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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련칼럼44] 의료에 관한 못된 거짓말 : 싱가포르 의료의 진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사실은 흔히 두 가지 중의 하나이게 마련이다. 하나는 몰
라서 잘못 알려진 것인데, 이 경우에는 잘못된 사실을 퍼뜨린 사람의 무지를
탓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행위 자체를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악의가 없이 행
해진 잘못은 상대적으로 바로잡기 쉬울 뿐 아니라 피해도 심각하지 않은 경우
가 많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잘못 알리
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상황이 좀 고약하다.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뿐 아
니라 나중에 사실이 밝혀져도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수가 많다. 그리
고 피해도 꽤나 심각하다. 그런데, 최근 의료분야에서 이 같은 '악성' 거짓말
이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심각한 피해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바로 '싱가포르'에 관한 이야기다. 작년 국내 유력한 수구 일간지가 싱가포르
의료를 기획연재하면서, 세간에 회자된 거짓말이다. 이 거짓말의 골자는 "싱가
포르는 의료를 산업화하고 기업식으로 운영해서 달러도 벌고, 세계의 의료허브
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고리타분하게 공공성 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
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의 폐해는 매우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고위층들
의 회의석상에서까지 의료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근거로 싱가포르가 제시되
고 있는 지경이다. 경제자유구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의료이용 편의를 제공
할 목적으로 경제자유구역법에 언급된 외국인 전용병원이 순식간에 동북아중심
병원으로 탈바꿈한데에도 싱가포르에 대한 거짓말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싱가포르 의료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세상 어디에
도 수구 일간지가 사기를 친 것처럼 '제 맘대로 진료하고, 돈 벌어먹도록 놔두
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전체 국민의 85% 가량이 정부가 제공하는 임대주택에 살고 있을 정도로
사회인프라의 공공성이 강력한 싱가포르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싱가포
르 보건부 홈페이지에 가 보면, 보건의료정책의 목표를 '공공병원과 폴리클리
닉(우리나라의 보건소에 해당하는 기관)을 통해 전체 국민에게 양질의 기본 의
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싱가포르 의료 현황을 살펴보
면, 이 같은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의 목표가 그냥 하는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우선, 2002년 현재 정부의 보건의료 예산 규모
가 무려 1조원에 이른다. 싱가포르보다 인구수가 11배나 많은 우리나라의 2004
년 정부 보건의료 예산이 4,500억원 가량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규모이다. 공공병원에 대한 예산 지원 규모를 보면, 이 같은 차이는 더욱 두드
러진다. 2000년 한 해 동안 싱가포르가 13개 공공병원과 17개 폴리클리닉에 지
원한 국고보조금은 4,800억원에 달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34개 지방공사의료원을 대상으로 1997년부터 2003년까
지 지원한 국고보조금을 전부 합한 규모가 불과 1,200억원에 불과하다. 이처
럼 싱가포르는 자국의 공공보건의료체계에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정부의 천문학적인 공공보건의료체계에 대한 지원 덕택에 싱가포르 국민은 저
렴한 비용으로 병원진료를 받고 있다. 전체 공공병상의 49% 가량을 차지하는
C 등급 병상을 이용할 경우, 정부가 병원진료비의 80%를 지원해 주고 있으며,
전체 공공병상의 44%를 차지하는 B 등급 병상을 이용할 경우, 세부 등급에 따
라 20∼65%의 병원진료비를 지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정부의 지원 때문에 전체 병원진료의 80% 이상이 공공병원에서 이루어
지고 있으며, 공공병원이 병원진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
다. 싱가포르에서는 공공병원은 대형이고, 기술적 난이도가 높고, 심각한 질환
을 보는 반면, 민간병원은 주로 소규모이고 특정 분야에 주력하는 경향이 있
다. 흔히 싱가포르의 의료보장제도인 의료저축계정(MSA)의 단점으로 '소득재분
배 기능의 약화'를 언급하는데, 이 같은 단점마저도 강력한 공공보건의료체계
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에 그 부정적인 효과가 최소화되는 것이다.
세계 해외환자 유치 시장의 1%를 점유하고 있다는 싱가포르의 해외환자 유치산
업은 이렇듯 자국 국민의 건강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공공보건의료체계
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싱
가포르를 처음 회자시킨 수구 일간지는 앞 뒤 다 잘라먹고, 싱가포르 의료의
극히 일부만을 흡사 전체인 양 보도했다. 그리고 이에 이해관계를 가진 일부
이익집단과 언론, 그리고 정부 내외의 개발 지상주의자들이 서로 주거니 받거
니 하며, 그 파장을 증폭시켜 나갔다. 과거 기득권층과 수구언론, 그리고 독재
정권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 땅의 민주를 압살하고 그들만의 풍악을
울리던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행태였다. 하긴 독재정권 시절의 못된 버릇
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있는 수구 기득권층의 작태를 보면, 이런 정도의 거짓
말은 식은 죽 먹기인지도 모른다.
막말로 자국 국민의 건강을 싱가포르 정부만큼만 챙겨준다면, 해외환자 유치
를 유치한다며 아무리 난리법석을 쳐도 뭐라 탓할 사람 누구 하나 없을 것이
다. 자국 국민에게 기본적인 의료조차도 보장해 주지 못하면서, 의료가 산업입
네 하며 해외환자를 유치하겠다고 나대는 정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정부인
가? 많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거짓말을 일삼고 있는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싱가포르만큼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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