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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조백기 등 연행된 인권활동가를 석방하라

<인권단체연석회의 기자회견문>


박래군, 조백기 등 연행된 인권활동가들을 석방하라!!


3월 15일 평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강제 토지수용에 나선 국방부와 경찰은 용역을 동원해 농민들에겐 생존의 근거인 농지를 파괴했다. 생존의 근거가 박탈되고 미래의 희망이 무너지는 이 처참한 현장에서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평택주민들과 인권활동가들은 생존의 희망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행정대집행에 저항했다.

이날 인권활동가들의 저항은 그 목적은 물론이거니와 수단에 있어서도 정당한 것이었다. 인권활동가들의 주장은 간단했다. 농민들의 뜻을 어기면서 이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지 말라는 것이었다. 토지수용에 따라 미군기지가 확장되면, 그만큼 한반도의 평화가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주장이었다. 그러하기에 황새울 논밭으로 잠입한 건설 중장비가 더 이상 농지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맨손으로 저항했던 것이요, 경찰과 용역이 농민들과 이 땅 국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더 이상 파괴하지 못하도록 맨몸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들의 요구와 행동은 헌법적 가치인 평화주의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장차 미군기지 확장이 불러올 커다란 폭력에 맞서고자 했던 용감한 비폭력이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인권활동가들의 정당한 행동에 불법의 딱지를 씌워 무차별적인 폭력과 연행을 행사하더니만, 이제는 이들의 인신마저 구속하려 하고 있다. 평화적 생존권을 외치는 평택의 저항을 두려워한 경/검은 삼십 구명에 달하는 연행자들을 법적 한도시간인 48시간을 모두 채운 상태에서 석방하였고, 급기야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등 4명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은 인권활동가들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일체의 법 상식을 무시하는 반인권적 폭거로 규정한다.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의 구속요건을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와 함께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증거인멸 혹은 도주의 우려가 있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는 인권운동사랑방과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로서 이미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권단체의 활동가들이다. 또한, 미군기지확장 저지 인권활동가선언에 참여하는 등 토지수용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공개적으로 밝혀왔으며, 3월 15일에는 실정법상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충분히 예상됨에도 토지수용에 반대하는 행동에 떳떳이 나섰던 이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인권단체들은 이들에게서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를 우려할 하등의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은 검찰 또한 이 같은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또한 최근에는 법무부차원에서도 인권옹호를 위한 수사원칙으로서 불구속수사를 강조하고 있으며, 법원내부에서도 방어권 보장을 위한 불구속 수사 확대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등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옹호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모종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지 않고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인 것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은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영장실질심사에 임하는 재판부에 강력히 촉구한다.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등 연행자들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라! 재판부가 불구속수사와 재판의 원칙을 어기고 구시대적 발상을 따라 인권활동가들의 인신을 구속하려 한다면, 우리 인권활동가들은 이 사안을 한국의 인권활동가들과 인권단체들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는 폭거로 간주하고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투쟁할 것이다. 당신들이 가두려고 하는 것이 비단 물리적인 사람 몇 명이 아니라, 이 땅의 인권이요 평화라는 점을 분명히 각인하기 바란다.


2006년 3월 18일

인권단체연석회의

 

<3월 15일 연행되던 박래군 활동가.. 파란 마스크를 쓰고 저항하고 있는 이가 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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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두 사람 앞에 서자 고단하다 느꼈던 내 삶은 투정이 되고 만다. 만주와 샤말은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 있어 잊혀지지 않을 ‘영웅’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군가의 말처럼 ‘던져진 삶’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욕을 견뎌야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꿈을 꿀 나이에 16살의 만주는 가족을 위해 홀로 한국에 왔고,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세 개를 잃고도 보상은커녕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길거리로 쫓겨났다. 그가 같은 처지에 놓인 12명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도 사람”이라며 1994년 1월부터 벌였던 한 달간의 농성은 우리사회에 이주노동자 실태를 고발하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농성은 산업재해를 입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보상 실시라는 큰 성과를 일궈냈지만 19살 그는 꿈을 잃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생활-


“한국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어린 그의 투쟁이 우리사회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무너진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 드러눕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그래서 절망과 공포가 너무 컸을 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의 투쟁에 격려와 지지를 보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때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결심했단다. 앞으론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겠다고.


귀국한 그는 ‘네팔 노동조합 연맹(GEFONT)’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책상뿐이었지만 얼마 후 이주노동자를 위한 상담소가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그는 네팔에 없어서는 안 될 노동운동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고단한 삶은 오늘도 계속된다. 3명의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 장애인으로, 그리고 전통적인 네팔 사회에서 미혼 여성으로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꿈을 꾼다. 아직도 손을 대면 신음이 새어나올 듯한 상처를 딛고 오늘을 살아내는 꿈을.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아동노동을 없애기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로.


네팔 이주노동자 연합 사무국장,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위원장으로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신화’가 되어버린 샤말. 그의 20대 역시 한국의 공사판에서, 공장에서, 신문배달을 위해 오르고 또 올랐던 뒷골목에서 지나갔다. 성실히 정직하게 일했지만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욕설과 모멸이 따라다녔다. 생존을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름 모를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차별과 천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꿈을, 목숨을 잃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투쟁을 시작했던 그는 2004년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이던 중 체포돼 그해 4월 네팔로 강제 추방됐다. 10년 만에 돌아간 고향 땅이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반정부 인사’로의 낙인과 생존과의 전투였다. 자신을 주체하기도 버거웠던 그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추방된 또 다른 이주노동자와 함께 살았다. 공부를 가르치고, 직장을 알선해주고, 가족들의 생계를 도와주고. 사람들의 칭찬에 그는 말한다. ‘더불어 사는 것, 손잡는 것일 뿐’이라고. 낮에는 노동운동가로, 밤에는 생계를 위한 직장인으로, 그리고 학생으로 바쁜 삶을 사는 샤말.


-귀국후 네팔 노동운동가로-


그들은 20년 전의 자신들인 어린이 노동자들을 위한 꿈을 꾼다. 어린이 노동자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꽃필라(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꽃을 피우는 운동/KOPILA)’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 이를 위해 네팔의 활동가들은 월급의 5%를 보태고 있다. 오랜 가난과 계속된 내전 속에서 네팔에만 2백50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과 탄광과 거리에서 일한다.


1,000원도 되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4시간의 노동과 학대를 견디면서. “당장 현실을 바꿀 순 없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꿈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바람처럼 아이들이 꿈꿀 수 있기를, 샤말과 만주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당신 역시 손을 맞잡아 행복해지기길.


<네팔 카트만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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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땅에 남겨진 사람들

<웨스트 파푸아를 다녀와서> 학살의 땅에 남겨진 사람들 선배에게. 예정된 출발이었지만 도망치듯 짐을 꾸렸습니다. 마지막이 될 거란 베니 교수의 작별인사에 ‘꼭 다시 만날 거라’ ‘다시 올 거라’ 말했지만, 정말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그의 조국,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에서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 인물 중 한명이고, 저는 그의 나라를 감싼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혼자만 떠나왔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학살이 판치고 있는 땅에 남겨둔 채. 집회 참여와 사진 촬영을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들의 감시와 노골적인 협박, 그리고 2번의 체포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엄습하는 불안을 ‘설마 외국인을 함부로야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떨치려 애썼고, 머무르는 1주일 내내 작은 소리와 사람들의 몸짓에도 놀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흘린 서러운 눈물 속엔 ‘안도’도 스며있었습니다. 하지만 파푸아인들에겐 저와 같은 탈출구란 없습니다. 죽음은 마치 예정된 순서와도 같고, 공포는 차마 공포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일상적입니다. -공포에 휩싸인 웨스트 파푸아- 유엔과 미국의 공모, 그리고 국제사회의 침묵 속에서 1969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어떤 사람들은 면도칼로 베어져 살해당했고, 어떤 이는 생식기에 뜨거운 철이 넣어져 살해당했다고 했습니다. 살해된 남편과 아버지의 시신을 먹도록 강요당한 가족도 있답니다. 임신부들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에 의해 배가 절개된 채 죽어갔습니다. 독립운동 혐의가 있다며 아들을 잡아가 고문한 것도 모자라 그의 어머니는 배설물이 가득 담긴 컨테이너 안에서 한달을 지내야 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성폭행당한 후 수장됐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소름 돋는 광기가 웨스트 파푸아를 휩쓸고 지나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작전 수행, 독립운동가 색출이라는 미명 하에 군인들이 지나간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화를 피해 산으로 도망을 간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구의 10분의 1이 인도네시아에 의해 학살된 웨스트 파푸아 땅에서, 파푸아인들은 생명을 가진 ‘존엄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전멸시키고 짓밟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파푸아인의 아이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은 최고 수치에 이릅니다. 파푸아인 중 겨우 1%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고, 땅은 인도네시아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훼손되고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무장한 장갑차와 군인이 시내 도로를 질주하고, 항구에 정박한 군함의 화포는 도시를 향합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이해관계 속에서, 국제 시민사회의 무지 속에서 아직도 웨스트 파푸아는 고립돼 있습니다. ‘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 아니 믿음이기보다는 읊조리는 ‘주문’만이, 언젠간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해줄 거라는 희망만이 파푸아인들의 삶을 지탱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가지 말 것을 그랬나봅니다. 항상 도망칠 수 있는 이방인의 입장이었다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헛된 기대 따위는 심어주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의 무뎌짐만을 탓하는 활동가라면, 시선조차 돌리지 말 것을 그랬나봅니다. -국제사회 외면속 오늘도 절망- 조국의 기,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양심수가, 하나님도 외면하시는 듯해 독립운동의 전선에 섰다는 목사님이, 그리고 여대생 미라의 모습이 마음을 붙잡습니다.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미라가 답하더군요. “저는 웨스트 파푸아 사람이고,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두려워도 저에겐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을 위해 소리 높일 책임이 있어요.” 그렇다면 저에겐, 그리고 우리에겐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그 책임은 파푸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황을 잘 모른다는 말로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아직 웨스트 파푸아엔 봄이 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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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고 싶어 라디오 방송국을 차렸다는 유리코의 사무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위치해있습니다. 동티모르 4대 방송국 중 하나라고 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있게 방송국 이름을 외쳐봅니다. 하지만 택시는 한참을 헤맨 뒤에야 락카로 ‘라캄비아(RAKAMBIA)’라고 쓰인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섭니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단층 건물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던진 폭탄 흔적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커다란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고, 창문은 성한 것보다는 깨진 것이 더 많습니다. 방송국 기자재라곤 1평 남짓한 작은 방송실 하나와 문서작업만 되는 컴퓨터 2대가 전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기억하는 탓에 총리의 종교적 신앙마저 그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종교차별해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와르의 사무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 겸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회의공간과 컴퓨터 한대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할 뿐입니다. 빠듯한 단체 운영에 안와르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99년 해방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버려진 건물은 사무실 삼아 아동과 여성인권을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단체도 이들보다는 호사스럽다 느껴질 만큼 열악함에 고개가 흔들어지지만 이들은 국제연대를 꿈꿉니다. 지원받기위한 연대가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연대를. 63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국민의 1/10이 죽어나간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 시간 사용료가 하루 수입에 맞먹을 만큼 비싼 지출을 감수하며 인터넷 방에서 정보를 모으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에서 독립해 정부와 국가를 갖게 된 지 이제 3년. 해서 과거청산부터 사회재건까지 구석구석 해야 할 일엔 끝이 없지만 국제연대를 터부시하진 않습니다. 항상 ‘국외’보다는 ‘국내’사안이 우선이고, 국제연대는 몰라서가 아니라 ‘여력’의 문제라며 뒷전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유리코가 말합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없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고.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을 잃은 닌도가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공포에선 벗어나 있다”고. 그러면서 묻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할 거냐”고.


필리핀 분쟁지역에서 만났던 이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25살의 평화운동가 빙은 “언제든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을 수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빙에게 외부세계의 ‘연대’란 활동의 방패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힘입니다. 거듭된 교전으로 농사지을 땅과 가축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에모다스에게도 ‘연대’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공포에 떨며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었냐”고 절규하더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인권의식이나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발달해있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명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긴 해도 물적, 인적 자원을 쏟아 부으며 긴 호흡으로 이들과 동고동락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권운동’을 해왔다는 저 역시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기 전엔,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기 전엔 ‘조건’만을 탓하며 ‘국제연대’는 특별한 사람, 단체의 몫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제쯤이면 ‘국가’라는 공간을 넘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공포에 어깨를 걸 수 있을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사용해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2005. 7. 22 동티모르 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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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개새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은 것임에 틀림없다며 다시금 물었다. 보다 또렷한 음성이 귀에 와 닿는다. 분명 “개새끼”였다. 한국 공장에 다닌다는 리아와의 첫 만남에서 머쓱함을 피하기 위해 아는 한국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지거리였다. 마사에게 각인된 말도 다르지 않다. 마사는 “야, 임마”라는 성난 소리를 가장 자주 듣는다고 했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그래도 남의 집 안방까지 가서 그리 험한 짓 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마닐라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까비테에 닿자마자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필리핀 내 4개의 수출자유구역 중 가장 크다는 까비테에 자리 잡은 250여개 공장 중 해외기업의 30~50%는 한국기업. 다른 기업들이 그러하듯 한국기업들 역시 수출자유구역이 주는 장기간의 세금 면제 혜택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곳에 왔다. 공장들이 문을 열자마자 가족부양과 가난의 무게를 진 필리핀 노동자들이 앞 다투어 줄을 섰다. 리아와 마사 역시 5년 전, 여고생 교복을 벗자마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들 횡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해요. 주문량이 밀리면 토요일은 물론이고 밤을 새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하지만 할당량제라서 초과 근로 수당이나 야근수당은 거의 없어요. 연일 야근이 계속되면 몸이 못 견디는데 맨 처음에는 겁 없이 ‘하루 쉬겠다’는 말도 했었죠. 어떻게 됐느냐고요? 한국인 관리자가 별일 아니라는 듯 쉬어도 된다고 하기에 쉬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필리핀 상사가 불러서 해고됐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은 후론 아파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결혼 혹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고된 사람들이 있기에 2살 된 딸의 엄마이면서도 싱글이라 속이고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리아. 그는 매일 녹초가 된 몸으로 공장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채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예고도 없이 폐업을 하거나 “경기가 안 좋다”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는 공장이 많기에, 그 알량한 월급조차 체불돼 제때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기에. 거기에 6개월 이상 일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도록 한 필리핀 노동법 망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5개월 이상의 계약을 하지 않다보니, 다음달부터는 꼼짝없는 실업자 신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체크해요. 관리자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다보니 생리라도 하는 날엔 얼마나 끔찍한지….” 마사가 몸서리를 친다. ‘한국인’임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성희롱도 건너 뛸 수 없는 화두다. 툭툭 몸을 건드리거나 슬쩍 껴안는 것은 예사고 어떤 관리자들은 공공연히 성적 요구를 해오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고시키겠다고 협박을 해온단다. 공단 내 일본, 대만 등의 기업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한국기업처럼 성희롱이나 욕설이 일상화된 공장은 없다는 게 노동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한국 공장을 가장 ‘나쁜’ 일터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현지서 가장 나쁜 일터로 꼽혀- 넌지시 노조를 만들거나 싸움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떠본다. 한숨 섞인 답변이 되돌아온다. “일곱 식구가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한번 눈 밖에 나면 지금 다니는 공장은 물론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꿈이라곤 계속 일을 할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전부라는 사람들. 너무나 소박하지만 돈에 눈먼 한국 기업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투자자 유치’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자국 정부의 방관 속에서 한없이 아득해진 그네들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필리핀 까비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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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다

 

 

살다보니 "잘 지내세요?"라는 그 평범한 질문마저도 아주 특별해지는 순간이 있다. 너무도 일상적인 인사에 망설임을 느낄 때, 삶은 다른 모습으로 옆에 서 있다. 필리핀에 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었으면서도 과연 무엇을 말하고 물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혹여 우리의 방문조차 지난 상처를 헤집는 잔인한 행동이 될까 두려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못 만날 인연’이란 말로 주저하는 길동무를 설득시키고 함께 약속장소로 향하던 그 길은 왜 그리도 아득하던지.


“하이(Hi)” 긴 생머리에 환한 미소를 가진 여성이 내 길동무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동안 헤어진 친구들이 다시 만난 것처럼 3년 만에 사건 의뢰인과 소송을 도와주었던 이가 필리핀 땅에서 만났다.


길동무와 에미(가명. 28)가 처음 만난 건 지난 2002년 여름. 에미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중개인의 말을 믿고 예술흥행비자(E-6)를 발급받아 다른 필리핀 여성 10명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고단한 삶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성매매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확언과 가난을 탈출할 발판이 될 수 있을 임금보장을 약속받은 터라 클럽 무용수로 일하는 모욕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한국 땅에 도착해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뺏기고,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돼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방에 갇힌 다음은 이미 늦은 뒤였다. 동두천에서 그렇게 석달을 살았다. 브래지어와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혀져 손님 테이블에 앉혀지고 매일 할당량의 매상을 올려야만 했다. 이를 채우지 못하는 날엔 한없이 무대에 서 있는 벌을 받아야했다. 잠시 앉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의자가 날라 오거나 욕설과 뭇매가 쏟아졌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 울부짖었지만 손님방에 들여보내져 윤락행위를 강요당했다. 학비를 마련할 욕심에 나이를 속여 한배를 탔던 16살의 필리핀 소녀 아마도 더러운 밤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렇게 한국은 잔인한 땅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런 정황이 필리핀 대사관에 알려져 구조되긴 했지만 억울함을 채 토해내기도 전에 윤락행위방지법 위반으로 강제추방됐다. 대사관과 길동무 등의 도움을 받아 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600만원의 피해보상 판결을 받아내긴 했지만 승소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월급은 고사하고 10원짜리 동전 하나 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땅에서 호텔 밴드로 일하면서 에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을 제외하곤 한국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공간이다.


이를 모르지 않기에 길동무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몇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지옥으로 보낸 이에게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는 법정의 현실 앞에서, 그렇게 착취된 돈이 다른 사람 명의로 둔갑돼 집행조차 불가능한 ‘법’ 앞에서, 길동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법이 바뀌고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피해 외국인 여성이 소송이 끝날 때까지 적절한 보호 속에서 국내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되었다. 하지만 피해여성이 직접 피해를 입증해야하거나 혹자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그림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현실을 정의롭게 바꾸지 못하는 법이, 재판은 서류가 아닌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었을까?


이주노동자란 이유로, 혹은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월평균 70만원(여성부 2004년 실태조사)의 임금을 주고 휴일도 없이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성매매를 강요하는 업주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개비’와 불안전한 신분을 볼모로 행해지는 성매매가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래도 세상 좋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


힘들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에 웃을 수 있다는 에미의 환송에 이별을 고했다. 재판당시에는 피해를 지켜볼 수밖에 없음에 마음이 무너졌는데, 지금은 에미의 딸들에게 대물림될 가난과 제2, 제3의 에미를 매일 만나면서도 달라질 줄 모르는 암담한 현실에 더 큰 방관자가 된 것 같다는 길동무의 씁쓸한 고백을 안고. 오늘도 발걸음이 무겁다.


2005. 5. 13 필리핀 퀘존시티에서

 

<현재 에미가 살고 있는 집>


 

<에미네 집 거실에 놓여져 있는 신랑 각시 인형.. 그렇게 행복하게 에미가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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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따따와 아베

 


“따따, 그건 안 된다니까” 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30분 째 타갈로그어(필리핀의 국어)와 영어, 그리고 바디 랭귀지까지 총 동원해 얘길 해보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다. 서점에 책을 같이 사러가기로 한 약속을 앞두고 따따는 내게 하숙집 주인장에게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얘기해달라고 말하고 있고,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따가 직접 주인장에게 가서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따는 흔쾌히 ‘오케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한 지, 아님 자신의 생각이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일어설 기미가 없다. 결국 따따가 먼저 운을 떼고 내가 거들기로 한 선에서 얘기는 마무리 됐지만, 우리는 결국 그날 서점에 같이 가지 못했다.

 

어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따따에게 하라고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따따는 필리핀에서 내가 거처하고 있는 하숙집에 고용된 핼퍼. 말이 좋아 가정 도우미지 우리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식모와 다름없다. 아니 더 아득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24시간이 모두 차압된 대기조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더 없이 친근한 관계처럼 보이다가도 주인장이 종이라도 흔들어 될 때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런 따따에게 휴일도 아닌 평일 오후에, 학습교재를 사기 위해 서점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하라고 했으니, 주인장의 힐난이 두렵고 월급 깎일 걱정부터 드는 것이 당연하다. 


생면부지의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해 마음이 산란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한달 째로 접어든 필리핀 생활은 이제 적응 단계를 넘어 이곳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처럼 보이고, 타갈로그어가 한국말처럼 들리는 환청에 빠져 살 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정붙이기 어려운 것은 필리핀에 짙게 드리운 가난과 가난의 그림자 같은 핼퍼(필리핀의 ‘가정 도우미’)의 존재다.


서울 떠나오기 전 ‘필리핀 핼퍼’에 대해 얼핏 들어보긴 했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타국 생활에서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 바로 이 핼퍼다. 우리네로 방 세칸짜리 집에 살 정도쯤이면 자가, 전세를 가리지 않고 한집 살이를 하는 핼퍼 한두 명쯤 두는 것은 여기선 매우 자연스럽다. 해서 그 거대한 수에 놀라고 상이한 문화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핼퍼들의 고달픈 인생살이와 더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핼퍼와의 관계에선 ‘주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웃기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내 하숙집 핼퍼 따따는 전형적인 필리핀 농부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 꿈은 간호사가 되는 것. 여전히 따따는 그 꿈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가난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따따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올해로 25살이 되었으니 벌써 8년 전이다. 틈이 날 때마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지만 대화는 꼬리를 잇지 못한다. 필리핀 교사의 1/10밖에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한달 월급의 절반을 학비로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고작 8시간 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간을 모두 학교에 반납해야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는 일요일만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매일 남자친구인 ‘준준’이 그립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돈 많은 새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단다.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준준의 벌이로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따의 진담 섞인 농담 앞에서 ‘노’라며 단호하게 엑스자를 그린다. 하지만 말과 맘은 정반대로 향한다. 아무리 바지런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면, 3살짜리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남의 집 핼퍼 생활을 하고 있는 미혼모에게 눈먼 ‘행운’이라도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따의 고된 삶도 앞집 핼퍼인 아베에 비하면 복에 겨운 편이 되고 만다. 때로 따따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고, 똥배짱을 튕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베는 끼니조차 거르는 일이 다반사다. 집주인의 잦은 출장 때문이다. 물론 길나서는 집주인이 일정한 돈을 식비로 챙겨준다고는 하지만 하루 두 끼를 겨우 해결 할 수 있는 액수밖에 되지 않는다. 월급도 따따의 절반 수준이다. 슬쩍 방문해 본 아베의 집은 무섭기만 했다. 아베의 방엔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30도를 오르내리는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냉장고 코드는 뽑혀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약간의 쌀과 아베가 저녁거리로 사온 생선 한 마리뿐. 4년 동안 한달에 절반이상을 배고픔과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아베는 그만 둘 엄두는커녕 불평 한마디 뱉어내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아둔하다는 사람들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10년의 핼퍼 생활을 통해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문턱을 겨우 넘은 그에겐 돌아갈 곳도, 잠시라도 쉬어갈 안식처가 없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아무런 꿈도 없다고 말하는 그의 바램은 단지 7년 전 남편이 데리고 떠나버린 아이를 한번이라도 보는 것. 무표정함이 얼굴이 되어버린 아베의 나이는 이제 겨우 27살이다.


가난은 이렇듯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비집고 찾아들고,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만든다.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고, ‘노예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눈망울에 절망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아직 핼퍼에 대해 고민하는 이 하나 만나지 못했다. 게으름과 짧은 영어실력이 그 연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계전선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16세미만의 아동 중 1/6이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보다 여행객들을 향해 돈을 구걸하거나 시장거리에서 전대를 찬 아이들을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핼퍼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를 찾는 것은 이 나라를 뜰 때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할지조차 모를 암담한 현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따따와 남자친구의 담장 데이트를 위해 보초를 서고, 아베와 같이 식사를 하기위해 주인장에게 어떤 핑계를 될까를 궁리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되는 타갈로그어와 영어, 그도 모자라 한국어와 바디 랭귀지를 총 동원해 수다를 떨고, 가끔 산책에 나설 때면 손을 맞잡는 것뿐이다. 풀이 잔뜩 죽은 따따의 얼굴 위로, 올 이 없음을 알면서도 집 앞 버섯바위에서 일어서 줄 모르는 아베의 기다림 위로, 오늘도 필리핀 다바오의 밤은 깊어간다. 헤아려지지 않는 핼퍼들의 고단한 삶을 밟고.


2005. 4. 8 필리핀의 다바오 시티에서.

 

<따따의 사촌 집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가진 처자가 바로 따따>

 

 

<모처럼의 외출에 아베는 한껏 멋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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