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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0/28
    루쉰과 추억
    유마
  2. 2008/10/20
    니체의 시선
    유마
  3. 2008/10/05
    루쉰-생생하게 보는 자.(2)
    유마
  4. 2008/09/08
    니체와 우정론1
    유마
  5. 2008/07/06
    반시대적이라는 것.
    유마
  6. 2008/07/02
    사카이 다카시, [폭력의 철학] 에 대해
    유마
  7. 2008/06/18
    탈매체화?
    유마
  8. 2008/06/16
    이 영화를 보라(1)
    유마
  9. 2008/06/16
    공간의 범람
    유마

루쉰과 추억

 

 

������朝花夕拾������에서는 루쉰을 오랫동안 감싸고 있던 적막감이 잘 들어나지 않는다. ������납함������에서 루쉰이 보였던 추억에 대한 태도를 생각한다면 의외다. 그 시절 그에게 추억은 ‘마음속의 실 한 가닥으로 쓸쓸하게 시간을 매어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화석습������에서 루쉰의 ‘추억’ 혹은 ‘기억’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물론 ������조화석습������ 역시 기억이나 추억의 허망함에서 시작한다. “나는 전에, 마름시, 누에콩, 줄의 새싹, 참외 등등 어렸을 때 고향에서 먹었던 채소류가 줄곧 생각나서, 그게 얼마나 맛있었던지 입맛을 다실 정도로 심한 망향의 정서에 사로잡힌 일도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정작 그것을 먹어 보니 별게 아니었다. 단지 기억 속에서는 지금도 옛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추억의 허망함.  우리에게 추억의 허망하다는 말은 진부하게 된지 오래다.  그러나 동시에 ‘추억이 허망하다’는 말 또한 허망하게 생각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허망하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래 추억은 허망한 거야. 기억․추억이란 우리가 만들어낸 가공에 지나지 않지’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 문제가 남는다. 즉 허망하다는 말과 내가 실감하는 것 사이에 너무나 큰 구멍이 존재한다. 허망하지. 그런데 ‘허망하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많은 경우 기억이 허망하다는 것은 관용구에 가깝다. 여전히 우리는 기억과 추억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허망함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에 대해 어떤 지적, 예술적 노력을 쏟으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 루쉰은 추억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허망한 말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듯하다. 물론 그에게 역시 추억은 허망하다. 본래적인 기억, 변하지 않는 기억, 단단하게 굳어진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그러나 어릴 적 기억 속으로 깊게 잠수해 들어가, 더 이상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자신의 추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조화석습」은 루쉰의 과거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루쉰이 과거나 추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허망한 과거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


루쉰은 과거나 추억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즉 추억은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것이 치유되지 않은 채로 억눌려 있다가 특별한 계기에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 그대로 과거는 과거다. 가령 「개․고양이․쥐」에서 루쉰의 고양이에 대한 증오는 얼릴 적 상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루쉰의 일상을 좀 먹기 때문이다. 그가 고양이를 미워하는 것은 ‘正人君子’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이들을 증오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이다. 이것은 이들의 타자에 대한 태도라든가, 권력 지향적 욕망이 작용하는 현재적 증오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혹은 추억의 시간은 종종 삶에 던져진 그물로써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런 ‘거슬러 올라간 생각(追憶)’의 무게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루쉰은 관찰을 통해서 문제를 벗어난다. 24효도에서 어린 루쉰은 과거의 것을 일단 그대로 받아들인다. ‘효’ ‘정절’과 같은 말의 무게 속에 갇히는 대신, 그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지금도 잊지 못하거니와 부모 앞에 누워 있는 노인과 어미니 팔에 안겨 있는 아이(곽거가 아이를 묻다),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이상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추억 혹은 과거에 붙들리는 것은 개인의 정신적이고 육체적 무기력함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무기력함은 관찰력 부족에 유래한다. 실재의 삶이 이루어지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무감각, 생각 없음이 일종의 재앙으로 작동한다. 즉 추억과 같은 시간의 무게를 벗어나는 것은 일상 혹은 익숙한 것에 대한 거리두기와 관찰을 통해서이다. 사람들이 추억이나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무지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사람들 속에서 특정한 의지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를 미래로 미루며, 보이지 않는 심판자에게 삶을 의탁한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도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다. 루쉰은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해 ‘아 구제할 길 없구나’하고 탄식한 바 있다. 기억이나 추억의 굴레에 갇혀 있는 한, 현재의 삶, 지금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쉰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면 잘못 이해되고 있으며 심지어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삶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추억도 이러한 세심한 관찰의 대상이다. 즉 현재의 상태를 상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상대화해야한다. 루쉰은 자신의 추억․기억을 관찰하고 분해하며 재조합한다. 이런 점에서 ������조화석습������은 루쉰이 자신에 대해 행한 계보학의 결과물이다. 계보학이 그 기원을 드러내면서 ’말‘의 굴레에서 벗어난 삶의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재조합된 추억은 삶을 위한 무기로 전환되고 있다. 이것이 후지노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정인군자’들이 싫어하고 미워할 문장을 다시 쓰게 하는 전환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조화석습������에서 기억․추억되는 대상은 그렇게 비애에 차 있지 않다. 오히려 추억은 살아가는 데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말하자면 루쉰은 추억을 허망한 비애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삶을 위한 힘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에게 추억은 삶을 위한 활용되어야 할 기술을 배우고 연마하는 장이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 것, 이 시간의 활용술이 ‘기괴함’과 ‘공막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루쉰의 ‘시간-전투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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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시선

[아침놀] 1부를 읽었다.

니체는 이 책과 만나는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그가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없이 전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아침, 구원, 아침놀도.

 

니체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

우리에게 당위로써 명령되는 것들의 지층 속으로 들어가

지층의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방식으로 쌓여가는지를 세심하게 파헤친다. 

그는 이것을 위해 세심하게 말들의 가치를 분류하고 그 의미를 파고들어간다,

그것은 신중한 작업이다. 그 말들은 천천히 읽혀지고, 천천히, 세심하게 해체된다.

당연히 강한 인내심은 필수적이다.

지층을 탐사하고 그것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뚝심과 예리한 안목, 섬세한 손을 가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여 우리의 충혈된 눈은 아침놀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침놀] 의 니체는 '지하생활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설사 지층들을 탐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놀라웠던 것은 니체가 탐사과정에서 서 있는 위치였다.

그는 때로는 자연의 시선에서, 때로는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들이 만들어온 지층들을 바라다 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상대화해서 바라다보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특권적 존재이며,

당연히 그들이 지구라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산물이다.

그러나 "어떤 작은 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작은 종인 인류에게

하나의 예외가 허용되어야 하는가!"

벌레가 자연의 일부이듯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다.

이 최후의 인간들 속으로, 이 먼지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또아리 트고 있는 세계를 해체해야 한다.

 

인간들은 수 많은 것들이 마치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마 인간들이 사물에 부여해 왔던 그 의미들을 해부하게 된다면

그것이 한낯 인간들의 자기 망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이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속에 우리 자신이 모습이 들어가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모습을 때로는 멀리 때로는 아주 가깝게

바라다보고 있다.

 

만약 니체의 언어에 '선명한' 언어 혹은 과학의 언어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다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말의 연계고리를  깨트리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또한 지층으로 잠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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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생생하게 보는 자.

친구들과 함께 읽고 있는 루쉰의 글.

우리의 주제는 루쉰의 미소와 루쉰의 검이다.
그것은 루쉰과  함께 웃고,  함께 검을 벼리고 겨루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은 그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검을 벼리는지를 알기 위한 무수한 통로의 하나다. 그렇데 막상 우리는 통로를 발견하기 보다는 글 속의 환상 혹은 미로 속에 빠져들고 만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 환상과 미로를 만들어내는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통로'를 찾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간단하다(말하긴 쉽다^^).  먼저 잘 보면 된다!! 그런데 잘 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무수한 망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령 우리는 루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우리는 그를 '위대하고 탁월하며 창작력이 풍부한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물론 루쉰의 글은 강렬하다. 그러나 루쉰을 그렇게 '위대한 정신'으로 숭배하는 건 나 자신의 특별한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예술가, 천재에 대한 망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분명 위대한 지성이 끼치는 영향이 가장 기분 좋게 느껴져서 자신이 질투를 느끼지 않을 만한 곳에서만 천재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누군가를 '신과 같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우리가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 완전한 것은 경탄의 대상이며, 생성 중인 모든 것은 경시된다."

'위대한' 루쉰이라는 표상은 우리가 더 이상 그와 경쟁하지 않겠다는 것, 그와 칼을 벼리고 겨루는 친구가 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쉰의 활동이나 글만이 뭔가 '특별한'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놀랄 만큼 복잡하고 생생한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것도 기적이 아니라 '生生'한 것이다.

루쉰 역시 삶의 주춧돌을 놓고, 그 다음에 무엇인가를 세우는 것을 배웠을 것이며 부단히 소재를 구하고, 이리저리 만들어 보는 일을 했을 터이다. 즉 그 역시 자신을 둘러싼 조건들을 '선명'하고 '가감' 없이 보고자 하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 '생성하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

이런 글쓰기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쉽게 간과된다. 가령 예리하고 명확한 글을 우리는 너무 평범하다고 간주해 그것을 이해하려고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생사의 경계, 복수-포옹의 경계, 얼음과 불꽃의 경계, 원수와 친구, 산 자와 죽은 자 등 충돌하는 양상들은  접근 못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을밤>이나 <아름다운 사연>과 같이 부분은 매우 난감했다.  뭐지 이건. 가까이 있지만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 시각의 사각지대 같은 부분.

이에 대해 곰숙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을 다루는 부분. 이 부분은 루쉰이 바란 본 세계가 아닐까. 인간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천지인의 세계. 하늘과 인간은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즉 천지와 인간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존재 안에 그런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루쉰이 그것을 포착해 드러낸 것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그가 실감하고 있는 시공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수사나 표상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세계가 아니라, 그 표상들을 걷어내는 순간, 보게 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용돌이를 본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일까. 루쉰은 인간의 사멸이나 부후에 대해서 허황함 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폐허 위에 또 폐허를 어떻게 쌓아가는지를. 우리에게 한 조각 '고철'에 불과한 것을 그는 숨겨진 보고의 열쇠로 만들어내고 있다.

다시 한 번더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위대한 루쉰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루쉰이 훌륭해지 것은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과정은 어떤 것인가? 사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나?

그의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언어나 표상으로 눈코입을 가로막는 대신, 눈으로 '그대로 보고' 코로 생생하게 냄새 맡고, 입으로 가감 없이 드러냈을 뿐이다.그것은 그가 우리가 범접하지 못할 재능과 능력을 타고난 것 때문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위대한 루쉰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실함'과 집요함 속에서 언어의 표상과 그물을 비켜나가는 루쉰만이 존재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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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우정론1

 

니체의 우정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니체.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떠나보내려고 작심한 듯,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와 배치들을 물어뜯는다.

‘모든 것’을 향해 달려가고 그 모든 것들을 몰락시키고자 한다.

형이상학, 도덕, 종교, 예술, 문화, 국가에 등등.

이 시기의 니체는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힘들과 맞서 싸우는 듯하다.


교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교제, 그 쇠락한 힘들에 메스를 가한다.

이 해체 작업은 아주 섬세하다. 그는 인간의 심리에 초정밀 현미경을 가져다 댄다.

가령 그 해체 속에서 인간의 ‘사려 깊음’이란 두려움의 표시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상처 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으려는 태도,

즉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적인 동정은 어떠한가?

불행한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는 이 ‘인간적’인 성질은

동정하는 자들이 우월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일까?

이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 한 일이 없어지고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고” 느낀다.


이런 점에서 니체에게 ‘인간’은 가장 추한 것 중의 하나다.

“가장 추한-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 인간의 얼굴보다 더 추한 곳을

세상 어디에서라도 발견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32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니체의 해부도 속에서

‘세인’적인 것 저편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상상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한다.


이 새로운 인간은 ‘논쟁적’이다. 그렇다면 논쟁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것에서 출발한다.

열정적으로 상대방에게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영도의 얼음 위에 놓아야 한다.

이 냉정한 열정의 소유자는 자신의 과거를 장식하거나 꾸미지 않는다.

이 냉정함 속에서 그는 ‘과거’의 것과 대면한다.

그는 때로는 ‘훌륭한 적’을 만들어내고 그와 대결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에게 ‘적이 존재한다’ ‘그가 나와 대결하고 있다’는 감정.

그리고 쉽사리 ‘화해’의 제단에도 오르지 않는 것.

그는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면서

그들이 자신을 나쁘지 않게 여기지 않게 바랄 정도로 자만심이 강하지 않다.

 

그는 논쟁을 사랑하는 만큼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버’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짊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친구가 되는 것만큼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을 가진다.

그는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이들을) 하나의 완정한 동아리”로 만들어낸다.

이 친구들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구가 되게 한다.


물론 친구들 사이에 ‘오해’는 필연적이다.

친구를 유혹하는 어떤 ‘미끼’

이 오해와 착각이 친구들을 그에게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사람도 어떤 경시할 만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오류와 착각’ 속에서 친구의 변신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완벽한 친구를 찾아내고자 했던 현자들이

“친구들이여,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외쳤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오류와 착각이라는 인연의 장을 가로지르며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한다.

“친구들이여, 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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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이라는 것.

<반시대적 고찰 3부-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반시대적 고찰 3부.

1. 니체는 글 첫머리에 게으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게으름은 통념상의 부지런함, 게으름과는 다르다.

그는 게으른 사람들은 풍속과 세속의 의견에 숨는 자들라고 말한다.

편안함, 타성에 빠진 자.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처럼' 동일성과 반복에 빠진 자들.


사실 반시대적이라는 것은

자신에 反하고 통념을 거스르는 것이다.


부지런한 자들은 사유와 행위의 간격이 없는 이라고 생각한다,

사유와 행위의 간격의 그 사이로 세론, 통념, 풍속과 같은

망념들이 들어 온다. 당연히 이 망념의 크기만큼 우리는 게으르다.

망념에 따른 행위는 온 삶을 드러내지 못한다.

망념에 의한 행동은 아무리 부지런히 행한다 해도 게으르다.


니체는 망념없이 행하는자,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자를 찾고 있다.

이런 자가 반시대적 인물이다.

2. 어떻게 하면 망념없이 행할 수 있을까?

니체는 그 실마리를 몰락에서 찾는다.

망각을 통해 비역사적인 능력을 찾았듯이,

몰락을 통해 우리는 반시대적 사유를 발견해낼 수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먼저 ‘몰락’에 뭍어 있는 표상들을 걷어내야 한다.

몰락은 그렇게 공포스럽거나 고독한 것이 아니다.

몰락은 생명 순환의 일부다. 몰락함으로써만 새로워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몰락은 자연적이며, 생산적이다.


그렇다면 몰락이란 어떤 것인가?

몰락은 능동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인데.

‘외부’와 접속하고 포용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운다는 점에서

능동성의 확장일 것이다.

니체는 몰락과 비약 속에서 사유한다.


“너 자신을 저당 잡히고 너 자신을 잃어버려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너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그저 걸어라.

사람은 그의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분기한다.”


니체에게 몰락은 비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하기에 그의 몰락은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유쾌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몰락함으로써만 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약할 수 없는 몰락 또한 존재한다.

자신의 깊은 내면 속으로 침잠함으로써

모든 시간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의 몰락이다.

니체는 이런 기억의 무게를 털어버리고

자신에게는 지혜를, 타인에게는 명랑함을 선물하고자 했다.


"진정한 사상가는 그가 진심을 말하든 농담을 하든,

또는 인간적 통찰을 표현하든, 신체적인 관용을 표현하든

항상 흥겹게하고 생기를 복돋아 준다.

확실하고 단순하게, 용기와 힘을 가지고

기사처럼 강하게, 어쨌든 승리자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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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카시, [폭력의 철학] 에 대해

신부님들이 서울광장을 가로질러 갈 때

그들의 하얀 미사복에서

나는 전사들의 몸에 밴 화약 냄새를 살짝 맡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전하는 비폭력의 외침.

그 파동은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보다도 강력한 물리적 힘으로 다가갔으리라.

'존재 한다는 것'만으로 물질적 폭력 이상을 만들어내는 이들.

비폭력이 '힘의 부재'가 아님을 이들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폭력 내부에 어떤 구분의 선을 귿고 있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 불가능성이라는 전제 하에서  글을 시작한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막연한 '도덕 감정'이 폭력을 용인하며, 폭력의 압도적 비대칭성 속에

폭력에 대한 무감감을 확대시키는 하나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가령 비폭력에 동의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경찰 폭력에 대한 수용 같은 것이다.

동시에 폭력은 안 된다는 말이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비폭력은 하나의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된다-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증오한다-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 사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언제나 비폭력을 전제로 행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폭력이나 비폭력이 아니라 새로운 지대를 만들고 생성해내는 것,

폭력 내부를 가로질러 새로운 생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문제다.

 

사카이 다카시는 폭력과 비폭력을 둘러싼 일종의 계보학을 그려낸다. 킹 목사의 비폭력 노선, 말컴X, 파농등의 자기 증오로부터 해방을 위한 폭력 등등. 그는 이들의 논의가 포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에 갇히기 보다는 새로운 적대성의 형성이었음에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폭력은 이전의 폭력의 문제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근대국가를 규정하는 요소는 주권, 폭력, 안정의 특이한 배치였다. 말하자면 국가는 폭력을 배타적으로 독덤하는 한편, 그 내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체제.

그런데, 신자유주의 확산과 함께 국가는 더 이상 자국민들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비정규직법의 확산, 농민의 배제와 같은 정책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만들어내는

대중의 배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난민'이라고 표현되는 배제된 대중의 삶.

 

사센은 자본이 글로벌 시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고

글로벌 시티는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배제된 자들로 분해된다고 말한다.

마크 데이비스 식으로 말하면 초고층 빌딩과 슬럼으로의 분해라고 할까.

사카이 다카시 역시 '난민'은 이제 사람들이 필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조는 '불안'이다. 불안한 만큼, 안정장치(security, 보장 보험)에 더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러난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안정장치로 작동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는 배제의 장치가 아닐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국민국가는 경찰국가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난민들을 관리하는 자. 성의 문턱을 관리하는 자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은 폭력에 노골적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

 

더욱이 신자유주의 체제는 대중들의 고립을 부축기고, 자신의 삶을 자신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보장보험'에 눈길을 돌린다.

 

일종의 폭력에 노출된 상황. 이에 대해 사카이는  '고립과 복종'이라는 나쁜 안전 대신

"이동과 유동성'을 전재로 각각의 특이성을 서로 승인하는 일종의 집단성의 형성에 주목한다.

물론 이동의 흐름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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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매체화?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에서 좋은 삶의 문제와 결부시켜

자본주의적 매체의 탈매체화를 촉구한 바 있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매체는 우리를 모방-동일화의 방향으로 이끈다.

매체의 수용자로서  우리는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이야기에 쉽게 빠져 든다.

즉 대중 매체는 우리의 욕망을 막고 그 공간에 욕망을 포획시킨다.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가로막기. 소비의 욕망을 자극하되 탈주의 욕망을 저지하는 것.

이것이 대중 매체 아닐까?

이렇게 갇혀진 욕망의 정치를 벗어나 매체를 새롭게 전유하는 것, 이것을 탈 매체화라고 하자.

 

탈매체화는 사람들의 탈정치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제 의회가 더 이상 사람들을 '대의'하지 않는 것처럼,

매체 역시 사람들의 다양한 뜻을  하나의 여론으로 생산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이 매체 자체가 확대되어 버린 상황에서 여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디어 액션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조건. 이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 여론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울림과 자신을 동일시화함으로써 공명하고 이 공명을 통해 하나의 생산하는 문제. 

이런 점에서 이 하나의 소리는 희소성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디어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의 소리에 자신을 겹치는 것보다 자신의 소리를 내는게 더 편하고 수월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신문의 소리에 자신을 겹치는  주체로 생산되지 않는다,. 훈육 시대의 종말이라고 할까?

 

미디어의 과잉이라는 조건 하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관심을 받을가에 관심을 둔다. 댓글이 달리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두려움 아닐까?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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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이 영화를 보라 >(고미숙, 그린비)


소리가 들리는 글.

글을 읽다 저자의 카랑카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저자가 영화와 같은 비문자적인 것을 책 속의 문자로 풀어 쓴 것처럼, 글을 읽다보면 문자는 사라지고 그녀의 입담과 시선이 오롯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 여기’의 소리와 풍경을 만나게 된다.


문체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어 놓은 듯 경쾌하고 선명하다. 한 번의 호흡으로 끝까지 갈 만큼, 리듬감 있게 읽힌다. 다른 영화 소개서들처럼 알기 어려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무겁게 주렁주렁 달려 있지 않다.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자신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빌려 스스럼없이 이야기 한다. 그녀의 삶과 글이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이런 태도에서 기인할 터.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위생 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 이동과 접속’등 근대의 풍경과 지금의 이야기가 스케치된다. 내용의 무게로 치자면 무엇 하나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근대라는 미로를 빠져 나와 있다. 저자는 눈 밝은 안내자인 셈.


그러나 방심은 금물. 사실 저자는 유람 관광단의 안내자가 아니다. 우리를 미로로부터 편안하게 빠져나오게만 하지 않는다. 곧 우리의 삶, 즉 우리의 일상이 미로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나는 이 보게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늘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자. (나의 경우 이 영화들에서 이런 모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환상 혹은 망상을 통해 무엇인가를 바라보지 않은가. 그리고 이 환상에 맞춰 또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잘 본다는 것은 이 환상을 눈꺼플에서 떼어 놓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사실 뭔가를 보고 배운다는 것은 이 환상과 대상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여섯 가지의 길을 안내하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삶의 거리를 좁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역시 눈 밝은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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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범람

 새로운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이 공간이 카오스 상태임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을 듯하다.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홈패이고 구획지어 졌던 공간에 사람들과 그들의 욕망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런 흐름은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기보다는 골목과 샛길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카오스적 공간에 대한 태도가 엇갈리면서 각자들의 입장이 선명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의 흐름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니들의 길을 가라, 곧 사그라들겠지라는 태토. 명박식으로 말하면 소통의 단절.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태도는 이들 자신의 소통 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제도권에 대한 욕망. 카오스 상태는 지금으로 충분하다. 문제를 제도화시키자는 태도일 것. “정부는 무능력하고 잘못했다. 그렇다고 제도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제도화하자. 이제 촛불을 끄자.” 새롭게 펼쳐진 정치적 공간을 이쯤에서 접고 사람들의 뜻을 대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자는 의견. 아침에 경향신문에 실린 대담을 보고 놀랬다. 제도화가 결국 어떤 우호적인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실제적으로 범 여당이 2/3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제도권이 사람들의 뜻을 대신해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야당은 이번 운동에서 그 무엇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정당이 아닌가? 그리고 촛불을 끄고 제도화된 공간으로 문제를 전환하려는 이들에게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참을 수 없다. 꽉 막힌 밀실의 쾌쾌한 냄새. 그들은 우리의 촛불이 충분히 타올랐다고 생각한다. 촛불의 광장 대신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서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협상.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수입 쇠고기 재협상?

우리는 쇠고기 문제 때문에만 촛불을 들지 않았다. 권력의 삶과 생명에 대한 위협과 침해, 권력의 무능, 소수자에 대한 배제..... 촛불은 이런 무수한 힘들이 하나로 응결되어 나타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쇠고기 재협상과 같은 식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단 새롭게 열린 정치적 공간에 대한 섣부른 예상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도 새롭게 열린 공간에서 우리는 공간의 자유를 더 즐겨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새로 열린 공간을 충분히 사유하지 못했다. 대운하 문제라든가, 교육의 문제, 그리고 비정규직․이주노동자, 성적소수자, 장애인 등등....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도  많다. 우리는 이 정치적 공간에서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서 소통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간의 이질성, 카오스를 아직도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했다. 우리는 더 많이 모이고 더 많이 충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공간의 문을 폐쇄하기에 시간은 너무 이르다. 촛불을 아직 꺼트리고 싶지 않다.


ps.물에 빠진 개를 섣불리 건져주는 우를 범해서도 안된다. 물에 빠진 개는 위험할 때는 뭐든지 다할 것 거첨 아양을 떨지만 물에서 건져지만 다시 사람을 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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