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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해소 : 그 해법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

 

‘양극화 해소’ : 그 해법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


‘양극화 해소’가 사회정치적인 핵심 과제로 자리잡았다. 어떤 정치세력이든, 사회운동이든 한국사회의 당면한 핵심 과제로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4년차에 접어들면서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협정 체결’을 최우선 국정운영과제로 두겠다고 밝혔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보수정치세력과 주류학계의 의견은 크게 두 갈래이다. ‘소득격차 개선을 통한 양극화해소’이냐, 아니면 ‘시장활성화를 통한 중산층 복원’이냐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두고서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성장이냐 분배냐’라는 좌-우 이념논쟁으로까지 과장하고 비화시키고 있다. 이 두갈래 의견의 공통점이자 핵심적인 방안은 ‘일자리 창출’을 주된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위해 서비스산업을 육성하여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소비를 진작시켜 경제활성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류정치세력과 학계, 자본가세력의 ‘양극화해소’ 해법은 이율배반적이다. 양극화의 핵심인 노동의 불안정화와 소득격차의 확대, 그리고 빈곤층의 증가는 자유무역의 확대를 꾀하는 개방화, 세계화와 이와 동시에 진행된 노동시장 유연화가 원인이다. 이는 철저하게 ‘시장 활성화’와 ‘금융화’ 전략을 뒷받침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해소’를 언급하면서 그 해법으로 시장활성화, 자유무역을 외치는 것을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미국의 부시처럼 ‘ownership society(소유자사회)’를 주장하면서 감세, 사회보장의 민영화 확대를 부르짖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을 견지하는 것이 차라리 정직하다. 이른바 ‘Trickle down 효과’를 언급할 지 모르지만, 세계화 시대에 제조업 분야에서 이른바 ‘고용없는 성장’은 보편화된 현상임을 그들도 인정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의 영역으로 각광(?) 받고 있는 서비스 산업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재 이 산업에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상당수가 저임금의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자리 창출’이 양극화를 해소하기는 보다는 저임노동자의 숫자만 늘려 양극화의 골은 더 깊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도 한다. 


다른 한편 양극화의 해법으로 네덜란드나 아일랜드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사회적 대타협’이실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노사정 3자협의 기구를 얘기하기도 하고, 전체 국민의 대표성을 들며 정당, NGO 등의 참여하는 범사회적 기구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를 반영해서인지 정부에서는 ‘양극화 해소와 사회통합을 위한 연석회의’를 제안했었으나, 의제를 축소해서 올해 1월 ‘저출산 고령화 대책 연석회의’라는 이름의 기구를 출범시켰다. ‘사회적 합의 모델’은 경제도 살리고, 노동자․민중도 살리는 이른바 ‘윈-윈 전략’으로서 외쳐지고 있긴 하지만 성공사례처럼 여겨지는 네덜란드나 아일랜드의 모델도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한국사회에서 이를 실현시킬 수 있을 지는 더욱 모호하다. 사회적 합의 주체간에 신뢰가 부족하다는 ‘도덕적’ 원인 분석에서 근거한 것이 아니다. 양극화 해소를 말하면서 양극화의 원인인 ‘자유무역’과 노동시장유연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법률을 추진하는 정부․보수정치세력에게 있어서 ‘사회적 합의기구’는 자신의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한 매개이자,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밖에 기능할 수 없다. 아일랜드나 네덜란드의 사례에서도 사회적 합의 기구에서 논의되는 의제는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와 개방화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고, 나머지 사회보장정책이나 고용정책 등은 이를 뒷받침하거나, 용이하게 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사회적 타협모델’에서의 주된 의제는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와 개방화, 자유화 조치를 벗어난 획기적인 대안이 논의되기 힘든 지형이라는 점이다. ‘윈-윈전략’은 현실가능한 대안이 아닌 관념 속의 대안이거나 신자유주의 전략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적 관념일 뿐이다. 

진보진영 내부를 살펴보더라도 그다지 전망은 밝지 않다. 일부 운동세력은 양극화 해소를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전략의 제시와 실천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와 자본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극명한 예가 2005년 말 비정규직관련 법률 개정과 관련한 논쟁이 진행될 때 일부 시민단체는 그간 노동계를 비롯한 진보진영이 주장했던 내용에서 크게 후퇴한 안을 ‘최악보다는 차악’이라는 논리와 현실 세력관계를 근거로 대면서 주장하였다. 노동운동진영도 마찬가지이다. 내부의 요구를 단일화하고, 정부와 보수정치세력, 자본의 개악 움직임에 맞서 내부로부터 투쟁동력을 끌어올리는 조직화에 힘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교섭’이라는 명분으로 정부와의 ‘상층 협상’에 기대거나, 국회 일정에 따라 자신의 투쟁일정이 좌지우지되는 양상을 보이기만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노동조합운동 내부의 갈등과 논쟁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고, 운동진영 내부의 계급적 요구와 단결이 분명하지 않는 조건에서 ‘사회적 합의 기구’에의 참여는 둘러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함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이상의 크게 두가지 의미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사회적 합의 모델’은 가장 현실적인 듯 보이지만 그런 만큼 현실적이지 않다. 이미 서유럽의 대다수 사회적 합의 모델은 신자유주의로 수렴되었듯이 말이다.


‘양극화’의 원인, 상황진단과 분석, 해법의 제시는 사실 우리 사회의 체제의 성격과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을 둘러싸고 ‘이념’의 문제를 근저에 깔고 있다. 더불어서 이를 구체화하는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이 논쟁의 한가운데에는 체제 ‘내부’의 변화와 발전을 둘러싼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체제의 경계에 서거나, 체제 외부를 사고하는 내용은 ‘열외’로 치부되거나, 사회적 아젠다로 진입하기에는 힘에 부치거나, 설 익은 앙상한 뼈대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이다. 수없이 거론되고 있는 사회운동의 위기,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등은 사실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양극화 해소가 담고 있는 내용이  ‘없는 80%가 있는 20%를 따라잡는 것’이거나, ‘있는 20%는 그대로 두고, 허리를 살찌우는 것’이라면, 그것의 현실성과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지점을 바꾸기란 쉽지가 않다. 운동의 위기는 이 논쟁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해 볼 시점이다. ([사회복지와노동] 10호, 편집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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