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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과 대방의 차이.

한달 전쯤인가. 빈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붓고 있었다. 

그때, 전화 주문을 받고 나가는 지음을 보고 "아니 도데체 이런 날 주문하는 센스없는 사람 누구야!!"  

누군지 얼굴모를 주문자가 매우 못마땅했고, 그런 주문을 거절하지 않는 지음을 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뭐 그땐 메신저 하기 전이었으니까. +_+

 

오늘, 주문이 들어왔다. 아침부터 비바람이 무섭게 내리치고 있는데.. 주문이 들어왔다.

'비가 와서 주문이 없으니 오늘 다들 휴업하고 자율학습 합시다'란 지음의 문자를 확인한지 5분도 되지 않아 말이다.

그나마 아침은 다 먹었고 설거지까지 끝난 후에 주문이 들어와 다행이라면 다행.

주문자는 프레시안. 아뿔싸, 우리동네군- 주문 대기하기 너무 좋은 동네에 사는 게 이럴 땐 원망스러워... :_:

틈날 때마다 난 비오는 날은 자동 휴가라고 떠들어놓고선 가방에 비닐봉지를 챙겨 판초비옷을 입고서 집을 나섰다.

등뒤에 꽂히는 언니목소리 "이런 날은 자전거 잘 타는 사람들도 안탄다던데. 조심하고, 사고나면 누구 원망할지도 몰라!"

(누구? 나? 지음? 빈집? 공룡? 주문자? 그 누구도 원망할 일 없도록 조심조심 타야지.)

 

집에서 채 5분도 안되는 거리인데 프레시안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홀딱 젖어버렸다.

프레시안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는 마님(주문자 닉네임)은 달군과 돕에게서 자전거메신저에 대해 얘기듣고선

전부터 사용하려고 생각하다 마침 오늘 물건이 있어 주문하게 됐다며, 사실 비가 너무 와서 망설였다고 했다.

그런 마님께 나는 "아니에요. 전화 잘 하셨어요~!" 라며 속 없이 웃어버렸다.

허허.. 한달 새 사람이 너무 바꼈나? 내 안에서 나도 모르게 커가고 있었나보다. 물불 안가리는 서비스정신.

앞으로의 거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선 물건을 픽업해 건물을 나섰다.

마님이 준비한 비닐과 내가 준비한 비닐까지 총 두 겹의 비닐봉지에 싸인 두 개의 물건.

배송할 곳은 이대와 대림동이었다. 아니.. 대림동인줄 알았던 것이었다... T_T

 

폭우로 경복궁역 앞이 차들로 엉켜 엉망진창이다.

이런 맛에 자전거메신저 하지. 안그래들? ㅎㅎ 꼬인 차들 사이로 쏙쏙- 휙휙- 빠져나와 사직공원 쪽으로 달렸다.

버스정류장을 앞에 두고 잠시 고민. 금화터널 상태 별론데.. 버스로 지날까..?? 

의외로 비 맞으며 달리는 것도 재밌고, 자전거 접었다 펴는 것이 귀찮아 그냥 가기로 결정.

▶ 1차배송: 프레시안 > 경복궁역 교차로 > 사직공원 > 사직터널 > 고가도로 > 금화터널 > 이대후문 > 이대본관

 

첫 배송을 마치고 이대를 관통 후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빗방울도 굵어지는데 이제 2호선 타고 대림까지 쏠까?

이때 다시 페달을 밟게 한 건 '그래도 명색이 자전거메신저인데' 라는 이름값 하고픈 마음과 역시 자전거 접는 것에 대한 귀차니즘, 그리고 이미 젖은 몸이라는 사실. 에라.. 오늘 그냥 흠뻑 젖어보자꾸나! :p

 

이대 정문에서 신촌기차역과 신촌역, 광흥창역을 지나 서강대교 진입.

이미 한강은 똥물, 다리 위라 거칠 것이 없어서인지 비도 비지만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역풍.

비칠비칠 다리를 건너 여의도 입성. 혹시나 하고 길가의 버스정류장의 노선을 살펴보니 대림동 가는 버스노선이 있다.

여의도에서 일곱정거장. 뭐.. 많이 안멀겠네. Go!

대림동으로 간다니 정류장에 서 계시던 아줌마께서 쭉 가지 말고 KBS쪽으로 꺾어서 다리 건너 가라고 알려주신다. 국회를 지나 KBS 쪽으로 꺾어 가다보니 서울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신호 걸린 틈을 타 옆 택시아저씨께 다시 한번 길을 물어본다. 신길쪽으로 가지 말고 영등포역 앞을 지나가 고가 아래서 왼쪽으로 가라신다.

 

이미 물빠짐 기능을 상실한 도로의 수심은 10cm도 넘어 보인다. 맨 가엣 차선을 쓸 수 밖에 없는 자전거의 특성상 어쩔 도리가 없다. 아스팔트의 물은 가로 빠지게 만들어놨으니. 간혹 곁을 지날 때 속도를 줄여주는 착한 차들도 있지만 대부분 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줄일 생각도 없어 보여 -_-+) 물폭포를 쏘고 지나간다. 하늘에선 비가 때려붓고, 길에선 차가 튀기는 물총세례. 판초에 와 부딪히는 소리가 완전 대포소리다.

 

영등포역을 지나 고가도로 아래서 왼쪽으로 꺾어 작은 고가로 영등포를 지나가는 철로를 넘는다.

신도림동을 지나니 대림동이다. 아.. 대림동! 대림역 근처를 먼저 찾자쿠나!

대림역 부근의 아파트를 다 뒤져도 대림아파트가 없다. 길가는 사람들도 모르는 대림동 대림아파트.

우성,건영,현대 아파트는 있으면서 대림동에 대림아파트가 없는 게 말이 돼?

오늘따라 부동산도 잘 눈에 안띄는데 마침 택배아저씨를 발견. 아저씨께 여쭸더니 "음... 근처에서 본 거 같은데... 저 윗쪽으로 올라가봐요. 근데 난 약국밖에 몰라!"   약국으로만 물건을 배송하는 분이셨다.

지도도 없고 믿을 건 아저씨 뿐이라 알려주신 대로 갔지만 대림아파트 대신 현대아파트가 우뚝 섰다.

앗... 부동산 발견! 자전거를 세워 놓고 들어가려는데 부동산 아줌마의 찌푸린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판초에서 떨어지는 빗물 때문에 맑은 날처럼 성큼 지도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얼굴만 들이민 채 물어보지만 대답이 시원찮다. "여기 대림 아파트 없는데-" 

 

 

차양 아래로 들어가 배송갈 물건을 꺼내어 보니...읍. 대림동 대림아파트가 아니라 대방동 대림아파트다. -____-////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며 전의상실. 위치감각상실. 배도 고픈데 울고 싶다.

울더라도 배송을 마치고 울어야 할 것 같아 지음에게 SOS를 쳤다. "대림동이랑 대방동을 헷깔렸는데 여기서 대방동 어떻게 가야해요?"

지음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힘이 빠진다.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버스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꿋꿋하게 잘 달려왔다 스스로 토닥이고 있었는데 왠걸, '대림'과 '대방' 한끗 차이로 삽질 라이딩을 하고 있었다니...

여의도에서 바로 빠지면 대방이었을 걸 대림인 줄 알고 영등포 지나 둘러둘러 대림까지 왔다 다시 대방으로 회귀..

대방동 공군회관 바로 맞은편에 대방동 e-편한세상 대림아파트가 있었다.

배송을 마치고 아파트 현관에서 담배를 꼬나 물고 싶었으나, 담배 대신 수위 아저씨와 함께 홍삼캔디를 까먹으며 응어리진 맘을 풀었다. 이 빗속에 왠 자전거냐는 아저씨께 배달 왔다고, 경복궁 근처에서 왔다니 눈이 좀 커지신다.

할만하냐, 하루에 얼마나 일이 있냐, 체력은 무지 좋아지겠구만. 도란도란 아저씨와 얘기 나누고 오늘의 배송을 마쳤다.

 

▶ 2차배송: 이대정문 > 신촌역 > 광흥창역 > 서강대교 > 여의도 > 국회의사당  > KBS > 서울교 > 영등포역 > 신도림동 > 대림동 > 대림동 대림아파트 찾아 뱅글뱅글 > 신길동 > 신풍역 > 보라매역 > 대방동 대림아파트

 

 

원효대교로 가려다 지하차도 진입 실패, 노량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홍삼캔디의 약발이 다 되었는지 몸이 무겁다. 집에 와서 판초의 기능을 상실한 물솜판초를 벗고 안에 입은 모든 것을 빨고 샤워를 마치고 가방을 열었다. 공책과 책이 젖었다. 지갑도 젖었고 지갑 속 7000원도 젖었다.

다 괜찮다. 근데 핸드폰이 젖었다. *_*  액정 창에 뿌연 김을 가득 채운 채 아직까지 켜지지 않고 있다.

오늘 밤 안에 회복되었으면 좋겠는데... 응급 드라이기 바람에도 꿈쩍 않는다.

깨어나 제발...

 

지난 번 배송도중 강한 타박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이제 겨우 2주 밖에 안 지났는데 또...

내일 아침에 다시 스카이 서비스 센터를 가야겠다.

 

베테랑 메신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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