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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07. 현장선전물]

희망버스,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대오를 구축하자!
 
기만과 폭력 : 계급적인, 너무나 계급적인 자본가 계급의 대응
     정리해고가 부당하면 응당 즉각 복직이 정답이건만, 청문회를 진행할 때는 정리해고가 부당한 것이라고 그토록 조남호를 쪼아대던 환노위 국회의원들이 어처구니없게도 1년 뒤 재고용이라는 기만적인 권고안을 내놓았다. 이를 조남호가 수용하자, 그가 마치 크나큰 양보라도 한 양 ‘공은 이제 노조로 넘어갔다’며 노조의 양보를 강요하였다. 날이 밝자 한진 주변에 전경들을 시커멓게 배치하고는 물대포로 유린하면서 수많은 희망들을 연행하였다.
      자본가계급은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털끝만큼도 훼손하지 않은 채 제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엇보다 위험한 희망버스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온갖 기만과 폭력을 스스럼없이 자행하였던 것이다.

전선의 심각한 교란 : 진전된 안? 한진동지들이 결정할 문제?
     국회의 권고안을 조남호가 수용하자, 금속노조 등은 아무런 보장도 없는 ‘물밑’ 약속(근속을 인정하겠다, 김진숙이 내려와서 가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병원이다)에 홀리기라도 한 듯, ‘진전된 안’이라며 ‘이제 한진동지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하였다.
      아니 자본가 계급의 기만과 배신이 하루이틀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교섭과정에서 재고용의 껍질 안에 근속인정이라는 사실상의 정리해고 철회를 담아줄 것이라고 정녕 기대라도 했단 말인가?
      무엇보다 국회권고안 수용문제가 한진동지들만이 결정할 문제인가? ‘이제 한진동지들이 결정할 몫’이라는 말은 전선을 위축시키고 한진동지들에게 부담을 떠넘긴 꼴이 되어버렸다. 희망버스 기획단조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지경에서 한진동지들이 ‘권고안을 받지 않으면 설자리가 없다’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교섭이 시작되고 저들의 태도가 어떠했나? 한진사장 이재용은 교섭석상에서 ‘권고안을 받을 것인지를 먼저 결정하라, 근속연수 인정은 절대 안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민주투사라면 떳떳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처벌받아야 하며 공식 사과문을 제출하라’는 망발까지 내뱉고 교섭석상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아래로부터의 전선유지 : 한진동지들의 정리해고 철회투쟁 사수
     모두가 인정하듯이 한진지회 선거에서 차해도 동지의 선출은 소위 ‘강성’집행부의 탄생에 그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진지회 동지들이 스스로 해고투쟁을 하겠다, 민주노조를 사수하겠다는 압도적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현장은 죽지 않았다. 어용집행부를 당선시켜 사태를 조기수습하려던 한진자본의 책동을 분쇄하고, 근속인정, 김진숙 지도위원 면책 등을 내걸고 아래로부터, 조합원의 결의로 기만적인 권고안을 넘어 정리해고철회 투쟁전선을 사수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의 기치를 더 높이!
해고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대오를 희망 안에 구축하자!
     김진숙 지도위원의 목숨을 건 투쟁, 한진동지들의 투쟁과 희망이 어울린 희망버스투쟁은 자본의 독재에 맞선 핵심전선으로 자본가계급을 일정정도 분열시키며 밀어붙이고 있다. 만약 기만적인 권고안에 멈춰서거나 물러선다면, 당분간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전국의 모든 관련 사업장은 법원의 판결에만 목을 매고 기다리는 상태를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은 불보듯 뻔하다.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의 기치를 더 높이 들고 보다 힘차게 투쟁해야 함은 누구나 느끼는 바일 것이다. 희망버스 대오 속에 해고된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오가 반드시 조직되어야 한다.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로 나아가는 투쟁의 장에서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은 정말이지 말이 안된다. 전국의 모든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 동지들, 모든 희망의 선두에서 투쟁의 구심이 되자! 자본이 꺼질 때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힘차게 전진하자! 자본가에겐 절망을, 모든 인간에겐 희망을!
 

 
민주노총 지도부, 기어코 배신의 길로 가려는가?
       10월 27일 민주노총 중집은 1차 노대를 서울, 2차를 부산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양다리 걸치기 아니 뒷다리 걸치기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산별의제가 어쩌구 행사진행이 어쩌구 핑계를 댄다. 아니 부산에 가면 우리 동지들의 입이 바닷바람에 막히기라도 한단 말인가? 산별의제의 집중이 짠물에 녹아버리기라고 한단 말인가? 산별의제들이 모두 이야기되고 이것이 정리해고 철회를 향한 힘으로 집중되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자본가들의 정치적 하수인을 모아 놓고 그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려 한다고. 한진동지들을 구렁텅이로 몰고, 쌍용차동지들을 사지로 몰아 놓고 방관하는 자들과 그래도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라. 그것이 전태일정신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하라! 그러지 못하겠거든 1차니 2차니 하는 따위의 결정을 철회하라!
 

 
고장난 자본주의, 고쳐쓸 것인가?
자본가 세상을 넘어, 가자! 노동자 세상으로!

     자본주의의 심장부,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한 줌 청년들의 시위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양적으로는 월스트리트를 넘어 미국 전역, 나아가 전 세계의 투쟁으로 확대된 지 오래다. 주목되고 있는 것은 질적 발전이다.

자본의 탐욕을 멈춰라! 노동자 총파업!
     소수 청년들의 시위로 시작했던 월가점령운동은 노동자 총파업으로 나아갔다. 월가라는 지역적 한계 상 금융자본에게 국한되어 이루어지던 규탄과 항의가, 모든 자본에 대한 전면적 공격으로 발전했다.
     “자본의 흐름이 중단되길 바란다”는 노동자들은 자기 현장을 멈추는 데 그치지 않고, 항구를 폐쇄해 물류를 멈추고 은행을 점거해 금융거래를 멈췄다. 총파업으로 자본의 탐욕은 완전히 저지됐다.
     어디 이뿐인가? 노동자들은 항구에서 “누구의 항구인가? 우리의 항구이다”라고 외쳤다. 은행에서는 “누가 누구의 도둑인가?”라고 외쳤다. 총파업을 통해 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노동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자신감 있게 ‘누가 세상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물은 것이다.

고장난 자본주의, 고쳐쓸 것인가?
     월가점령운동을 자본가만을 위한 세상 그 자체에 반대하는 노동자의 계급투쟁으로 발전시킨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다. 고장난 자본주의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고용 축소와 실업, 임금 삭감과 복지 축소라는 죽음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서는 제 목숨을 연명할 수 없다. 그뿐인가? 자본가 국가는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체제조차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본주의를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채찍질이 저항만 불러오니, 당근을 내밀며 사기를 치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에 한두번 속았나? 미국의 노동자들도 믿었던 오바마가 경제도 못 살리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복지도 강화해주지 못하자, 참다못해 스스로 투쟁에 나섰다. 오바마와 민주당 역시 자본가 계급의 일 분파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민주대연합? 박원순? 안철수?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민주대연합에 노동자의 운명을 걸 것인가?
우리에겐 이미 김대중, 노무현의 실체를 경험한 역사가 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그들의 작품이었다. 집값 폭등, 등록금 폭등이 그들의 작품이었다. 그들의 후예가 뭐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든,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보면 '경제대통령' 이명박도 김대중, 노무현이 망친 경제를 살릴 '희망' 아니었던가?
     박원순과 시민운동세력을 믿어보자고? 미국 민주당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민운동세력과 함께 했지만, 그 내용은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진보와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권력을 잡고 나면 달라질 것이 하나 없었다. 박원순 역시 ‘노동자의 편’ 운운하지만, 자기 단체에서는 노조조차 허용하지 않는 ‘반(反)노조주의자’다. 안철수는 어떠한가? 그는 ‘21세기에 어울리는, 능력 있는 사업가(자본가)’의 전형일 뿐이다. 청춘 콘서트를 통해 청년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지만, 실제로는 등록금 문제를 심화시킬 ‘서울대 법인화 준비위원’이다. 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를 무덤으로”
     문제는 ‘누굴 뽑을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자본의 탐욕과 독재를 뿌리 뽑고, 노동자세상을 건설할 것이냐?’다. 노동자가 직접 투쟁에 나서 총파업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고 자본의 흐름, 자본의 이윤 추구를 멈춰버리지 않는 한, 고용불안과 빈곤, 극악한 노동통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산에 대한 자본가 소유와 통제를 박탈하지 않는 한, 노동자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 이미 미국의 노동자들은 직접 나섰다. 아직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월가점령운동에서는, 무자비한 착취와 탄압으로 노동자를 죽이려는 “자본주의를 무덤으로!” 보내자는 (월가점령운동의 주요 구호) 방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중동, 북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 유럽의 긴축반대 총파업, 남미의 무상교육 동맹휴업,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신생 노동자운동을 보라. 세계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무덤으로!” 보내는 투쟁에 본능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 투쟁들에는 현장투쟁과 파업이 반드시 동반된다.

희망은 노동자의 손으로!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 언제 자본가들이 우리의 아픈 몸이라도 제대로 고쳐준 적이 있었던가? 일하다 다쳐도 말도 못하고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에 떨며 살아온 우리다. 이 지긋지긋한 체제를 고쳐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고쳐봐야 자본가 세상, 노동자가 착취, 억압 당하고 무시당하는 세상이다.
   더이상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미래를 맡기지 말자.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직접 만들자. 희망버스 운동, FTA 반대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그 희망을 시작하자.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내걸고, 현장에서 투쟁을, 파업을 조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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