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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다시 "민중"과 "지식인"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건가? 혹은 "다중"과 "전위"에 관하여?

 

- 올 5월의 저항은 그간 마치 현 상황이 무슨 대단한 절망의 시대인 것처럼 종말론적 언어를 쏟아내던 "지식인"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

 

- 이 문제에 관한 한 안병무야말로 현명했다. "나는 민중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 주체이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이 이 역설적인 말을 증명하고 있다.

 

-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완전한 융합. 이것은 먹고사니즘인가? 아니면 삶정치적 봉기인가? 알다시피 내 입장은 후자다.

 

- 두더지라는 천박한 예든, 화산맥이라는 초큼 무서운 예든 우리는 대중의 잠재적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이명박 실용주의가 우리의 삶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에 대중은 그것을 정치적 무기로 또한 버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 저항은 보통 지배와 동형성에 입각해 발생한다. 그래서 전두환에게 대항하는 정치적 기획은 또 하나의 '주권' 기획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민주화라고 부른다.

 

- 그러나 이명박 시대에 이르러 우리를 지배하는 안보와 경제성장의 논리는 주권권력의 형태가 아니라 삶권력의 형태로 우리를 지배한다. 저항은 삶권력을 뒤집은 대항-안보(뇌송송 구멍탁!)의 삶정치적 봉기로 나타나고 있다. 

 

- "겸손히 대중의 지도를 따르는 전위(지식인)" 이건 진중권의 말인데, 조금 더 나아가 우리는 이제 대중을 계몽하고 있는 지식인들도 결국은 '대중일 뿐'임을 자각해야 한다. 오직 자신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는 성찰하고 있어."라고 강변하고 있는 이들만 이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여하간, 이제 좀 삶을 즐길 때다. 물론 이 즐김은 정서의 바다에 푹 빠지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대중으로서의 현자, 현자로서의 대중을 제시한다. 대중으로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우중의 상태를 결과적으로 넘어서지 못한다. 대중과 분리된 현자의 이상은 "극히 드문 사람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며, 내가 읽기로는 에티카의 마지막 몇 문장은 그 기획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대중이 되어야 하며, 또한 현자가 되어야 한다. 대중이 됨으로써, 우리의 삶의 능력을 신장함으로써만, 우리는 현자가 될 수 있다. 우매한 대중과 성찰하는 지식인의 분리는 이제 파기되어야 한다. 대중이 될 때만이 우리는 성찰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성찰없는 대중으로 머물자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 다음의 문장은 계속 이상하게 읽혀왔고, 말해져 왔다. 나도 이상하게 한 번 더 반복할 생각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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