 처지입니다. 이 쟁점 또한 우리가 능동적인 국가라고 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몇몇 진보적인 사람은 국가가 능동적인 한 그것이 자본주의를 지원하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진저 : 그러나 캐나다 정치 환경에서는 지금 신보수주의적 정책들이 해리스주의자 등의 관점을 빌어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보시죠?

 

▲ 파니치 : 국제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해리스의 사례와 다릅니다. 캐나다인은 종종 시대에 뒤떨어집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클린턴-블레어 스타일 정부가 현재는 더 전형적입니다. 물론 사민주의적 형태의 전략에 되어 먹지 못한 것이 얼마나 포함되어있나를 따져보는 척도의 하나는, 그들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여하지 못하는 모순에 갖혀있기 때문에 실제로 교육에 투자할 계획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부자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돈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진저 : 복지 정부 또는 공공 훈련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클린턴이 정부 개입을 강하게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미국의 교육은 점점 사유화되고 있습니다.

 

▲ 파니치 : 그점을 아주 잘 지적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은 그 방향입니다. 그들이 복지국가를 재편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을 이러한 훈련 체제에 종속시키고 밀어넣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편적 복지 혜택을 유지할 때는 해리스 류의 `신병 훈련소'(boot camp)를 만들 수 없습니다. 노동복지정책 뿐 아닙니다. 직업훈련도 같습니다. 진보적인 이들은 평생교육을 말하곤 했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마치 바다표범이나 원숭이라도 되는 양 훈련에 대해 떠듭니다! 레그 위테커(Reg Whitaker)가 말했듯, 사람들이 직업훈련을 받는 것은 고용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 진저 : 국가에 대해 조직적 요구를 제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좌파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파니치 : 가장 우선적인 것은 외국과 협력해 자본 통제를 다시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머리속에 진짜 우리의 국가를 확립하고 세계의 여타 운동 세력들도 이것에 우선권을 두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재정부 또는 캐나다은행(Bank of Canada)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은 좌파가 충분히 진보시키지 못한, 역사적으로 약한 문제입니다. 이랬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언제나 국가는 시들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이 좌파가 국가의 구조적 틀과 구성을 너무 신경쓰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우리가 몰두해야 합니다.

 

국가를 조직적으로 재건설하자는 대규모 캠페인이 필요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이것은, 국가 기구와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추상적인 경제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와 노동 계급을 위해 종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해방 이론이 말하는 것과 거의 유사하게도 가난한 계층에 명백하게 우선 순위를 두는 것과 연관됩니다.

 

이것은 국가기관 노동자들을 위한 큰 변화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무주택자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 뉴욕에 있습니다. 그것의 핵심 방향은 사회사업 인력을 요구하고 무주택자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회사업 인력이 실제로 이 일을 처리할 때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보다는 사리분별력을 지니고 자신을 무주택자의 옹호자로 자리매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재정부를 어떻게 바꿀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에는 모든 산하 기관과 각 국의 내부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뒤따릅니다. 이들이 봉사하는 사람들을(수혜자들을) 기관 외부인으로 보기보다는,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혜자들이 선출직 위원회를 통해 다른 기관과 부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게 하는 길을 생각하는 것이 좀더 이롭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필요한 정부 형태의 모형입니다.

 

이것은 또한 공공 영역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관을 대표하고, 차관(부장관, deputy ministers) 또는 산하 기관장을 선출하는 데 힘을 발휘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후보는 장관이 지명 추천할 수 있지만, 선출의 결정은 결국 일반 공무원들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공 영역 노동자들의 또 다른 구실입니다. 이것은 정책 대안에 대해 서비스 수혜자들과 토론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만약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정책에 5가지 대안이 있다면, 관련 노동자들은 정책 선택을 위해 노인들의 투표를 실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여기에 속박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을 결집시키고 교육시키고 최종 결정을 위한 자료를 얻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성격과 관련해 필요한 것을 생각할 때 급진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말 (우리를=옮긴이) 약하게 만드는 것은 공적 영역은 선이며 '우리 편'이고, 사적 영역은 나쁜 것이며 '우리의 반대편'이라고 말하는 좌파의 경향입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론의 거울 (반대란 뜻=옮긴이) 이미지입니다. 이것은 공적, 사적 영역 모두의 계급적 본성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 이것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분리 사고를 완전히 깨야 합니다.

 

당분간은, 내가 생각하기에 급진적 국가가 어떤 형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을 만들어내고 반영할 수 있는 교두보가 국가안에 있습니다. 지역 사회 또는 노동자 일반의 특정한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혁신적이며 민주적인 프로그램과 서비스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두보는 축소되고 있으며 자원이 제한되어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유토피아적인 전략이 아닙니다. 매우 장기적인 전략임에는 분명하지만요.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국가를 세우고 기획할 구조적 개혁을 즉각적으로 얻어낼 수는 있습니다.

 

* 리오 파니치(Leo Panitch)는 토론토의 요크(York)대학 정치과학과 교수이며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이다.

 

 

원문: www.web.net/~beng/ginger

번역: 이정훈

2004/07/15 16:24 2004/07/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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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