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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박노해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박노해

  

  

일주일 단식 끝에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몰골로

파란 수의에

검정고무신을 끌고

어질 어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잡범들 사이에서

 

"박노해씨 힘내십시오"

어느 도적놈인진 조직폭력배인지

민들레꽃 한 송이 묶인 내 손에 살짝 쥐어주며

환한 꽃인사로 스쳐갑니다

 

철커덩, 어둑한 감치방에 넣어져

노란 민들레꽃을 코에도 볼에도 대어보고

눈에도 입에도 맞춰보며 흠흠

포근한 새봄을 애무합니다

민들레꽃 한 송이로 번져오는

생명의 향기에 취하여

아 산다는 것은 정녕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다가 문득

내가 무엇이길래......

긴장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하며

민들레 꽃을 바라봅니다

어디선가 묶은 손으로 이 꽃을 꺾어

정성껏 품에 안고 와 내 손에까지 몰래 쥐어준

그분의 애정과 속뜻을

정신차려 내 삶에 새깁니다

 

민들레처럼 살아야 합니다

차라리 발길에 짓밟힐지언정

노리개꽃으로는 살지 맙시다

흰 백합 진한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흔하고 너른 풀잎속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우리 들꽃의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순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머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밟히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 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 피울 수 없는 거칠은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성의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 중에 수천 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고문으로 멍들은 상처투성이 가슴 위에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 받아 들고

글썽이는 눈물로 결의합니다

아 아 동지들, 형제들

준엄한 고난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그렇게 저는 다시 설 것입니다

 

  

 

 

 이 시는 대학교 때 접했지만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긴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ㅡㅡ;

다만 이 시는 개인적으로 민들레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이미지를 그린 시라서 기억한다.

 

꽃과 있을 때 화려해보여서 아름다운 꽃,

어떤 상황에서 돋보이는 꽃보다는

들판과 잘 어울리고, 풀과 잘 어우러지는 꽃들이 좋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민들레가 돋보이는 순간은

도심 한 뻠 흙에서, 집 앞 골목길에서 만났을 때 뿐이다.

어떨 땐 시멘트에서 피어난 것도 같다.

맨 흙 위에서나 시멘트 위에서는 돋보이지만

들판과 풀과 가장 잘 어울리는 꽃.

 

2007년에 '민들레처럼'이란 노래를 처음 들었다.

야학교사MT에서 술자리가 다 끝나고 사람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술에 취한 한 친구가 방 한 가운데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고 있거나 분주하게 술자리를 치우고 있었다.

그 친구는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두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서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처음 듣는 노래인 것은 분명한데 왠지 익숙한 가사.

이내 7~8년 전 스쳐지나쳤던 시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노래를 들으면서 시를 읽었을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지만 시에 담겨진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그렇게 살고 싶은 놈인가보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시인도 그 마음으로 이 시를 썼겠구나, 더 절절했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삶과 참 멀게 느껴져 부끄러웠다.

나에게 그 시는 하나의 이미지였구나 삶이 아니라.

그러니 느낌도 감흥도 없고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고...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했던 시, 아니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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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가기 전에 읽을 책!

오도엽님의 [이소선의 마지막 인사/ 오도엽] 에 관련된 글.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저, 후마니타스, 2008.12.

"전태일평전"(신판), 조영래 저, 아름다운전태일, 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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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사람연대 2009 사랑의 김장나누기

 

지난 해에 이어 올 해도 작은자 식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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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김남주 '나의 칼 나의 피'

나의 칼 나의 피

 

                                                                    김남주

 

 

만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그대 살찐 가슴 위에 언덕 위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 위에 나는 심는다

평등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키우랴

바람이 와서 키워주랴

누가 지키랴, 왕이 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들이 만들어놓은 법이

법관이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 위에 사는 농부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너머 평지길 황토길 위에

사래 긴 밭 이랑 위에

가르마 같은 논둑길 위에 나는 놓는다

나는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 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 위에

모래 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투석기의 돌 옛 무기 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 위에 심장 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평등이여 평등의 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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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창> 르포문학교실 6강 / 다큐멘터리, 시대의 현장에 서다(김미례)

삶창> 르포문학교실 6강 / 다큐멘터리, 시대의 현장에 서다(김미례)

 

김미례 감독이 '다큐멘터리, 시대의 현장에 서다'는 주제로

2시간 30분 정도 강의를 했다.

15분 가량 늦어 김미례 감독이 자기소개를 거의 마칠 때 쯤 들어갔다.

이어서 강사는 수강생들도 자신을 소개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강생 몇 명이 자기 소개를 하고,

그들의 말에 덧붙여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편하고 느슨하게 강의가 몇 십분 진행되었다.

자연스럽게 진행된 강의였지만 왜인지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십 분간의 휴식.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조금씩 끊어서 감상했다.

질문 몇 가지가 머리 속에 남아 적어놓는다.

강사가 던진 것도 있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도 있고 그렇다.

강사도 수강생들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지금 던져진 질문인지라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천천히 숙성시켜나가야 하는 문제들이라 생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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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르포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걸까

 

좋은 다큐멘터리의 요건은

 

윤리의식이라...

 

르포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혹은 접하고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앎을 통해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찍고자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

.

.

작년 13회 인천인권영화제에서 '빛나는 삶'이라는 다큐를 보았다. 

부당한 정리 해고에 맞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작년에 이 작품을 볼 때, 투쟁이 500일이 넘었다고 했다.

지금은 2009년 11월. 투쟁이 1000일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투쟁. 

위장 폐업을 하고 노동자를 부당 해고한 이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진 사이,

부당 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은 2년 반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일터에서 내몰린 노동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기타 제조 회사인 콜트악기의 숨겨진 진실과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해외로 원정을 가고,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http://cortaction.tistory.com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4956

 

인천인권영화제를 찾은 그들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수줍어하던 한 노동자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강하고 억척스럽기보다는 따뜻하고 여린 어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평생 일했던 일터에서 쫓겨나고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사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일년이 지난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다. 

분신했던 동료의 이름을 입 밖에 낼 때,

조금 더 심하게 떨렸던 목소리와

그분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던 이름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아직 잘 모르겠고,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습을 담아내는 것,

그래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잘 들리게,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잘 드러나게 하는 데 동참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살아있는 목소리, 생생한 증언을

듣고 기록하고 또 들을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작은 목소리가 모여 함성이 되고 작은 목소리가 이어져 역사가 된다.

작고 수줍던 그분의 목소리가 일년 동안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작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건,

분명 잘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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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의 '귀천', 가슴 속에 자리잡은 슬픔 꺼내놓기

천상병의 '귀천',

가슴 속에 자리잡은 슬픔 꺼내놓기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번 학기 야학 수업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월요일에 야학에 못 간지 꽤 되었다. 월요일에 나오는 교사들과는 왠지 멀어진 느낌이 든다. 월요일 교사 한 명이 일이 있다며 수업을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월요일에 야학에 가지 않아 사람들 얼굴도 볼겸 선뜻 응했다. 부탁받은 수업은 물푸레나무반 2,3교시 국어수업. 수요일에 보조교사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물푸레나무반에서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교재에 있는 시, 두 편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감상했다. 교재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긍정하는 내용의 시라고 소개하고, 간략하게 '시를 읽고 난 후의 느낌'과 '하늘로 돌아갔을 때 소개하고 싶은 세상'에 대해 묻는 문제가 나온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에게 이 시는 아름다운 시가 아닌 가슴 아픈 시로 다가온 듯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가족, 친척, 지인들을 떠올렸다. '죽음'을 '하늘로 돌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 슬픔은  마음 속에서 깊고 크게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하늘로 돌려보내는 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학생 중 한 분이 살짝 눈물을 보였다. 지인의 죽음을 떠올리면 이내 그 때 감정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익숙해질 수 없는 슬픔. 

야학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눈물바다가 된다. 고향, 어머니, 자식...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낱말이 유독 그분들 마음 안에서는 슬픔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슬픔을 꺼내서 이야기하다보면 서로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고 의지하게도 되지만, 일단 그 슬픔을 꺼내놓는 일 자체가 너무도 힘들다. 그 당시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아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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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iece of Peace Festival

 

2009년에도 어김없이 'Rogpa'에서는 여러 행사를 치렀다. 'Rogpa'는 인도 다람살라에 위치한 비정부 단체로, 티베트 난민의 경제적, 문화적 자립을 지원한다. 2005년, 저소득층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록빠 무료 탁아소를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빼마(한국이름 남현주)와 제임스 부부를 중심으로 몇 사람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여러 '록빠'의 성원에 힘입어 5년째 꾸준히 한 길을 가고 있다. 'Rogpa'는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친구' 또는 '돕는 이'라는 뜻의 티베트 말이다.

 

올해는 부산에서 평화 티벳 팽창전, 따시델렉 일일찻집,  평화 티벳 캠프 등의 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11월 1일, 홍대 앞에서 'A Piece of Peace 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문화행사를 개최하였다. 무용, 마임, 퍼포먼스, 음악 등의 공연과 다큐멘터리 상영, 사진과 어린이 작품 전시회, 평화장터, 일일찻집 등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행사였다. 행사의 수익금은 티베트 어린이 평화 도서관 운영에 사용될 예정이다.

 

록빠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면, 현지에서는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를 지원하는 무료 탁아소와 티베트 여성의 자립을 지원하는 여성 수공예 작업장을 운영한다.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 난민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들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자원활동가, 탁아소 학부모, 지역 주민이 힘을 합쳐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한다. 2006년부터 시작한 피스 티벳 페스티벌 다람살라에서 지역문화축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제는  티베트인들이 중심이 되어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티베트 난민의 현실을 알리고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행사를 기획한다. 인디밴드의 공연과 티베트 관련 영상을 상영하는 세이브 티벳 페스티벌, 한국의 청소년과 대학생이 평화에 대해 고민하고 평화를 위한 움직임에 동참하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피스 티베트 캠프, 후원인,자원활동가, 그외 여러 록빠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따시델렉 일일찻집, 평화의 기운이 확장되기를 바라는 전시회와 상영회 중심의 피스 티벳 팽창전, 현지에서 생산한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프리마켓 등의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11월 1일, 오후 2시에 행사장을 찾았다. 스텝을 제외하면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다. 행사를 진행하는 스탭은 주로 청소년들이다. 록빠 청소년 미디어 프로젝트 참여했던 아이들이거나 즉석 사진관과 평화 버튼 제작에 참여하는 하자 작업장의 아이들인 것 같다. '희망을 파는 아이들'이라는 희망나눔 프로젝트에 참여헀던 정배초등학교 어린이들도 보인다. 평화 장터와 벼룩시장 코너에는 현지에서 생산한 수공예품, 여러 곳에서 기부받은 물건들과 정배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손수 만든 이면지 노트가 판매되고 있다. 일일찻집에서는 공정무역커피와 티벳탄 허브 티 등의 먹거리를 판다. 사전에 구매한 티켓으로 차 한잔을 마신다. 탁아소 아기 사진의 엽서는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준다. 2000원을 추가로 지불하면 기념 머그컵을 살 수 있다. 컵에 그려진 나무문양이 평화의 기운이 자라는 느낌이 들어 컵을 받아든다.

  

입구에는 티베트를 배경으로 한 ,록빠 탁아소 아이들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인도에서 태어난 티베트 아이들이 티베트의 땅을 밟아 볼 날이 언제나 올런지... 한 여행자가 티베트를 여행하는 길에 탁아소 아이들의 사진을 가지고 가, 그곳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어색하게 합성을 한 것도 같고 오려 붙인 것도 같다. 티베트의 아이들이 티베트에서 자랄 수 있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사진 속 아기들의 웃음은 해맑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층에는 또 다른 여행자가 티베트 아이들과 함께 한 소중한 기억이 정리되어 있다. 그들과 찍은 사진, 여행기... 또박또박 적힌 그의 글씨와 손때 묻은 물건들은 작가의 정성 때문인지 글과 사진을 더 생생하게 살아있게 한다. 티베트 아이들이 직접 찍은 사진에는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엿보인다. 이 역시 티베트의 현실과는 너무도 달라 마음을 아프게 한다. 록빠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중고 디지털 카메라를 다람살라에 보내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좁은 길에 상가와 노점이 즐비해있고 문화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다람살라, 여행자를 통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계를 상상하며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며 성장하는 아이들, 그들 눈으로 보는 세상을 손수 카메라에 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티베트 어린이들이 찍은 사진은 놀랍도록 밝고, 아름답고, 또 자유롭다. 그것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올라온다.

 

이층 한 켠에는 티베트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과 정배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만든 앞치마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희망을 나누고 평화를 지키는 일이 어른들의 일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바라게 된다.

 

4시부터 공연이 시작된다. 록빠 청소년 미디어 프로젝트 참여한 청소년들이 제작한 영상과 여러 공연이 무대에 올려진다. 온앤오프 무용단의몽환”(무용), 이정훈의거미”(마임), Et Aussi Dance(에오시 무용단) “QUATRO”(무용), 사토 유키에의 노래와 연주, 김진수의 "솔문"(퍼포먼스), 강성국의 퍼포먼스, 카락뺀빠의 노래와 연주, 이한주의 노래와 연주...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다채로운 공연은 애시당초 불가능했으리라. 처음 접하는 장르도 있고 낯설기도 하지만 다양성, 자유로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언젠가 제임스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색 가운데 하나의 색이 사라지는 것, 그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우리는 그 색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거라고, 어떻게 슬프지 않냐고... 그때는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지금 떠올려보니, 오랜 시간 지켜온 전통, 문화, 삶 그 모든 것들이 폭력에 의해서 짓밟히고 사라지는 일, 가슴 아프다. 슬픔은 천천히 전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http://www.rogp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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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동행하면서 알게 된 ‘불편함’

그녀가 강좌 수강을 포기한 이유

 

장애인과 동행하면서 알게 된 ‘불편함’

 

*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썼던 글입니다.

 

장애인과 동행을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사회에서 겪게 된 ‘불편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다

 

야학교사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곳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기 마련이고, 그러니 야학이라는 공간에 한데 섞여있는 게 대수랴 싶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할애하거나 노력을 해서 극복할 수 없는 ‘불편함’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야학에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친구를 한 명 사귀었다. 나보다 다섯 살 많고, 취향도, 취미도, 뭐 하나 비슷한 것이 없다. 그녀는 야학에서 검정고시로 초.중.고등학력을 취득한 후, 방송대 영문과에 진학해 학업을 마쳤다. 지금은 야학에서 교사로 5년째 활동하고 있다. 나보다 3년 먼저 교사활동을 시작한 선배인 셈이다.
 
언니와 친해지면서, 이동할 때 시간이 조금 더 걸리거나 간혹 내가 활동보조를 하는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같이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고, 같이 다니는 일들이 많아지자,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개인의 인격이나 성품과는 크게 상관없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과 동행하는 일의 ‘불편함’이 도를 넘는 데서 오는 문제였다.
 
집밖을 나오는 순간부터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우리는 거리에서 서로 지쳐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억지로 밝은 척 웃는 일이 많아졌다. 언니와 1~2년 함께 다니면서 장애인이 집밖으로 나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지하철 전 역에 승강기 설치, 장애인콜택시 늘려야
 
10월, 우리는 한 단체에서 주관하는 글쓰기강좌를 신청했다. 1호선 대방 역에 있는 서울여성플라자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두 시간 가량 8주간 진행되는 강좌다.
 
서울여성플라자는 장애인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건물이지만, 문제는 대방 역에서 그 건물까지 이동하는 일이었다.
 
승강장에서 개찰구까지 리프트로: 대방 역은 현재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승강장에서 개찰구까지 리프트를 이용해 이동해야 했다. 리프트를 올리고 내리고 10~15분이 소요된다. 이 리프트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6출구로 나와 차량 이용해 길 건너기: 서울여성플라자는 대방 역 3번 출구에서 3분여 거리지만, 3번 출구는 승강기 설치공사 중이고, 계단으로 연결된 좁은 지하보도엔 리프트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이 출구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경사로가 있는 6번 출구로 나가서, 3번 출구 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즉, 길 건너편으로 나가서 길을 건너야 하는데,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 길을 건너갈 방법은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장애인 이동을 위해 무료 차량서비스가 제공된다는 점이다. 퇴근시간이라 길이 막혀서 20여분이 소요됐다.
 
도보 5분거리, 1시간15분 걸려 도착: 강좌를 듣는 우리 일행 셋 중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두 명이 있었다. 일행이 모두 길을 건너 서울여성플라자 앞에 도착한 시간은 장애인 한 사람 이동시간의 두 배다. 대방 역에 도착한 시간은 6시인데,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은 7시 15분이었다. 비장애인이 3~5분이면 오는 거리가 장애인 한 명이 올 경우 30~35분, 두 명일 경우는 60~70분 이상 걸리는 것이다.
 
차량서비스는 7시까지만, 7시 이후는? 그나마도 차량이용서비스는 7시까지만 제공된다고 했다. 대방 역 측과 이동에 관해 문의할 때, 차량이용시간에 대한 안내는 받지 못했다. 7시 이후에 전동휠체어 이용 장애인은 대방 역 3번 출구로 이동하기 위해 이동식 리프트를 이용해야 한다.
 
이동식 리프트는 사람이 수동으로 조종하는 리프트인데 중간중간 계단이 끊기고 평지가 나올 때마다 휠체어가 45° 각도로 허공에 뜨고 그때마다 앞바퀴가 8cm가량 들린다. 시간은 수직형 리프트보다 더 오래 걸리고, 안전은 뭐라 말할 수준도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안전하지 않다’ 수준이 아니라 ‘위험하다.’
 
장애인콜택시 대기시간 ‘기본 2시간’: 목적지로 가는 차 안에서, 강좌가 끝난 후 집에 어떻게 가야 할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동할 수 있는 경로가 없어,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해 용산 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기 위해선 기본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8시35분 경 예약을 했다. 이동경로를 알아보느라 예약 자체가 늦어졌기 때문에, 강좌가 끝나고 한 시간 정도 길에서 기다리는 것은 감수하기로 했다.
 
9시 반이 못되어서 강좌가 끝나고, 우리는 한 시간 정도 거리에서 기다렸다. 늦은 시간이라 이용자가 많지 않겠다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보았다. 늦은 시간에는 장애인콜택시 운행대수도 줄어든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장애인콜택시 이용 대기시간은 어느 시간대나 2시간 이상으로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10시 24분 지나는 시간, 앞으로 3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하고, 대기자가 10명 있어 30분 후에도 이용할 수 있는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밤10시30분 대방역 3출구로 이동: 인천행 1호선 전철과 인천지하철 막차 시간을 고려하면 서울에서 발이 묶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는 행사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무리를 해서라도 계단이 있는 대방 역 3번 출구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언니는 업히고, 언니의 전동휠체어는 행인과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들고 내려왔다. 전동휠체어를 들려면 장정 5명은 있어야 한다.
 
또 다른 한 명은 전동휠체어에서 내려올 수 없는 형편이어서, 위험하지만 전동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이동식리프트를 이용했다. 45° 경사로 허공에 들리고 앞바퀴가 8cm가량 띄는 상황을 여러 차례 반복, 이동하는 내내 위험천만한 순간이 속출해 그때마다 간을 졸였다.
 
안전을 담보로 한 대방역 승강장 행: 전동휠체어를 사람들이 직접 들고, 이동식리프트를 이용하고, 비장애인이 3분이면 이동할 거리를 관계자 3명, 행인 1명, 공인근무요원 3명, 나까지 몇 명이 전전긍긍하여 무려 50여분이 넘게 걸려 겨우 승강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안전을 담보로 해서 말이다. 진이 다 빠졌다. 전철 문이 닫히는 시간을 지연시키며, 사람이 가득 찬 전철을 타는 일쯤은 아주 쉬운 일에 속했다.
 
이날 우리는 막차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귀가했다. 과연 ‘무사히’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좌우간 우리 셋은 모두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2주차에는 언니가 아파 강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 명은 강좌 수강을 포기했다. 강좌도 좋았고, 내심 기대도 많았던 터였다. 행사 주최 측 관계자 분들도 성심 성의껏 지원해주었다. 수강포기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잘못도 아니고, 개인이나 단체 차원에서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해결방법은 명확하다. 장애인콜택시의 대기시간이 ‘2시간은 기본’이라는 인식과 제도를 개선하는 일, 모든 역에 승강기를 설치하고, 최소한의 이동 가능한 시설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 없이 이동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확충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013&section=sc5&section2=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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