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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2

화물차에서 해뜨는 것을 보며 2시간 남짓 달렸을까?

아포에 들어가는 초입 마을에 도달했다.

이곳의 주요한 교통수단은 말..

아이들도 말을 타고 다녔다.

 

몽골도 이런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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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 1

아포산을 향해 출발했다. 길떠난 시간이 새벽3시..

 

다바오 시내에서 키다파완으로 가는 차를 탔다.

버스라 짐작했었는데 우리가 오른 차는 대형화물트럭 뒷칸이었다.

이곳에서는 큰 화물트럭도 사람이 타는 대중교통일 뿐이다.

 

우기시즌이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자 트럭 승무원들이 천막을 치기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천막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화물칸에 벌러덩 누었다. 그리고 비오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그리고 새벽 달이 눈에 들어왔다.

'삶은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도 이어지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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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지난 4월 26일 밤 12시경 필리핀 마귄다나오(Maguindanao)의 한 마을에서 무장 군인들이 부인과 그의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앞에서 하킴(가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3일 동안 하킴의 온 몸을 꽁꽁 묶고 조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되돌려 보냈다. 물론 군인들은, 체포영장 제시는커녕 체포 이유에 대하여 전혀 고지하지 않았으며, 체포 당일에는 하킴을 고문했다. 같은 날 그 무장군인들은 하킴 집 근처에 있는 두 집에 영장도 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기를 찾는다며 가재도구를 헤집어 놓았다. 사건 내용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피킷에 있는 코코넛 나무. 맨 앞에 있는 나무는 온 몸에 총알 흔적 투성이다. 윗 부분은 폭탄으로 잘려졌다.

그러나, 이곳 피해자들은 동트기 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다. 언제 또 군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은 동네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도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민다나오의 국내 난민들

민다나오 섬은, 1997년·2000·2003년 정부와 이슬람해방전선(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사이의 세 차례 큰 내전을 겪었다. 민다나오 섬에 가면 아직도 전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총알 흔적이 남아 있는 코코넛 나무들과 완전히 전소해 버린 집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만 명의 국내 난민들(In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아래 상자설명 참조)이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2003년에는 약 20만 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투폰(pitoopon)에 있는 난민센터

무고한 이들은 생명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는 친척집으로 피난갔으나, 대다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학교나 관청 마당에 모였다. 몇 개월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부근 빈터에 임시 처소를 짓고 공동생활에 들어갔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선단체에서 식수를 위한 우물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농민인지라, 피난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은 피난 생활 초기에는 교실이 없어 학교에 못 갔고, 계속되는 피난생활 기간 동안에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이 종료 된지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더라도 마땅히 먹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전쟁으로 경작지와 경작에 사용한 동물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도 이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격전지 중 한 곳이던 피킷(Pikit)에서 불발탄이 터져 밭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난민센터이든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하킴의 가족들과 난민센터에서 만난 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나선 사람들

민다나오 섬에 사는 국내 난민들은 난민에 대한 지원과 안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를 통해 그들의 힘(Bakwit power, Bakwit은 따갈로그어로 국내난민을 의미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전쟁 감시 역할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쟁 감시를 위하여 주민들이 '반타이 시스파이어'(Bantay Ceaserifre, 전쟁감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지역 주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과 군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전쟁과 인권침해에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평안하셔야 합니다. 제발…아무 일 없어야 합니다." 하킴 부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민다나오=이상희]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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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산에 오르다

산이 싫었다.

기억속에서 산을 타본 기억이라곤 전경들에 쫒겨 오갈 때가 없었을 때 뿐이었다.

 

99년 처음으로 산에 올랐다.

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과 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산에 오르면서 울고 말았다. 

하지만 산에 오르면서 누군가를 맘속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산을 찾았다.

 

2004년 또 다시 산에 올랐다.  

한번쯤 꼭 오르고 싶은 산이었지만 이젠 '이별'을 고하는 산행이었기에

그 흔한 사진한장 간직하지 못했다.

 

묻어둔 추억들이 너무 많기에 다시는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산을 다시 찾았다.

 

2005년 5월 필리핀의 산에 올랐다.

필리핀에서도 가장 높다는 산에, 가장 험하다는 산에

폭우를 뚫고 3박4일간의 산행을 시도했다.

 

거대한 산을 마주대하면서

길조차 제대로 나있지 않은 무성한 나무와 수풀을 뚫고 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그렇게 정상에 오르고 나서 

산에 대한 두려움과 산을 통해 얻은 인연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감 한자락, 삶에 대한 욕심 한자락을 얻어왔다.

 

그때 그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고난의 산행을 통해 얻은 겸허함과 자신감으로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에도 봄날이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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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미군기지 철수의 땅, 수빅과 클락 방문기
 
"과학자들조차도 사방가도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라며 땅의 심각한 오염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정부에 지역폐쇄와 경고문구 게시를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차는 이미 밀라 '국제 미군기지정화운동 연합'(Alliance for Bases Clean UP International: ABC International) 사무국장이 가리 킨 위험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부터 시작된 인가는 뜀 없이 이어졌다. 10여분쯤 더 달린 후 차는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췄다. 하나 둘, 아이를 안은 엄마들이 집으로 모여들더니 작은 마당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아이는 님플,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육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존말이에요. 간에 문제가 있지요. 이제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자궁질환을 갖고 태어났고, 조지와 에드워드는 각각 11살인데 둘 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의 엄마를 대신해 밀라가 아이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용어로 시작된 설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말로 끝났다.

갑자기 화가 북받쳤다. '왜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미 아이들로써 그 심각한 위험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하지만 화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누구라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 저주받은 땅을. 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애초부터 조금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미군에 의해 저주받은 클락(Clark)의 사방가도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가도는 미군의 기지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클락에서도 환경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 중 하나이며,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에드워드와 그의 엄마. 그의 웃음은 너무 해맑았다.


사방가도의 아이들. 미군이 남긴 재앙이 언제 이들의 웃음을 빼앗아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88년 미군 주둔의 역사

마닐라에서 불과 70∼80킬로미터 떨어진 수빅(Subic)과 클락이 미군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뒤부터. 1880년대까지 스페인 해군의 선박수리소가 있었던 수빅에는 1903년 해군기지(Subic Naval Station)가, 클락에는 1910년 공군기지(Clark Air Base)가 만들어졌다. 1946년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두 기지는 굳건히 유지됐다. 필리핀과 미국은 1947년 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을 체결하고 99년간 무상 기지임대에 합의했다.

하지만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군기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면서부터 철옹성 같던 기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기지협상을 재개하여 임대기간을 25년으로 감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기지 사용과 관련된 보상 문제를 제기해 일정금액의 경제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1991년 필리핀 상원은 미군 기지임대 연장안을 거부했다. 88년 미군기지 주둔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미군은 91년 철수했고, 두 지역에는 기지전환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빅과 클락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미군의 아시아 최대 기지였던 수빅과 클락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과 레저, 경제지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빅과 클락의 재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떠난 기지에 드리운 재앙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수빅 피해자들의 조직 '수빅 자연자원보호 운동본부'(Yamang Kalikasan Aming Pangangalgaan: YAKAP, 아래 수빅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리노는 이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일흔을 넘긴 리노는 1957년부터 미군기지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미군을 위해 일했으며, 괌 기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35년 동안 미군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석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오염됐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이미 결핵 등의 질환으로 고인이 된지 오래다. 마일도 마찬가지다. 미군기지에서 청소일을 했다는 마일은 "쓰레기를 치우다가 (화학물질 냄새에) 여러 번 기절했습니다. 관리인은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 저는 계속 몸이 안 좋았지만 직장을 잃을까봐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폐암을 선고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리노. 그는 수빅 미군기지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다.


마일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산다고 했다. 폐는 물론 심장과 혈액에도 이상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재앙은 수빅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했던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리고 미군 철수 이후 기지로 사용됐던 건물들이 공장 등으로 임대되면서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제이슨(8)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제이슨의 아빠는 해군기지에서 일했으며, 엄마는 미군철수 이후 핸드폰 조립 공장으로 임대된 미군건물에서 3년간 일했다. 그때 잉태된 제이슨은 생후 3살 이후부터 백혈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했던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유산했으며, 한 명은 제이슨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낳았다. 회사에 책임을 묻기도 했지만 사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

6개월에 한번씩 수혈받아야 한다는 제이슨은 "내가 더 아파지는 거냐"고 묻는다고 한다. 제이슨의 다른 다섯 형제들 역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거나 잦은 두통을 호소한다고 한다.


조지(가명)는 24년 동안 미군의 무기공장에서 '무기재료'를 만드는 일을 했다. 본인은 신장에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때 낳은 두 자녀 모두 심각한 뇌성소아마비를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은 혼자 힘으로는 몸을 뒤집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하수구멍을 통해 오염된 물이 미군기지 안에서 하천과 바다로 무단 방류됐다.


'미군기지정화 민중운동본부'(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 PTFBC) 필리핀 대표인 부기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과 전문적인 조사인력 확보의 한계, 게다가 미군이 정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염물질을 바다와 강 등으로 방류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상황을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미군기지 노동자로 일하면서 화학물질 오염으로 숨을 거둔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95년 수빅 관리청이 투자유치를 위해 수빅 44개 지역에 대해 실시한 환경조사에 따르면, 사격연습장·병원소각장 등 11개 지역에서 오염물질이 검출됐다.


화산폭발로 미군기지에서 생활…최대 피해자는 아이들

클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991년 6월 클락 미군기지 인근에 있던 피니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존의 터전에서 내몰린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기지 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클락 공군기지 본부로 사용됐던 캅콤(Clark Air Base Command: COBCOM)에만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로 사용됐던 땅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가꾸고,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면서 2년에서 5년가량 생활했다. 가끔 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이물질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이 절박했던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산폭발로 캅콤에 이주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씻기 위해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온 가족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물 때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손자는 뇌성소아마비를 앓고 있고, 저 역시 피부병과 두통, 위장장애 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클락 피해자들의 가족을 위한 공동행동'(Sama-Samanhg Aksyon at Ugnayan ng Mga Pamilyan ng Biktima: SAUP, 아래 클락 공동행동) 사무실에서 만난 노마가 말했다. 노마는 "캅콤에서 나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물이 오염됐으며 이로 인해 저희 가족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질환을 앓거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저는 단지 평화로운 생활을 원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캅콤에 거주했던 다른 이들의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다. 케빈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 11살인데도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아 6∼7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미 케빈의 동생은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았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라베스 역시 독극물에 의한 오염으로 인해 뇌성소아마비와 백혈병을 앓고 있다.

노마와 그의 손자. 노마는 사람들이 클락을 잊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꼭 다시 만나자"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케빈은 혼자 힘으로는 혼자서는 물조차 마실 수 없다. 그래서 케빈의 엄마는 24시간 그의 옆에서 떠나지 못한다.



정부 독극물 오염 확인…보상과 복구는 전무

상황의 참혹함은 이미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96년 캐나다 병리역학 전문의인 로살리 베르텔 등 독극물 전문가들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클락 공군지기 인근 13개 지역에 거주중인 여성 761명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독극물에 감염된 상태였다. 특히 캅콤에 거주했던 여성들 가운데 당시 임신을 했거나 아이들이 있었던 경우에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병, 암 등의 질환을 보였다.

이후 진행된 다른 조사에서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중추신경 마비, 선천성 심장병 그리고 언어장애 등 희귀병에 걸려 있음이 확인됐다. 환경오염 문제가 붉어지면서 클락 개발공사 역시 우물과 지하수 수질 검사와 토양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폴리염화비페닐 등이 검출됐으며, 14개 지역이 폐쇄되거나 개발이 보류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치료와 배상은 물론이고 환경오염지역에 대한 복구 정화작업 역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이 철수한 클락 캅콤에 많은 재원을 들여 엑스포공원을 건설했다. 하지만 부서진 미군 건물 등에서 끝없이 날리고 있는 석면 등의 화학물질과 토양에 스며든 오염물질의 악취 등으로 인해 엑스포 공원은 개장 후 바로 문을 닫았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몇 명의 아이들이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이 우물은 99년 필리핀 정부가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 곳이다.


여전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오염된 땅에서 밭을 갈고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바로 인근에는 대규모 한국 농산물 작물 단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야채와 과일 등은 필리핀 각처의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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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사용해달라"

[아시아 민중의 인권현장]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사용해달라"
인도네시아의 또 하나의 식민지, 웨스트 파푸아의 외침
 
"내용만큼이나 그녀의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청중 중 한명이 도나(Donna, 웨스타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의 활동가)에게 발제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 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저기서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영어를 잘못해서 혹시라도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는 도나의 떨리는 목소리 위로 2005년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삶의 흔적이 드리워졌다.

회의가 열리고 있는 장면. 왼쪽에 걸려있는 것이 웨스트 파푸아의 기 ‘모닝 스타’다.


참혹한 땅 웨스트 파푸아, 인도네시아 자국 군에 살인과 협박 면허 부여

우리에겐 그저 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 정도로 알려져 있는, 지도에서조차 그 국명을 잃어버리고 인도네시아 령으로 표기된 웨스트 파푸아는 19세기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거쳐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땅이다. 웨스트 파푸아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40년에 걸친 독립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5번째 국제회의가 2005년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대학교(Universty of Phillippines, UP대학)에서 열렸다. 아시아와 태평양 인근 국가 등 과거 식민상태를 경험했거나 이 국가들의 독립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는 15개국(동티모르, 아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영국, 아이슬란드 등)에서 40여명의 인권 활동가들이 참석한 이 국제회의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필리핀 정부와 필리핀 대학교 등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4일 내내 팽팽한 긴장과 보안 속에서 치러졌다.

국제회의는 15개국에서 4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국제 연대는 작은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정' 속에서 시작됐다. 웨스트 파푸아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필리핀으로 날아온 베니(Benny)는 "인도네시아는 대규모의 이주정책과 발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웨스트 파푸아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으며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들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인도네시아 군과 경찰은 파푸아인에 대한 살인과 협박, 납치 면허를 가진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다"고 웨스트 파푸아의 상황을 설명했다. 도나는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과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소개했다. 도나는 "보건의료와 법, 경제적, 사회적인 면 등 모든 일상에서 위기가 발생하며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매해 1600여명 이상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의료서비스가 부족해 죽어가고 있으며, 아이들은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또한 일상적인 강간과 납치 등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며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했다.


논쟁보다는 '실천'에 무게 둔 국제회의

두개의 기조발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곧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몇 시간에 걸쳐 쏟아져 나왔다. 장시간에 걸친 회의였음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는 진중함 속에서 참석자들은 논쟁보다는 구체적 실천을, 거대한 계획보다는 가능하고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논의했다. 이것은 동티모로의 독립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동티모르를 위한 아시아태평양 연대회의(Asia-Pacific Conference for East Timor, APCET)'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그들이 터득한 '운동의 지혜'였다. 또한 현재 식민지 상태 혹은 수탈을 겪고 있는 민중이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왔던 활동을 토양으로 한 '고민'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진지했다. 참석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제안했다.


3일간의 회의를 통해 참석자들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인근 국가들의 인권침해에 종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아시아태평양연대회의(Asia Pacific Solidarity of Coalition, APSOC) 결성을 결의했다. 또한 '웨스트 파푸아를 위한 국제연대 준비위원회(Steering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Meeting on West Papua)'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캠페인의 시작을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과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를 근절하는 것이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참석자들은 웨스트 파푸아를 점령하고 살해와 고문, 강간 등 참혹한 인권침해를 일삼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의 전원 철수를 주장했다. 또한 웨스트 파푸아의 정치적 수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국가와 집에서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원과 국제적 법률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참석자들의 목소리다. 참석자들은 12월 1일을 '웨스트 파푸아 국제연대의 날'로 정하고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인권침해 사례와 증거 수집, 교육자료 편찬, 이슬람사회와 국제사회에 대한 로비 및 연대 활동 등을 강화해나갈 것이다.


결연한 고백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63년 인도네시아의 점령이래 인구의 10%가 살해되고 매일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다시금 인지하고 참석자들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금 핍박받는 땅, 웨스트 파푸아로 돌아가야 하는 베니와 도나에 대한 걱정은 참석자들 모두에게 묵직한 무게였다. 이미 자카르타 공항에서 인도네시아 공안경찰이 혐의를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베니가 조만간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다행히 베니와 도나는 아직까지는 건재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웨스트 파푸아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그런 나를 바꾸었고, 나는 이번 회의를 통해 매우 큰 힘을 받았습니다. 회의 결정에 따라 나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세계의 무관심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수탈의 역사를 살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는 말한다.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데 사용해달라(Please us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또한 한국 사회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한다. "그것은 오직 당신(한국민중)만이 알며, 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하라고(Only you know. Please now do what you can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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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겐 독립"

[인터뷰] "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겐 독립"
도나(웨스타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 활동가)
 
도나-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는 웨스트 파푸아 활동가. 안전을 위해 얼굴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제5차 국제회의가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두명의 웨스트 파푸아 활동가들이 참석해 웨스트 파푸아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그 가운데 한 명인 도나를 인터뷰했다.

도나는 파란색이 좋다고 했다. 그 색이 자신에겐 '희망'을 상징한다며.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는 도나는 그저 자신을 평범한 '웨스트 파푸아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했다.


◎ 당신이 하는 일과 당신의 조직을 설명해달라

나는 웨스트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Association for the Empowerment of Papuan Women and Children)의 활동가다. 우리는 여성과 아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일하며 특히 독립을 위해 일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여성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웨스트 파푸아인으로서의 '자기결정권'을 갖기 위한 교육의 시행을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내 나라가 독립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해갈 수만은 없다.

◎ 지금 웨스트 파푸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성과 아이들이며, 그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자신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또한 자기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파푸아인이 계속해서 사라져가고 있다(파푸아인의 인구증가율은 0.3∼1.5%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에 의한 학살과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인해 파푸아인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만약 여성과 아이들을 계속 잃는다면 우리는 다시 그것들을 찾을 수 없다.

◎ 당신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립을 한다고 해도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여성과 아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자유롭게 모든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면, 좋은 건강을 가질 수 있고, 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겐 독립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여성과 아동의 문제도 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웨스트 파푸아 문제와 관련해 한국사회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가?

이미 발제 때도 언급했다. 제발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데 사용해달라고. 파푸아의 상황과 문제에 대해 고민해라. 그리고 한국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해라.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한국 사회만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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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

[해설] 또 하나의 동티모르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
수탈의 역사와 독립 투쟁을 중심으로
 
1. 빼앗긴 웨스트 파푸아

1883년부터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뉴기니아 섬을 두고 쟁탈전에 들어가는데, 네덜란드가 섬의 서쪽 지역을, 영국이 섬의 북동부를, 독일이 남동부를 차지하게 된다. 섬의 동쪽 지역은 1975년 '파푸아 뉴기니'로 독립 하지만, 섬의 서쪽 지역은 계속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다. 네덜란드는 1952년 유엔헌장 73조에 따라 파푸아인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탈식민지화 과정을 거쳐 독립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한다. 이에 대해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동인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한다는 헤이그 협약에 따라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헤이그 협약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에 이양할 동인도 중 웨스트 파푸아는 제외되었고,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구를 거절한다. 뉴기니아 섬의 서쪽 지역은 독립을 준비하며, 1961년 12월 1일 나라 이름을 '웨스트 파푸아'로, 나라의 상징인 국기를 '모닝 스타(morning star)'로 정하고 의회를 창설한다.

회색으로 표시된 인도네시아 영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 웨스트 파푸아. 동쪽으로 노랗게 표시된 지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파푸아 뉴기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군사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하려 했고, 미국이 적극 인도네시아를 지원한다. 미국은 1950년대 수마트라와 북 술라웨시(North Sulawesi)에서 발생한 지역봉기를 지지하여 인도네시아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인도네시아가 소련과 동유럽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자 인도네시아와의 관계회복을 원했던 것이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은 당시 네덜란드 외무장관에게, 인도네시아를 달래지 않으면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므로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하기 전 일정 기간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결국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는 1962년 8월 15일 뉴욕협정을 체결한다(1962년 9월 21일 유엔 사무총장 비준). 그 내용은, 네덜란드가 그해 10월 1일 권력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에 이관하고,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인도네시아에 권력을 이관하며(1963년 5월 1일 이관), 6년 안에 자유롭고 공정한 방법으로 독립 또는 인도네시아 지배 여부에 대한 의사를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 물어 보자는 것이다. 위 협정에는 웨스트 파푸아 성인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관이 웨스트 파푸아인의 80%-90%가 독립을 원한다고 보고하자, 미국은 유엔에게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방안 모색을 요청한다. 유엔은 그 요청대로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선발한 1022명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인도네시아 군인은 이들에게 '우리는 (독립이 아니라) 인도네시아를 원한다(I WANT INDONESIA)'에 투표할 것을 강제하고, 이에 반대할 경우 헬리콥터에 태운 뒤 떨어뜨리겠다고 협박한다. 1969년 8월 2일 투표 결과 인도네시아 지배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이와 같이 웨스트 파푸아는, 자신들의 자결권을 행사할 겨를도 없이 미국과 유엔의 각본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 유엔사무부총장이었던 나라심한(C.U. Narasimhan)은 4년 전 "그 투표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 당시 유엔은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 누구도, 웨스트 파푸아인 100만명의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2. 인도네시아 식민지 지배

1) 공동체, 문화 파괴

웨스트 파푸아는 240여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족마다 언어와 문화를 가진, 세계 문화적으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1963년 5월 1일 웨스트 파푸아를 지배한 뒤 '개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면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침투시키고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강요했다. 인도네시아는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 문화, 종교 등이 기재된 책을 금지했고, 그들의 축제나 경제 관행들을 모두 금지했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인도네시아 내 인구밀집 지역에 있는 주민들을 웨스트 파푸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고, 군인들은 웨스트 파푸아 고원 지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마을을 불태우거나, 원주민들을 살해하거나 숲으로 내쫓고 있다. 강제이주정책은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문화를 파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 원주민 비율은 25%에 불과하다.

2) 인권침해

군대는 웨스트 파푸아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법 벌목, 상권보호, 보호야생동물 밀매 등을 통해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 그리하여 군대는 고의로 지역문제에 개입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력을 유발하는 등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현재 군경 병력은 1만 5천에서 2만명이나 된다). 또한 과도한 군경의 투입은 체계적이고도 구조적으로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평화적인 저항수단으로 독립의 상징인 모닝 스타(morning star) 국기를 게양하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수한 사건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8년 비아크(biak) 섬에서 평화적으로 모닝 스타 국기를 게양하려는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8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2004년 12월 1일 자야뿌라 외곽인 아베뿌라에서도 국기 게양식을 위해 모인 사람들 향해 발포하고 국기를 밟아 찢어버렸다.

2000년 12월 7일에는 신원불상자가 자야뿌라 경찰서에 공격을 하여 경찰 1명이 사망했는데, 인도네시아 경찰은 독립운동을 활발히 진행하는 고원 지역 출신 학생들의 기숙사를 급습하여 그들을 체포한 뒤 고문을 하여 2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2004년 10월 인도네시아 군대의 폭격을 피해 숲으로 피난간 주민들이, 식량과 추위를 막을 옷이 부족하여 53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점령한 1963년부터 지금까지 웨스트 파푸아인 10만명(전체 인구의 10%)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망사건에 책임이 있는 군인과 경찰들은 사실상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파푸아인들의 저항. 뒤에 보이는 국기가 모닝스타. [출처] www.westpapua.ca


한편, 웨스트 파푸아 독립을 위한 정치토론이나 모닝 스타 게양식 참여 등은 반란죄나 국가 모독죄에 해당한다. 앰네스티 미국지부가 2005년 2월 1일 발표한 성명서에 의하면, 1998년 후반부터 독립 운동을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인이 최소 72명이라고 한다.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의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하다. 인도네시아 인구 정책에 따라, 여성들은 피임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성의 몸에서 피임기구를 빼줘야 하는 영구 피임의 경우, 의료진이 이를 제거할 줄 몰라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군경에 의한 강간 사건도 많이 발생한다. 학교에 난입한 군인들이 어린 소녀들을 끌고나가 강간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3) 자원수탈

웨스트 파푸아에는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세계에서 구리, 금광으로 가장 큰 회사인 프리 포트(Freeport)는 인도네시아 군대의 도움으로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영국 회사인 브리티쉬 페트롤리움(British Petroleum)은 2005년 3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북쪽에 있는 빈투니 베이(Bintuni Bay)에서 천연가스를 개발할 권리를 인가 받았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보존되어 있는 다우림 중 하나가 웨스트 파푸아에 있는데, 인도네시아 군부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벌목 회사들이 빠른 속도로 이 지역에서 벌목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대는 이들 기업의 안전을 위하여 일부러 분쟁을 조장한 후 그 지역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3.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계속되는 생존권 위협에 저항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왔으나, 인도네시아는 그들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1960년대는 파푸아 독립운동(FPM, free papua movement)을 결성하고, 낡은 총과 창, 활, 화살, 도끼 등을 이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확고한 지배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 이상으로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였는데, 1963년부터 1969년 8월 이른바 국민투표가 있기 전까지 6년 동안 인도네시아 정부 때문에 사망한 웨스트 파푸아인이 약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약 2만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2000년 자야뿌라에 모여 의회를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과 대화를 시도하며 외부에 웨스트 파푸아 문제를 전파하기로 하였으나, 인도네시아 군대는 2001년 11월 의장인 데이스 엘루이(Theys Eluay)를 살해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웨스트 파푸아가 평화로운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들의 열망을 짓밟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당신들의 자유를 보태달라(Giv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파푸아 아이들의 미소가 위기에 처해 있다. [출처] www.westpapu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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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다

 

 

살다보니 "잘 지내세요?"라는 그 평범한 질문마저도 아주 특별해지는 순간이 있다. 너무도 일상적인 인사에 망설임을 느낄 때, 삶은 다른 모습으로 옆에 서 있다. 필리핀에 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었으면서도 과연 무엇을 말하고 물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혹여 우리의 방문조차 지난 상처를 헤집는 잔인한 행동이 될까 두려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못 만날 인연’이란 말로 주저하는 길동무를 설득시키고 함께 약속장소로 향하던 그 길은 왜 그리도 아득하던지.


“하이(Hi)” 긴 생머리에 환한 미소를 가진 여성이 내 길동무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동안 헤어진 친구들이 다시 만난 것처럼 3년 만에 사건 의뢰인과 소송을 도와주었던 이가 필리핀 땅에서 만났다.


길동무와 에미(가명. 28)가 처음 만난 건 지난 2002년 여름. 에미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중개인의 말을 믿고 예술흥행비자(E-6)를 발급받아 다른 필리핀 여성 10명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고단한 삶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성매매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확언과 가난을 탈출할 발판이 될 수 있을 임금보장을 약속받은 터라 클럽 무용수로 일하는 모욕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거라 믿었다. 한국 땅에 도착해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뺏기고,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돼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는 방에 갇힌 다음은 이미 늦은 뒤였다. 동두천에서 그렇게 석달을 살았다. 브래지어와 짧은 미니스커트만 입혀져 손님 테이블에 앉혀지고 매일 할당량의 매상을 올려야만 했다. 이를 채우지 못하는 날엔 한없이 무대에 서 있는 벌을 받아야했다. 잠시 앉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의자가 날라 오거나 욕설과 뭇매가 쏟아졌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 울부짖었지만 손님방에 들여보내져 윤락행위를 강요당했다. 학비를 마련할 욕심에 나이를 속여 한배를 탔던 16살의 필리핀 소녀 아마도 더러운 밤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렇게 한국은 잔인한 땅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런 정황이 필리핀 대사관에 알려져 구조되긴 했지만 억울함을 채 토해내기도 전에 윤락행위방지법 위반으로 강제추방됐다. 대사관과 길동무 등의 도움을 받아 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600만원의 피해보상 판결을 받아내긴 했지만 승소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월급은 고사하고 10원짜리 동전 하나 받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땅에서 호텔 밴드로 일하면서 에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을 제외하곤 한국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공간이다.


이를 모르지 않기에 길동무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몇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지옥으로 보낸 이에게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있는 법정의 현실 앞에서, 그렇게 착취된 돈이 다른 사람 명의로 둔갑돼 집행조차 불가능한 ‘법’ 앞에서, 길동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양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법이 바뀌고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피해 외국인 여성이 소송이 끝날 때까지 적절한 보호 속에서 국내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되었다. 하지만 피해여성이 직접 피해를 입증해야하거나 혹자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그림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현실을 정의롭게 바꾸지 못하는 법이, 재판은 서류가 아닌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서로에게 작은 위로나마 될 수 있었을까?


이주노동자란 이유로, 혹은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월평균 70만원(여성부 2004년 실태조사)의 임금을 주고 휴일도 없이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 성매매를 강요하는 업주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개비’와 불안전한 신분을 볼모로 행해지는 성매매가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그래도 세상 좋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


힘들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기에 웃을 수 있다는 에미의 환송에 이별을 고했다. 재판당시에는 피해를 지켜볼 수밖에 없음에 마음이 무너졌는데, 지금은 에미의 딸들에게 대물림될 가난과 제2, 제3의 에미를 매일 만나면서도 달라질 줄 모르는 암담한 현실에 더 큰 방관자가 된 것 같다는 길동무의 씁쓸한 고백을 안고. 오늘도 발걸음이 무겁다.


2005. 5. 13 필리핀 퀘존시티에서

 

<현재 에미가 살고 있는 집>


 

<에미네 집 거실에 놓여져 있는 신랑 각시 인형.. 그렇게 행복하게 에미가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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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따따와 아베

 


“따따, 그건 안 된다니까” 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30분 째 타갈로그어(필리핀의 국어)와 영어, 그리고 바디 랭귀지까지 총 동원해 얘길 해보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다. 서점에 책을 같이 사러가기로 한 약속을 앞두고 따따는 내게 하숙집 주인장에게 자신을 데려가겠다고 얘기해달라고 말하고 있고,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따가 직접 주인장에게 가서 영어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사러 나갔다 오겠다고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따는 흔쾌히 ‘오케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한 지, 아님 자신의 생각이 아직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일어설 기미가 없다. 결국 따따가 먼저 운을 떼고 내가 거들기로 한 선에서 얘기는 마무리 됐지만, 우리는 결국 그날 서점에 같이 가지 못했다.

 

어쩜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따따에게 하라고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따따는 필리핀에서 내가 거처하고 있는 하숙집에 고용된 핼퍼. 말이 좋아 가정 도우미지 우리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식모와 다름없다. 아니 더 아득한 존재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곤 하루 24시간이 모두 차압된 대기조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더 없이 친근한 관계처럼 보이다가도 주인장이 종이라도 흔들어 될 때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런 따따에게 휴일도 아닌 평일 오후에, 학습교재를 사기 위해 서점에 다녀오겠노라고 말하라고 했으니, 주인장의 힐난이 두렵고 월급 깎일 걱정부터 드는 것이 당연하다. 


생면부지의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해 마음이 산란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한달 째로 접어든 필리핀 생활은 이제 적응 단계를 넘어 이곳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처럼 보이고, 타갈로그어가 한국말처럼 들리는 환청에 빠져 살 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정붙이기 어려운 것은 필리핀에 짙게 드리운 가난과 가난의 그림자 같은 핼퍼(필리핀의 ‘가정 도우미’)의 존재다.


서울 떠나오기 전 ‘필리핀 핼퍼’에 대해 얼핏 들어보긴 했지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타국 생활에서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 바로 이 핼퍼다. 우리네로 방 세칸짜리 집에 살 정도쯤이면 자가, 전세를 가리지 않고 한집 살이를 하는 핼퍼 한두 명쯤 두는 것은 여기선 매우 자연스럽다. 해서 그 거대한 수에 놀라고 상이한 문화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핼퍼들의 고달픈 인생살이와 더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핼퍼와의 관계에선 ‘주인’이 되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웃기도 잘 웃고, 장난도 잘 치는 내 하숙집 핼퍼 따따는 전형적인 필리핀 농부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 꿈은 간호사가 되는 것. 여전히 따따는 그 꿈을 먹고 산다. 하지만 가난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따따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에 남의 집 살이를 시작했다. 올해로 25살이 되었으니 벌써 8년 전이다. 틈이 날 때마다 지금이라도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보지만 대화는 꼬리를 잇지 못한다. 필리핀 교사의 1/10밖에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한달 월급의 절반을 학비로 덜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고작 8시간 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간을 모두 학교에 반납해야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는 일요일만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매일 남자친구인 ‘준준’이 그립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돈 많은 새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단다.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준준의 벌이로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따의 진담 섞인 농담 앞에서 ‘노’라며 단호하게 엑스자를 그린다. 하지만 말과 맘은 정반대로 향한다. 아무리 바지런히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면, 3살짜리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남의 집 핼퍼 생활을 하고 있는 미혼모에게 눈먼 ‘행운’이라도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따의 고된 삶도 앞집 핼퍼인 아베에 비하면 복에 겨운 편이 되고 만다. 때로 따따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고, 똥배짱을 튕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베는 끼니조차 거르는 일이 다반사다. 집주인의 잦은 출장 때문이다. 물론 길나서는 집주인이 일정한 돈을 식비로 챙겨준다고는 하지만 하루 두 끼를 겨우 해결 할 수 있는 액수밖에 되지 않는다. 월급도 따따의 절반 수준이다. 슬쩍 방문해 본 아베의 집은 무섭기만 했다. 아베의 방엔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30도를 오르내리는 필리핀의 더운 날씨에 냉장고 코드는 뽑혀 있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집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곤 약간의 쌀과 아베가 저녁거리로 사온 생선 한 마리뿐. 4년 동안 한달에 절반이상을 배고픔과 어두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아베는 그만 둘 엄두는커녕 불평 한마디 뱉어내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아둔하다는 사람들의 말 때문만은 아니다. 10년의 핼퍼 생활을 통해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문턱을 겨우 넘은 그에겐 돌아갈 곳도, 잠시라도 쉬어갈 안식처가 없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아무런 꿈도 없다고 말하는 그의 바램은 단지 7년 전 남편이 데리고 떠나버린 아이를 한번이라도 보는 것. 무표정함이 얼굴이 되어버린 아베의 나이는 이제 겨우 27살이다.


가난은 이렇듯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비집고 찾아들고,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만든다.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고, ‘노예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의 눈망울에 절망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아직 핼퍼에 대해 고민하는 이 하나 만나지 못했다. 게으름과 짧은 영어실력이 그 연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계전선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16세미만의 아동 중 1/6이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보다 여행객들을 향해 돈을 구걸하거나 시장거리에서 전대를 찬 아이들을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핼퍼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를 찾는 것은 이 나라를 뜰 때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할지조차 모를 암담한 현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친구가 되는 것뿐이다. 따따와 남자친구의 담장 데이트를 위해 보초를 서고, 아베와 같이 식사를 하기위해 주인장에게 어떤 핑계를 될까를 궁리하는 것뿐이다. 말도 안되는 타갈로그어와 영어, 그도 모자라 한국어와 바디 랭귀지를 총 동원해 수다를 떨고, 가끔 산책에 나설 때면 손을 맞잡는 것뿐이다. 풀이 잔뜩 죽은 따따의 얼굴 위로, 올 이 없음을 알면서도 집 앞 버섯바위에서 일어서 줄 모르는 아베의 기다림 위로, 오늘도 필리핀 다바오의 밤은 깊어간다. 헤아려지지 않는 핼퍼들의 고단한 삶을 밟고.


2005. 4. 8 필리핀의 다바오 시티에서.

 

<따따의 사촌 집 앞에서. 해맑은 웃음을 가진 처자가 바로 따따>

 

 

<모처럼의 외출에 아베는 한껏 멋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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