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질투, 여자, 본다는 것...

2011/07/27 00:07

나는 여름감기로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 며칠동안 사무실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과장이 여름휴가를 간 덕분에 나의 나태함이 되살아 났다.
그러나 밀려있는 사건 때문에 마음의 조급함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나의 업무가 지루하고 형편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행정심판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일이다.
연민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인정사실'과 '판단'을 쓰지 못하고 사건은 뒤죽박죽 된다.
무미건조함과 냉정함이 같은 뜻일까.
아직 나는 나의 일에 보람이나 긍지 따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어제 밤에 나는 동료들과 잔득 술을 먹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친구에게 전화해서 한참을 울었다.
나의 삶이 부끄럽다고 말한 것 같다. 나의 모습에 내가 서러웠나 보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지각을 면하기 위해 급하게 걸아가다가 안경이 뿌옇게 흐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제 흘린 눈물의 흔적이었다.

 

요즘 하루키의 소설을 대충 마무리하고 후배의 추천으로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있다.


닭고기와 여자

-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김연수, 2003,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51쪽)

 

남자의 질투(...이거 생각보다 무섭다.)

광수의 얼굴이 금방 확 달아올랐다. 원래 술이 약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토마토보다도 더 시뻘개진 그 얼굴을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건 아름다운 여자를 자신만이 소유했다고 믿는 모든 남자들이 두툼한 지갑과 함께 늘 지니고 다녀야만 하는 감정인, 질투심 때문이었다.
(김연수, 2003,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74쪽)

 

질투란 숙주가 필요한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질투란 독립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랑에 딸린 감정이다. 주전선수가 아니라 후보선수라 사랑이 갈 때까지 숨을 헐떡거리면 질투가 교체선수로 투입된다. 질투가 없다면 경기는 거기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13세기 사람 앙드레 르 샤플랭은 "질투하지 않는 자는 사랑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했다. 자신들의 사랑을 충분히 확인한 사람들 중에는 급기야 질투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욕망을 느끼는 부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을 만나서 질투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를 위해서는 시기심이라는 단어가 준비돼 있다. 그런 점에서 어휘력이 부족하면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곤란이 따른다.
(김연수, 2003,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103-104쪽)

 

쓰여지지 않는 책

얼마 전에 녹음한 책에 보니까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한 명 죽을 때마다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썼습디다.
 (김연수, 2009, ' 달로 간 코미디언',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68쪽)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내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내가 마치 거기에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주 앉아 있어도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한법은 몹시 추운 겨울날 목도리를 두르고 밖에 나간 적이 있어요. 내가 지팡이을 두들기고 지나가니까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어대던지. 그때 어떤 아줌마가 나한테 '어차피 앞도 안 보이는데 그냥 목도리로 얼굴을 다 감아버리지, 왜 목만 가리느냐'고 묻습디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나는 앞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말은 어차피 남들이 나를 볼 수 없으니까, 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내 존재 자체가 사려져요. 시각장애의 핵심은 내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보여져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연수, 2009, ' 달로 간 코미디언',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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