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늬, 사랑과 존재

2020/05/07 23:38

삶의 무늬, 사랑과 존재

 

 

1.
나의 '삶의 무늬'를 생각했다. 기쁨과 슬픔이 엉켜있고 많은 회한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순간은 더없는 부끄러움이 굳은살처럼 박혀있다.

나는 시류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과 경제적 조건 그리고 주로 만나는 사람들의 말과 자주 읽는 글에 따라 행동한 사람. 나는 참 소심했다. 어떤 때는 당돌하고 무모했다.

이런 내 반성의 밑바탕에는 '어떤 것'에 끌려다니거나 기대는 삶의 역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것'에 의지하는 삶. 이 생각의 마지막에는 가서는 '종속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사람, 이념, 제도, 질서 따위에 기대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삶!


2. 
그런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3.
의열단은 1919년에 만주 지린(吉林)에서 조직된 반일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일정한 소재지가 없이 일본의 요인과 그 주구를 암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고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고 한다. 항상 그들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백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또한 그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였으며, 그들의 생활은 '명료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의열단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의 사랑은 강렬했다. '모든 조선 아가씨들은 의열단원을 동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고, 그들이 사는 곳에서 볼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아가씨들은 러시아인과 조선인의 혼혈이었는데 매우 아름답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이 아가씨들과의 연애는 짧으면서도 열렬했다.'

의열단원들은 스스로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다. 의열단원인 김산은 '육체는 빵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살찐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지식인은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된다'(1)고 설명했다.

 

3-1.
그들은 그렇게 강렬한 삶의 무늬를 그리면서, 인간의 삶을 지도하는 삶과 추종하는 삶으로 구분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이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지도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따라갈 것이다. 추종하는 자들에게는 단 하나의 길밖에 없다. 지도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추종하는 자는 자유롭지만 지도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추종하는 자는 책임없이 행동할 수 있지만 지도하는 자는 역사적 결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중략)...추종자였을 때가 더 행복하기는 했다...(중략)...나 또한 죽을 때까지 창조적 역활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2)

추종하는 삶의 안락함보다 죽을 때까지 창조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결국 행복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김산은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인간 정신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고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며,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믿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이라고 말했다.(3)

 

4.
행복한 죽음.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의 죽음은 어떤 것일까. 스피노자는,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네, 물방울이 바다에 떨어지기를 두려워하던가?'(4)라고 말했다.

 

5.
사실 이런 현실의 굴레를 끊으면서 삶의 무늬를 그리는 사람은 여성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여성'이라는 종속적인 사회적인 존재 조건 때문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해야 했다. 어쩌면 그녀들의 그 자유로운 삶의 처음과 끝은 '사랑'이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6, 윌리엄 올드로이스 감독)를 보면, 17살에 돈 몇 푼에 팔려 결혼한 여성이 모든 금기를 깨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휘두르거나 개입한 남성들-시아버지와 남편, 애인을 살해하고, 넓고 높으며 고요한 저택의 한가운데 앉아서 세상의 정면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했다.

 

5-1.
그녀들은 인류가 겪은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이념, 제도 그리고 국가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삶과 사랑을 선택하기도 한다. 전쟁에 참여한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따르면, 아수라장인 전쟁통에서 그녀들은 '단지 전쟁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젊음과 첫사랑'(5)을 시작하거나 만끽하였다. 그녀들은 본래 지니고 있는 인간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그녀들은 일상의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영화 '스윗 프랑세즈' (2014, 솔 디브 감독)를 보면, 적군인 독일군 장교를 사랑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두 번 만난 남자랑 결혼해 놓고, 그게 사랑이었다고 스스로를 속여 왔어요. 내 마음이 죽어 있었던 거죠"

 

6.
만나는 사람, 이념, 제도, 질서 이런 것들은 사실 시대에 따른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어떤 것'들이다. 우리들의 삶이, 이런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어떤 것'들에 따라 '줄에 묶인 개처럼 시대의 사슬에 매여 있으면'(6) 서글프지 않을까.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 존재는 '자신의 한계 내에서 자신의 고유함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문제'(아리스토텔레스)를 안고 있다.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2006, 톰 티크베어 감독) 주인공 그르누이는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악취가 나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냄새를 맡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최고의 향수를 만든다.  그의 삶은 결국 '자기 존재'의 문제였다.

'내 존재를 견딜 만한 삶,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마리나 츠베타예바)고 하더라도, '존재의 가장 깊속한 곳이 아니라면 천국은 없다.'(7)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본래 자신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는 것.

 

 

(1) 님 웨일즈, 김산, 2013, [(조선인 혁명가의 불꽃같은 삶) 아리랑], 동녁, 165~166쪽
(2) 같은 책, 404쪽
(3) 같은 책, 464쪽, 467~468쪽, 471~472쪽
(4) 스피노자, 야론 베이커스 Jaron Beekes, [스피노자 : 그래픽평전), 2014, 푸른지식, 142~145쪽
(5) 스베나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옮김, 2015,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34쪽
(6) "우리의 기억은 결코 이상적인 도구가 아니다. 기억은 제멋대로 인데다 변덕스럽다. 게다가 기억은 줄에 묶인 개처럼 시간이라는 사슬에 매여 있다."(스베나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33쪽)

(7) 에밀 시오랑, 김정숙 옮김, 2022, [역사와 유토피아], 챕터하우스, 210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nomad22/trackback/354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