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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야 걷자 (7월 9일 긴급 보도자료)

긴/급/보/도/자/료

발 신 :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 행진단
단장 :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변연식(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송태경(팽성주민대책위 기획부장)
수 신 : 각 언론사 사회부
일 시 : 2006년 7월 9일
문 의 : 김정아 (평화 행진 언론팀장, 인권운동사랑방, 010-6348-2607)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1. 귀 언론사에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에서 긴급 취재 요청을 드립니다. “평화야, 걷자!”는 오늘(7/9)로 마지막 날은 맞고 있습니다. 어제(7/8)밤부터 오늘(7/9)새벽까지 평화 행진단은 원정삼거리에서 주민들을 귀가를 불허하고 안정리 상인연합회의 폭력을 방조하고 경찰의 만행을 항의하는 투쟁을 평택역과 평택경찰서 앞에서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3시경 경찰의 폭력 침탈과 무차별 연행이 자행되어 40여명의 행진참가자들이 현재 강제연행되어 있습니다.
오늘 행진단은 오후 12시 평화행진을 탄압하는 평택경찰서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기자회견 주요 순서 : 규탄 발언 기자회견문 낭독

오늘 1시 행진단은 행진의 마지막 코스인 대추리까지 가기 위해 또다시 행진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번 평화행진은 9일 저녁 5시 대추리 지킴이대회에서 마무리될 예정이며 이는 이미 보도된 바있습니다. 어제밤과 새벽 경찰의 폭력과 직무유기로 인해 평화롭고 합법적인 행진을 가로막혔던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적인 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후 1시 행진 결의대회를 마치고 행진의 마지막 코스인 대추리까지의 행진을 진행할 것입니다.

행진단은 오늘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과 행진 결의대회와 행진을 진행할 예정이오니 꼭 취재하셔서 보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① 경찰 폭력규탄과 평화행진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 일시 : 2006. 7. 9 오후 12시
- 장소 : 평택경찰서 앞

② 평화행진 결의대회
- 일시 : 2006. 7. 9 오후 1시
- 장소 : 평택역 앞

어제 평택경찰서는 밤이 새도록 원정삼거리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주민들을 가로막았고 이는 명백히 불법적인 검문행위입니다.
둘째, 합법적으로 보장된 행진단을 폭력으로 위협하는 상인연합회의 조직된 폭력을 고의적으로 방기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은 것은 경찰의 직무유기입니다.
셋째, 이러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의의 뜻을 전하고자 평택경찰서 앞에 모인 행진단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한 것은 명백히 평화 행진단에 대한 경찰의 폭력 침탈입니다.
지금 이곳 평택에서는 경찰의 통제할 수 없는 불법과 폭력만행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평택 미군기지확장 저지 운동을 보도해 온 언론사들의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보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많은 취재와 보도 요청드립니다.


규탄기자회견문

평화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야만의 밤이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 행진단은 7월 8일 평택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밝힌대로 평화행진의 최종 종착지인 대추리로 향했다. 평택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추리로 들어서는 행진단은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원정삼거리에서 경찰의 봉쇄로 인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과 ‘안정리 상인들’이라고만 밝혀진 사람들이 대추리로 돌아가는 지킴이를 차량에서 끌어내 폭행을 가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었다. 어떠한 물리적 충돌도 반대하는 행진단은 가던 길을 멈추고 대기했지만 안정리 상인들은 행진단에게까지 쫓아와 각목으로 위협하고 돌과 계란을 던졌다. 그 과정에서 행진단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으며, 가던 길을 돌려 평택역으로 향했다. 평택역으로 돌아온 행진단은 여전히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경찰의 불법적인 봉쇄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택경찰서에 항의의 뜻을 전하러 갔다. 평택경찰서는 우리의 정당한 항의에 귀기울이기는커녕 집회를 마치고 뒤돌아서는 행진단의 후미를 둘러싸고 토끼몰이식 무차별 연행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여성행진단의 배를 발로 차고,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고, 심지어 무차별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평화를 위해 떠난 285리 대장정은 경찰의 폭력과 직무유기로 인해 대추리로 들어서지 못하고 무참한 피해를 당한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발걸음을 폭력으로 가로막는 경찰의 만행을 만천하에 공개하며 강하게 규탄하려 이 자리에 모였다.

먼저, 경찰은 불법적으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이동을 봉쇄하고 거리에서 노숙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법적인 근거도 없고, 설득할만한 이유도 대지 못하는 경찰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주민들을 막고, 농활대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밤을 풍찬노숙하게 만든 것이다. 도대체 경찰은 무슨 근거로 주민들의 통행을 막는 것인가? 이동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현저한 위험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을 막아선 경찰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저 말만 들으라고 윽박지를 뿐이다. 우리는 경찰의 명령이 지긋지긋하다. 적법한 근거와 절차를 내놓지 않는다면 경찰은 법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수의 권력을 위한 사병집단에 다름아니다.

둘째 경찰은 안정리 상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폭력에 수수방관하며 미온적으로 대응해 더 큰 폭력을 만들어냈다. 안정리 상인들의 폭력 행위는 한 두 번이 아니다. 어제 밤도 술에 취한 상인들은 각목과 돌을 들고 행진단에게 위협을 가했다. 우리는 상인들이 행진단이 있는 곳으로 오기 전부터 이러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경찰에게 알리고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이 우리의 바로 앞에 오기까지 길을 터주었다. 심지어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현행범을 보고서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행진단에게 되돌아 갈 것만을 요구했다. 미군기자 확장 문제를 주민간의 갈등인 양 조장하는 이러한 상황에 행진단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이들에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시위대의 마스크까지 시위용품이라고 우기며 폭력시위로 몰아붙이면서 각목까지 휘두르는 현행범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폭력배들의 야비한 공격처럼 해산하는 행진단의 후미를 치고 폭력적으로 연행한 경찰의 극악무도한 인권유린에 끌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 우리의 항의 행동이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무려 45명에 이르는 행진단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미란다 원칙 고지와 같은 기본적인 절차도 밟지 않고, 마치 짐승을 끌고 가듯이 행진단은 처참하게 연행되어 갔다. 기절한 여성, 경찰의 발길질에 업혀있는 행진단을 철저히 무시하고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며 평화행진 나흘째 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경찰에게 수차례 평화행진을 보장하라는 요청을 했지만, 경찰에서 보여준 것은 야수적인 만행뿐이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경찰에 의해 유린당했으며 이는 평화의 적이 다름 아닌 경찰이라는 것을 평택경찰서는 스스로 보여준 꼴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285리 발걸음을 중단할 수 없다. 평화는 이러한 폭력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쟁취된다. 이제 우리는 평화로운 발걸음을 가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다시 대추리로 행진한다. 평택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은 도처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경찰은 원정삼거리에 차벽을 둘러치고 안정리 상인들은 우리의 행진을 다시 막겠다고 다시 모이고 있다. 곤봉과 방패, 각목과 돌을 든 이들에 비해 우리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다. 행진단의 평화에 대한 열정, 기어이 평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은 보무도 당당하게 대추리로 향할 것이다. 거리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열정적인 선전전을 벌이고, 비바람과 뙤악볕에서도 평화의 맘으로 춤추며 노래하고 이곳까지 왔다. 우리의 힘찬 행진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평택의 평화를 염원하는 더 많은 이들이 행진단에 합류하기 위해 속속 평택으로 모여들고 있다. 큰 함성으로 그들을 맞는다. 생명의 땅 평화의 땅 대추리 도두리로 우리의 걸음은 멈추리 않을 것이다.

2006. 7. 9.

“평화야, 걷자!” 평화행진단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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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조백기 등 연행된 인권활동가를 석방하라

<인권단체연석회의 기자회견문>


박래군, 조백기 등 연행된 인권활동가들을 석방하라!!


3월 15일 평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강제 토지수용에 나선 국방부와 경찰은 용역을 동원해 농민들에겐 생존의 근거인 농지를 파괴했다. 생존의 근거가 박탈되고 미래의 희망이 무너지는 이 처참한 현장에서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평택주민들과 인권활동가들은 생존의 희망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행정대집행에 저항했다.

이날 인권활동가들의 저항은 그 목적은 물론이거니와 수단에 있어서도 정당한 것이었다. 인권활동가들의 주장은 간단했다. 농민들의 뜻을 어기면서 이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지 말라는 것이었다. 토지수용에 따라 미군기지가 확장되면, 그만큼 한반도의 평화가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주장이었다. 그러하기에 황새울 논밭으로 잠입한 건설 중장비가 더 이상 농지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맨손으로 저항했던 것이요, 경찰과 용역이 농민들과 이 땅 국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더 이상 파괴하지 못하도록 맨몸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단언하건대, 이들의 요구와 행동은 헌법적 가치인 평화주의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장차 미군기지 확장이 불러올 커다란 폭력에 맞서고자 했던 용감한 비폭력이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인권활동가들의 정당한 행동에 불법의 딱지를 씌워 무차별적인 폭력과 연행을 행사하더니만, 이제는 이들의 인신마저 구속하려 하고 있다. 평화적 생존권을 외치는 평택의 저항을 두려워한 경/검은 삼십 구명에 달하는 연행자들을 법적 한도시간인 48시간을 모두 채운 상태에서 석방하였고, 급기야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등 4명에 대해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은 인권활동가들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일체의 법 상식을 무시하는 반인권적 폭거로 규정한다. 형사소송법은 피의자의 구속요건을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와 함께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증거인멸 혹은 도주의 우려가 있는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는 인권운동사랑방과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로서 이미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권단체의 활동가들이다. 또한, 미군기지확장 저지 인권활동가선언에 참여하는 등 토지수용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공개적으로 밝혀왔으며, 3월 15일에는 실정법상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충분히 예상됨에도 토지수용에 반대하는 행동에 떳떳이 나섰던 이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 인권단체들은 이들에게서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를 우려할 하등의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은 검찰 또한 이 같은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또한 최근에는 법무부차원에서도 인권옹호를 위한 수사원칙으로서 불구속수사를 강조하고 있으며, 법원내부에서도 방어권 보장을 위한 불구속 수사 확대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등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옹호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모종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지 않고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인 것이다.

우리 인권단체들은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며, 영장실질심사에 임하는 재판부에 강력히 촉구한다.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등 연행자들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라! 재판부가 불구속수사와 재판의 원칙을 어기고 구시대적 발상을 따라 인권활동가들의 인신을 구속하려 한다면, 우리 인권활동가들은 이 사안을 한국의 인권활동가들과 인권단체들의 존립자체를 부정하는 폭거로 간주하고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투쟁할 것이다. 당신들이 가두려고 하는 것이 비단 물리적인 사람 몇 명이 아니라, 이 땅의 인권이요 평화라는 점을 분명히 각인하기 바란다.


2006년 3월 18일

인권단체연석회의

 

<3월 15일 연행되던 박래군 활동가.. 파란 마스크를 쓰고 저항하고 있는 이가 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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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가 있다

가끔 생각나는 후배가 있다.

요즘들어 더욱 생각나지만...

나는 그 후배랑 한번도 제대로 이야기 해본 적이 없다.

해서 후배라는 말조차 적절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후배의 아버님이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편지 한통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었다.

 

힘겨운 순간, '힘내라'는 그 한마디가 위로가 됨을 알면서도

누가 툭 내뱉어주는 순간 터져버리는 울음을 알기에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 후배가 아버님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려고 내려간다고 한다.

전화를 할까 또 망설이다 그만둔다.

 

차마 입에서 맴돈 한마디,

바람에 실려 전해졌으면 좋겠다.

힘내!

 

나중에 술한잔 나눌 수 있을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것이 못난 나라는 얄팍한 변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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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꽃필라 운동’ 만주와 샤말

두 사람 앞에 서자 고단하다 느꼈던 내 삶은 투정이 되고 만다. 만주와 샤말은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 있어 잊혀지지 않을 ‘영웅’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군가의 말처럼 ‘던져진 삶’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모욕을 견뎌야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서 꿈을 꿀 나이에 16살의 만주는 가족을 위해 홀로 한국에 왔고,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세 개를 잃고도 보상은커녕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길거리로 쫓겨났다. 그가 같은 처지에 놓인 12명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우리도 사람”이라며 1994년 1월부터 벌였던 한 달간의 농성은 우리사회에 이주노동자 실태를 고발하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농성은 산업재해를 입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적용과 보상 실시라는 큰 성과를 일궈냈지만 19살 그는 꿈을 잃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생활-


“한국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어린 그의 투쟁이 우리사회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말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무너진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고 말했다.


살아남기 위해 드러눕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그래서 절망과 공포가 너무 컸을 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의 투쟁에 격려와 지지를 보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때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결심했단다. 앞으론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겠다고.


귀국한 그는 ‘네팔 노동조합 연맹(GEFONT)’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책상뿐이었지만 얼마 후 이주노동자를 위한 상담소가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그는 네팔에 없어서는 안 될 노동운동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고단한 삶은 오늘도 계속된다. 3명의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으로, 장애인으로, 그리고 전통적인 네팔 사회에서 미혼 여성으로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꿈을 꾼다. 아직도 손을 대면 신음이 새어나올 듯한 상처를 딛고 오늘을 살아내는 꿈을.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아동노동을 없애기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로.


네팔 이주노동자 연합 사무국장,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위원장으로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신화’가 되어버린 샤말. 그의 20대 역시 한국의 공사판에서, 공장에서, 신문배달을 위해 오르고 또 올랐던 뒷골목에서 지나갔다. 성실히 정직하게 일했지만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욕설과 모멸이 따라다녔다. 생존을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던 이름 모를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차별과 천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꿈을, 목숨을 잃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투쟁을 시작했던 그는 2004년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이던 중 체포돼 그해 4월 네팔로 강제 추방됐다. 10년 만에 돌아간 고향 땅이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반정부 인사’로의 낙인과 생존과의 전투였다. 자신을 주체하기도 버거웠던 그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일했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고 추방된 또 다른 이주노동자와 함께 살았다. 공부를 가르치고, 직장을 알선해주고, 가족들의 생계를 도와주고. 사람들의 칭찬에 그는 말한다. ‘더불어 사는 것, 손잡는 것일 뿐’이라고. 낮에는 노동운동가로, 밤에는 생계를 위한 직장인으로, 그리고 학생으로 바쁜 삶을 사는 샤말.


-귀국후 네팔 노동운동가로-


그들은 20년 전의 자신들인 어린이 노동자들을 위한 꿈을 꾼다. 어린이 노동자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꽃필라(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꽃을 피우는 운동/KOPILA)’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 이를 위해 네팔의 활동가들은 월급의 5%를 보태고 있다. 오랜 가난과 계속된 내전 속에서 네팔에만 2백50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과 탄광과 거리에서 일한다.


1,000원도 되지 않는 돈을 벌기 위해 하루 14시간의 노동과 학대를 견디면서. “당장 현실을 바꿀 순 없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학교를 통해 꿈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들의 바람처럼 아이들이 꿈꿀 수 있기를, 샤말과 만주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당신 역시 손을 맞잡아 행복해지기길.


<네팔 카트만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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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땅에 남겨진 사람들

<웨스트 파푸아를 다녀와서> 학살의 땅에 남겨진 사람들 선배에게. 예정된 출발이었지만 도망치듯 짐을 꾸렸습니다. 마지막이 될 거란 베니 교수의 작별인사에 ‘꼭 다시 만날 거라’ ‘다시 올 거라’ 말했지만, 정말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그의 조국,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에서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 인물 중 한명이고, 저는 그의 나라를 감싼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혼자만 떠나왔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학살이 판치고 있는 땅에 남겨둔 채. 집회 참여와 사진 촬영을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들의 감시와 노골적인 협박, 그리고 2번의 체포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엄습하는 불안을 ‘설마 외국인을 함부로야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떨치려 애썼고, 머무르는 1주일 내내 작은 소리와 사람들의 몸짓에도 놀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흘린 서러운 눈물 속엔 ‘안도’도 스며있었습니다. 하지만 파푸아인들에겐 저와 같은 탈출구란 없습니다. 죽음은 마치 예정된 순서와도 같고, 공포는 차마 공포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일상적입니다. -공포에 휩싸인 웨스트 파푸아- 유엔과 미국의 공모, 그리고 국제사회의 침묵 속에서 1969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어떤 사람들은 면도칼로 베어져 살해당했고, 어떤 이는 생식기에 뜨거운 철이 넣어져 살해당했다고 했습니다. 살해된 남편과 아버지의 시신을 먹도록 강요당한 가족도 있답니다. 임신부들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에 의해 배가 절개된 채 죽어갔습니다. 독립운동 혐의가 있다며 아들을 잡아가 고문한 것도 모자라 그의 어머니는 배설물이 가득 담긴 컨테이너 안에서 한달을 지내야 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성폭행당한 후 수장됐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소름 돋는 광기가 웨스트 파푸아를 휩쓸고 지나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작전 수행, 독립운동가 색출이라는 미명 하에 군인들이 지나간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화를 피해 산으로 도망을 간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구의 10분의 1이 인도네시아에 의해 학살된 웨스트 파푸아 땅에서, 파푸아인들은 생명을 가진 ‘존엄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전멸시키고 짓밟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파푸아인의 아이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은 최고 수치에 이릅니다. 파푸아인 중 겨우 1%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고, 땅은 인도네시아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훼손되고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무장한 장갑차와 군인이 시내 도로를 질주하고, 항구에 정박한 군함의 화포는 도시를 향합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이해관계 속에서, 국제 시민사회의 무지 속에서 아직도 웨스트 파푸아는 고립돼 있습니다. ‘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 아니 믿음이기보다는 읊조리는 ‘주문’만이, 언젠간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해줄 거라는 희망만이 파푸아인들의 삶을 지탱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가지 말 것을 그랬나봅니다. 항상 도망칠 수 있는 이방인의 입장이었다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헛된 기대 따위는 심어주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의 무뎌짐만을 탓하는 활동가라면, 시선조차 돌리지 말 것을 그랬나봅니다. -국제사회 외면속 오늘도 절망- 조국의 기,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양심수가, 하나님도 외면하시는 듯해 독립운동의 전선에 섰다는 목사님이, 그리고 여대생 미라의 모습이 마음을 붙잡습니다.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미라가 답하더군요. “저는 웨스트 파푸아 사람이고,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두려워도 저에겐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을 위해 소리 높일 책임이 있어요.” 그렇다면 저에겐, 그리고 우리에겐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그 책임은 파푸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황을 잘 모른다는 말로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아직 웨스트 파푸아엔 봄이 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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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③ (끝)

희망과 절망의 '경계' 국가, 동티모르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③ (끝)
식민잔재의 우울함 언어

식민지 잔재의 우울함은 동티모르의 언어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동티모르의 공식어는 떼뚬어(Tetum)와 포르투갈어다. 이는 오랜 기간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자국언어인 떼뚬어 사용이 금지되다보니 언어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한정된 어휘와 정비되지 않은 문법체계로는 정확한 의사전달에 한계가 있어 이를 포르투갈어로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이 되거나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떼뚬어'보다는 포르투갈어 구사능력이 중요하다. 포르투갈어는 동티모르에서 '엘리트 계층'을 상징한다. 식민지 지배전략의 일환으로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어를 동티모르의 공식어로 지정하고 학교는 물론 교회와 지방정부에서도 포르투갈어만을 사용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당시 교육의 수혜를 받은 계층이 한정적이다 보니 이후 이들은 동티모르의 엘리트 계층으로 성장하게 됐다. 또한 인도네시아 통치기간동안 인도네시아 정부가 포르투갈어를 쓰지 못하도록 강요한 바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포르투갈어를 더욱 확산시키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여하튼 이런 영향 때문인지 독립 이후 동티모르의 많은 법제와 양식들이 포르투갈을 본보기로 삼아 정비되고 있고, 이러한 과정은 자국어보다는 '포르투갈어'를 선호하는 풍조를 낳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의 국가, 포르투갈의 유령을 동티모르에 남기고 간 것이다.


희망을 일구는 땅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식민의 잔재와 경제적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의 미래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혹자는 암울한 동티모르의 현실을 보며 "독립은 어찌 보면 인도네시아가 행사하던 권력이 이제 사회 내부의 기득권층에게 이양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던지기도 하지만 독립은 분명 동티모르인들에겐 새로운 '희망'을 의미한다. 적어도 내가 만난 '활동가'들은 그 희망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쉽사리 극복되지 않는 빈곤과 정치적 혼란의 무게 때문에 '독립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라디오 <라캄비아>(RAKAMBIA)에서 일하는 닌도는 "우리는 지금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2살부터 느껴왔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볼 수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닌도는 "사람들이 정치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경제 문제에 대해 토로할 수 있는 것조차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상황으로 인해 학업은 무기한 중단됐지만 그는 지난 4년간 한 푼의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기 위한 방송국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왜 이일을 계속하냐는 질문에 닌도는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닌도에게 독립은 '공포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가족과 젊은 시절을 빼앗겼지만 '정의'가 세워진다면 이 모든 것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독립과 정부 설립 이후 사회재건을 위해 구석구석 해야 할 일이 산적함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를 위한 연대'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인권시민진영의 움직임도 희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티모르의 승리를 통해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들은 지금, 인도네시아의 또 하나의 식민지 웨스트 파푸아의 해방에 자신들의 힘을 쏟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웨스트 파푸아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컨퍼런스를 준비하고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다.

그들의 작지만 끈질긴 힘은 동티모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게 한다. 끊임없는 학살과 침탈이 자행된 땅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투쟁한 역사를 지닌 민중에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으로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극도의 공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계'가 묻어나지 않던 동티모르인들의 선한 눈빛으로부터 그 희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이것이 '희망'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아데우스(안녕)! 동티모르.

사나나 리딩 룸에 게시된 사진들. 동티모르가 헤쳐와야 했던 고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제는 '과거'가 되었지만 지금도 동티모르는 채 완성되지 못한 '과거청산'의 과정 속에서, '사회재건'이라는 과제 속에서 쉼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글쓴이 주]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해방이후 굴절된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새로운 사회와 질서를 꿈꾸는 활동가의 '희망'을 안고 동티모르 여행길에 올랐다. 400년이 넘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이제 독립한 지 6년, 자국 정부 수립 만 3년밖에 안 되는 땅이기에 뭔가 '천지개벽'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자유'가 주어지고, '변화'가 모색되는 땅에, 어쩌면 '국가'라는 씨를 처음으로 뿌리고 있을 땅에, 어떤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는지가 못내 궁금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머리가 아닌 삶으로 공포의 역사를 공유하지 못한 입장에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이방인이란 위치에서, 불과 한달 남짓한 시간을 들여 동티모르를 이해하려 한 것은, '씨앗'을 보고 싶었던 '허황된 꿈'이었다.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공식적' 혹은 '정확한' 정보 역시 제대로 구한 것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의 '오늘'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덤비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일 뿐이다. 정보에 목말라 인터넷을 뒤지고 싶었지만 한 시간에 6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설사 인터넷을 한다고 해도 그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까지 망설임이 길었다. 하지만 이해한 수준만큼, 본 만큼이라도 동티모르에 짙게 그리운 수탈의 역사를 알려야할 것 같다는 욕심은 '감상'과 '단상' 뿐인 서툰 글쓰기를 재촉시켰다. 여행기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행기일 수밖에 없는 글에 대한 부디 넓은 아량과 이해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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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②

아이들과 여성을 덮친 폭력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②
 
참혹한 역사의 최대 피해자, 아이들

열악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현 동티모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아이들이다. 무력침공과 학살의 역사 속에서 아이들은 1차적인 식민의 피해자들이었고, 지금 동티모르의 빈곤은 다시금 아이들을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내몬다.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더위를 감수하며 생선 장수로, 과일 장수로, 그리고 버스 도우미로 나선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가하게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풍경 건너편으로, 1.8 리터 짜리 물병만 들고 아무런 세차도구도 없이 손으로 그들의 차를 세차하는 소년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02년 구성된 정부는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아직까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현실화된다고 해도 하루 한 끼를 챙겨먹는 것조차 버겨운 아이들에겐 어쩌면 학교란 '사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도 방과후에 할 수 있는 '놀이'라곤 공터를 뛰노는 것밖에 없다. 단적인 예로 동티모르엔 단 한 개의 서점도 없다. 서점이 없다는 것은 '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한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뚜뚜 왈라 지역에 위치한 학교 건물 내 외부 모습. 동티모르의 미래가 이 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주거공간은 어른인 나에게도 약간은 '공포스런' 기억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암흑 속에서 밤을 지내야하는 것, 공동으로 세면장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집안에 수도와 전기시설이 없는 것은 그만큼 위생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받아두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물로 몸을 닦고 양치질을 하고, 설거지통과 빨래통은 구분되지 않는다. 생쥐와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벼룩과 이는 사람 몸을 놀이터로 삼는다. 집에서 키우는 맷돼지며 닭 등의 가축들이 집안을 헤집어 놓는 일은 차라리 애교다. 집이라곤 하지만 4면과 지붕을 막아놓은 것이 전부인 집들은 지방과 산간 지역뿐만 아니라 딜리 시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질병발생률은 높은 반면 의료시설(국공립 병원은 무료로 운영된다)과 위생교육은 턱없이 부족하고 '민간요법'에 기댄 치료 등이 계속되다 보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임신여성과 영·유아의 사망률은 독립이후에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딜리 시내 중앙에 위치한 '구스마오 사나나 리딩 룸'. 우리네로 치면 국립도서관 정도에 해당하지만 불과 40여 평 정도밖에 안 되는 협소한 공간에 소장된 책은 불과 몇 백 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소장된 책 역시 '영어'나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것들이 많아 동티모르인들의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는데, 그래도 동티모르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이곳을 방문해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곤 한다.


여성들의 정의 세우기

여성단체가 주장하는 동티모르의 가장 큰 여성문제는 '(특별히 법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의 정의가 부정되는 것'이다. 18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REDE FETO의 우발다는 "가정폭력은 심각한 반면 가정폭력에 대한 규정은 없다"고 설명한다. 현재 동티모르 법원은 동티모르 형법이 제정되기까지 과도기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형법을 차용해 사용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형법은 신체적 폭력과 성적 폭력만을 규정할 뿐 정신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 등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 사건의 경우 여성들이 모든 증거를 제출해야하는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이 현재 제정 과정을 거치고 있는 동티모르 형법에서 보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작성 중인 법안은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물론 의회가 여성단체의 의견을 듣는 어떤 자리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단체들은 어떤 내용으로 법안이 작성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여기에 현재 동티모르의 법원이 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 역시 '부정의'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동티모르는 3심제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현재는 과도적으로 3개의 지방법원과 1개의 고등법원만이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운영되고 있는 법원조차도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인력부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재판을 원할 경우 재판 가능지역으로 옮겨오는 수고를 감수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포기하게 된다. 특히 가정폭력을 '폭력'의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혹은 '여성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법 집행관들의 분위기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사회적 풍조는 사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걸림돌로 작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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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학살의 기억, 빈곤의 현실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아직까지 한번도 기념비나 추모탑을 세워야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기념비나 추모탑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 잔혹한 역사와 죽어간 이들을 기억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비석을 만들고 행사를 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잊지 않는 것'이고 동티모르인들은 삶에서 그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문에 '현답'이 날라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학살지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렇지 않은 곳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만큼 학살이 자행된 땅에서, 학살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찾고자 했음은, 그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비 앞에서 당시의 사건을 기억해내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었음은 이방인의 욕심이었을 뿐이다.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될 듯 했다. 학생운동가로 독립운동을 해왔다는 유리코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이슬람 종교 운동가 안와르도 91년 발생한 '산타 크루즈 대량학살'의 피해자들이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 학살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살해된 세바스티아노 고메스(Sebastiano Gomes)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 크루즈 묘지에 모인 동티모르 평화시위대열에 인도네시아 군대가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최소 250여명 최대 90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서방인 저널리스트의 비디오에 그 참상이 담기면서 당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논리에 갇혀 철저히 외면받던 동티모르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군은 사망자들을 트럭에 실어 바닷가에 내다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집단 매장했다고 한다.

유리코도 안와르도 이 사건을 알리는 흔적하나 세워지지 않았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24년 인도네시아 무력 강점기간 동안 인구의 1/3이 죽어갔지만 그래도 '산타쿠르즈 학살'은 우리네의 광주항쟁쯤으로 인식될만한 '사건'이었기에 '표식'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했던 '산타 크루즈' 묘역에선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넋들이 묻힌 자리를 '찾아가보고 싶다'고 딜리에 도착한 날부터 졸라보았지만 그들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었다. '너무 쉽게 역사의 무게를 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답변은 그제야 '맥'이 잡힌다.

이곳이 학살지임을 알리는 나무 십자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로스팔로스에서 실려 온 사람들은 이 강물에 던져졌다. 어떤 사람들은 차에 갇힌 채 던져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몸에 쇠덩이나 바위를 달아야했다. 학살은 어린아이나 노인, 임산부 등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으며, 사람들은 악어의 먹이가 되거나 산채 수장됐다.


정의 세우기

가슴으로부터 동티모르인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동티모르내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와의 과거청산이며, 식민지 시절 동티모르내의 인도네시아 부역 세력에 대한 청산이다. 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래, 2002년 5월 유엔의 신탁 통치를 거쳐 자국 정부를 갖게 된 이래 전쟁범죄자,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엔의 결정 하에 1999년 9월 인도네시아 내에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가 설립돼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검찰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조무래기들 18명만을 기소하는데 그쳤고, 또한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3년의 유죄를 선고했을 뿐이다. 동티모르 독립 이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99년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이, 딜리지방법원 내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이 설립되긴 했지만 기소된 사람 중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은 끝내 진행되지 못했다. 형식적인 조사와 처벌은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내의 정치, 사회적 지형이 낳은 결과로 동티모르인들이 외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이는 발전도 평화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를 위해서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99년 8월 독립투표를 전후해 인도네시아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동티모르 전역에서는 당시의 파괴행위로 인해 부서진 채 아직도 수리되지 못한 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해왔던 청년들이 사회의 올바른 설립을 꿈꾸며 만든 라디오 <라캄비아>(RAKAMBIA)에서 일하는 닌도는 "인간적으로 용서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책임을 묻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못 밖는다. 그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게릴라가 되어 산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아버지가 독립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로 아버지의 죽음을 인식할 뿐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사라져갔고 그 역시 사물을 인식했던 나이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했다. 하지만 그는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고 한 이웃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이뤄진 뒤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그런 피해자가 손을 내밀어 가해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화해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티모르에 세워진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 '뉴그'는 정의세우기의 이유를 자국으로부터 찾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아직도 자국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들은 정부가 불쌍한 동티모르를 지원한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동티모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인도네시아의 굴절된 역사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는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를 생각해봐라.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 군이 저질렀던 만행이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조사관 '뉴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화해와 진실위원회 건물이다. 위원회는 2005년 7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활동을 종료한다.


수탈의 역사가 남긴 경제적 상흔

'정의세우기'의 발목을 잡는 것이 '경제'라고 할만큼 경제문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티모르의 최대현안이다. 국민들의 체감 실업률이 90%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티모르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한 형편이다. 수도인 딜리에서조차 하루에 1달러를 벌기위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집 인근의 과실나무에서 따왔음직한 과일을 팔러 나온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버스 도우미로 일한다. 해진 뒤 물이 빠진 바다에서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조개를 줍거나 해초를 캐는 일상은 '낭만'이기보다는 '생계'를 위한 전투다. 해방을 맞은 도시는 출퇴근 시간조차 '활기롭기'보다는 '침울'하고, 밤을 맞은 도시는 '침묵'으로 가득 차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같은 느낌마저 준다.

딜리 시내에서 가장 큰 오픈 마켓, 꼬모스 시장. 사람들이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몇가지 종류의 과일과 야채, 가축이 전부다.


40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지배와 24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는 동티모르의 모든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심각한 빈곤을 가져왔다. 커피 등의 주요 작물은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시절에 들어왔던 유럽이나 미국인 '거대' 회사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사람들은 수익을 빼앗긴다. 농부들은 긴 식민지배 하에서 '고리대금'의 방식을 통해 농토를 빼앗기거나 장기간의 피난 생활로 기반을 상실했고, 도시의 대부분 땅과 비옥한 농토는 포르투갈인이나 포르투갈 시대에 관료를 지냈던 사람들, 그리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경제 수탈정책 하에서 제조업이 전혀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세제, 신발 등의 생필품을 비롯한 모든 물자는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동티모르엔 공장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이러다보니 고용은 창출되지 못하는 반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며, 이런 악순환으로 빈곤은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교사 등의 공무원 임금이 한달 평균 120∼150달러인데 비해, 한끼 식사가 3∼5달러에 달하고 펜틴 샴푸가 10달러에 달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사관 및 유엔 직원 등의 외국인이 많이 들어와 있는 도시 딜리는 정확히 외국인 거주지역과 내국인 거주지역으로 양분된다. 경계는 밤이면 더욱 또렷해진다. 전기 수급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이틀에 하루 꼴로 저녁 7시를 전후해 전기가 나가는데, 대사관을 비롯해 대사관 직원 등이 묵는 거주지와 해변가를 따라 위치한 호텔과 레스토랑, 바 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정전사태는커녕 늦은 밤까지 꺼지는 법이 없다. 아직 전기선조차 구비되지 않는 집들이 즐비하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암흑 속에서 밤을 나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전기불은 단순한 불빛이 아닌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상징한다.

단 돈 1달러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지만 정부 역시 빈곤하긴 마찬가지다. 99년 독립 이래 동티모르 정부의 모든 재원은 유엔과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기구, 외국의 무상 원조로 충당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정부 역시 재원마련을 위해 매년 '예산 계획서'를 작성, 제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행히 티모르 해에서 유전이 발견돼 2004년부터 개발에 착수, 2004년 6월부터 2005년 5월까지 1년간 2억 4천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이 발생했다. 이는 동티모르 정부의 한해 예산의 1/4에 달하는 금액이다. 유전 개발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지만, 다른 물적 기반이 전무하고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위기를 탈출하기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유전이 개발 중인 티모르 해 지도. Bayu-uedn의 유전은 2004년부터 개발이 시작됐으며, Greater Sunrise지역의 유전은 '공동수역' 문제로 현재 호주와 협의 중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티모르 정부는 2005년부터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동티모르 노동자 1만 여명의 해외취업을 알선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 발표했다. 실업문제 해소와 우수한 해외 기술의 이전, 노동자의 질 향상 등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국은 바로 한국. 현재 계획에 따르면 올 해 연말까지 200여명의 동모르인들이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년에서 3년간의 기간동안 한국에서 건설현장이나 공장 등에 투입될 전망이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 겪어야할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동티모르에서 '평화캠프'를 준비하고 있는 종교단체 '개척자'의 박윤애 씨는 "이주노동을 희망하는 이들에 대해 정부가 하는 교육이라곤 '무조건 참고 버티기'"라고 말한다. "속된 말로 '첫 타자가 잘하고 와야 다른 동티모르인들에게도 기회가 생기니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아야한다'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동티모르 청년들은 기회에 갈급하고, 생계는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사무실에조차 한달에도 몇 명씩 '일자리가 없냐'고 찾아오는 청년들이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전한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동티모르인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일 수밖에 없다.

한편 심각한 동티모르의 경제적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생산해 낸 값싼 물자, 그리고 식민지배를 통해 익숙해진 인도네시아의 물품들이 동티모르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 인도네시아는 식민지배가 끝난 지금, 동티모르의 최대 무역 수입국으로 자리잡으며 동티모르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가져가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에 나설 경우 동티모르의 경제는 벼랑에 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상황의 역학관계는 정치적, 사회적 부분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해 동티모르를 압박하는 권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경제적 '예속의 질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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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동티모르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동티모르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동티모르는 이미 잊혀진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지배와 억압에 신음하는 웨스트 파푸아와 아체에게는 동티모르 승리의 역사가 커다란 희망이자 자신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동티모르 독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독립을 염원한 수십만 명의 희생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된 국제사회의 연대와 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활동가들은 동티모르의 승리를 기억하며 투쟁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는데 인색한 우리가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할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산타크루즈 묘지.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1년 11월 12일 산타크루즈 묘지 앞에서 평화행진을 하던 동티모르인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했는데, 이 때 약 270여명이 사망하고 약 250명이 실종되었다.


동티모르인들의 계속되는 투쟁

그러나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직까지 동티모르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가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를 침략한 이후 1999년까지 수많은 살인·고문·성폭행·강제실종·불법감금 등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을 저질렀는데도, 아직까지 이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처벌을 위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5월 5일 인도네시아·포르투갈·유엔이 동티모르인들에게 독립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1999년 초부터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이를 막기 위한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의 만행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국민투표가 진행된 1999년 8월 30일을 전후해서는 학살과 재산파괴가 절정에 달했다. 유엔은 1999년 약 1,3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독립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파견된 유엔 직원들도 공격당했다.

유엔은 '동티모르 국제조사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on East Timor)를 임명하고 1999년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는데, 국제조사위원회는 국제법정을 설립하여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인도네시아, 단 한 명만 유죄판결

하지만 유엔은 인도네시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체적으로 1999년 9월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를 설립하여 포괄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임시인권법정'(Indonesia Ad Hoc Human Rights Court on East Timor)을 설립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검찰총장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위로부터 지휘를 받고 움직인 18명만 기소했고,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징역3년의 유죄판결을 확정했다.

한편 동티모르 독립 이후 설립된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1999년 사건 조사를 위해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을, 재판을 위해 딜리지방법원 안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을 설립했다. 중대범죄란 △대량학살(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s) △반인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살인(murder) △성폭행(Sexual offence) △고문(Torture) 등이다. 동시에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를 설립하고 중대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화해를 통해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중대범죄특별법정에 95건, 총 440명이 기소되었는데 이 가운데 339명은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을 진행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군대 서열 6위이며 반인륜범죄를 지휘했던 위란토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지만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어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바우카우에 있는 1999년 파괴된 건물들. 동티모르 여행을 하다보면 1999년 파괴된 건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 진행된 사법절차는 독립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 또는 유엔이 동티모르에 들어온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의실현 측면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의 실제 책임자에 대하여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동티모르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티모르인들, 국제전범재판 요구

동티모르인들과 국제시민사회단체는 유엔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중대범죄사법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며 국제법정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유엔은 올해 2월 18일 '전문가 위원회'(Commission of expert)를 구성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전문가위원회는 5월 26일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동티모르 정부에 대해서는 중대범죄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계속 진행하고 △이에 대해 유엔이 지원하며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정한 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조사와 재판을 다시 진행하라고 권고했다.

또 전문가위원회는 두 정부가 위 권고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엔은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해야 하고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하지 않을 경우 국제형사재판소의 활용가능성을 고려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 및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정부는 유엔의 권고사항을 따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두 정부는 2004년 12월 14일 설립하기로 합의한 '진실과 친선위원회'(Commission of Truth and Friendship)에서 1999년 문제를 일괄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위원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사면을 권고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사실상 지원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한 미국·영국·호주도 인도네시아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1999년 사건에 대한 국제전범재판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높은 비용과 비효율을 형식적인 이유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1999년 동티모르에서 발생한 살해·고문·불법감금, 동티모르인들에게 가해진 집단 살해는 명백히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이고 대량학살이므로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 약 4년 전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1999년 4월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가 수십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던 리키샤(liquica)를 방문해, "가해자 처벌을 통해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말했고, 2004년 11월 9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도록 유엔 회원국들의 협력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2003년 7월 전 인권고등판무관 로빈슨도 '동티모르 1999, 반인륜범죄'라는 보고서에서, "유엔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줄 특별한 책임이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동티모르 국제법정을 설립해야 한다. 안전보장이사회와 사무총장은 이를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리키샤에 있는 교회.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는 1999년 4월 6일 그들의 공격을 피해 이 교회에 숨어 있던 노인, 여성, 아이들 58명을 교회 마당에서 살해했다. 이 때 교회에서 도망간 사람들을 합쳐 총 103명이 살해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동티모르 정부가 더 이상 정의실현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이상 국제전범법정을 설립해 동티모르 내에서의 정의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1999년 이전 범죄도 처벌해야

그리고 1999년 사건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침략 이후부터 자행된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에 대해서도 전범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 헌법에서도 "1974년 4월 25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발생한 반인륜범죄, 대량학살,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국내 또는 국제 법정을 통해 사법조치를 취해야 한다(제160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발전도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동티모르 침략 및 반인륜범죄와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포기할 경우, 보복을 통한 또 다른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25년간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인권침해를 자행했기 때문에 조사와 재판을 통해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로 옮겨간 동티모르 학살자들

그러나 무엇보다 동일한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범재판의 설립은 절실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인권침해를 주도한 군장성들을 승진시켰고 2004년 초 전 동티모르 경찰 간부였던 팀빌 실랜(Timbil Silaen)을 웨스트 파푸아 경찰 간부로 임명했다. 동시에 악명 높았던 동티모르 민병대장 유리코 구테레스(Eurico Guterres)를 와메나(Wamena) 지역에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 두 사람은 1999년에 발생한 동티모르 학살사건에 연루된 자들인데, 동티모르에서 한 것과 똑 같은 반인륜범죄를 웨스트 파푸아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동티모르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이 사실상 면책을 누리는 이상,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동티모르인들이 겪은 고통의 길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5월 29일 발리에서 열린 구스마오와 위란토 회담 직전, 딜리에서 국제전범재판을 요구하며 피고발인들의 사진을 들고 서 있는 동티모르 시민


그래서 동티모르인들은 국제전범법정의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 시민사회단체, 동티모르 내 국제 시민사회단체, 학생조직 등 42개 단체가 '국제전범법정 설립을 위한 동티모르 연대모임'(East Timor National Alliance for an International Tribuanl)을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침공 이후부터 1999년까지 발생한 전쟁범죄 및 반인륜범죄 등에 대한 국제법정 설립을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티모르인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동티모르=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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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고 싶어 라디오 방송국을 차렸다는 유리코의 사무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위치해있습니다. 동티모르 4대 방송국 중 하나라고 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있게 방송국 이름을 외쳐봅니다. 하지만 택시는 한참을 헤맨 뒤에야 락카로 ‘라캄비아(RAKAMBIA)’라고 쓰인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섭니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단층 건물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던진 폭탄 흔적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커다란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고, 창문은 성한 것보다는 깨진 것이 더 많습니다. 방송국 기자재라곤 1평 남짓한 작은 방송실 하나와 문서작업만 되는 컴퓨터 2대가 전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기억하는 탓에 총리의 종교적 신앙마저 그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종교차별해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와르의 사무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 겸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회의공간과 컴퓨터 한대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할 뿐입니다. 빠듯한 단체 운영에 안와르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99년 해방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버려진 건물은 사무실 삼아 아동과 여성인권을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단체도 이들보다는 호사스럽다 느껴질 만큼 열악함에 고개가 흔들어지지만 이들은 국제연대를 꿈꿉니다. 지원받기위한 연대가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연대를. 63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국민의 1/10이 죽어나간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 시간 사용료가 하루 수입에 맞먹을 만큼 비싼 지출을 감수하며 인터넷 방에서 정보를 모으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에서 독립해 정부와 국가를 갖게 된 지 이제 3년. 해서 과거청산부터 사회재건까지 구석구석 해야 할 일엔 끝이 없지만 국제연대를 터부시하진 않습니다. 항상 ‘국외’보다는 ‘국내’사안이 우선이고, 국제연대는 몰라서가 아니라 ‘여력’의 문제라며 뒷전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유리코가 말합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없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고.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을 잃은 닌도가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공포에선 벗어나 있다”고. 그러면서 묻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할 거냐”고.


필리핀 분쟁지역에서 만났던 이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25살의 평화운동가 빙은 “언제든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을 수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빙에게 외부세계의 ‘연대’란 활동의 방패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힘입니다. 거듭된 교전으로 농사지을 땅과 가축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에모다스에게도 ‘연대’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공포에 떨며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었냐”고 절규하더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인권의식이나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발달해있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명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긴 해도 물적, 인적 자원을 쏟아 부으며 긴 호흡으로 이들과 동고동락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권운동’을 해왔다는 저 역시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기 전엔,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기 전엔 ‘조건’만을 탓하며 ‘국제연대’는 특별한 사람, 단체의 몫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제쯤이면 ‘국가’라는 공간을 넘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공포에 어깨를 걸 수 있을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사용해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2005. 7. 22 동티모르 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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