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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절망의 '경계' 국가, 동티모르 | ||||||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③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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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여성을 덮친 폭력 | |||||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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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역사의 최대 피해자, 아이들 열악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현 동티모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아이들이다. 무력침공과 학살의 역사 속에서 아이들은 1차적인 식민의 피해자들이었고, 지금 동티모르의 빈곤은 다시금 아이들을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내몬다.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더위를 감수하며 생선 장수로, 과일 장수로, 그리고 버스 도우미로 나선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가하게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풍경 건너편으로, 1.8 리터 짜리 물병만 들고 아무런 세차도구도 없이 손으로 그들의 차를 세차하는 소년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02년 구성된 정부는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아직까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현실화된다고 해도 하루 한 끼를 챙겨먹는 것조차 버겨운 아이들에겐 어쩌면 학교란 '사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도 방과후에 할 수 있는 '놀이'라곤 공터를 뛰노는 것밖에 없다. 단적인 예로 동티모르엔 단 한 개의 서점도 없다. 서점이 없다는 것은 '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한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거공간은 어른인 나에게도 약간은 '공포스런' 기억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암흑 속에서 밤을 지내야하는 것, 공동으로 세면장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집안에 수도와 전기시설이 없는 것은 그만큼 위생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받아두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물로 몸을 닦고 양치질을 하고, 설거지통과 빨래통은 구분되지 않는다. 생쥐와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벼룩과 이는 사람 몸을 놀이터로 삼는다. 집에서 키우는 맷돼지며 닭 등의 가축들이 집안을 헤집어 놓는 일은 차라리 애교다. 집이라곤 하지만 4면과 지붕을 막아놓은 것이 전부인 집들은 지방과 산간 지역뿐만 아니라 딜리 시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질병발생률은 높은 반면 의료시설(국공립 병원은 무료로 운영된다)과 위생교육은 턱없이 부족하고 '민간요법'에 기댄 치료 등이 계속되다 보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임신여성과 영·유아의 사망률은 독립이후에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성들의 정의 세우기 여성단체가 주장하는 동티모르의 가장 큰 여성문제는 '(특별히 법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의 정의가 부정되는 것'이다. 18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REDE FETO의 우발다는 "가정폭력은 심각한 반면 가정폭력에 대한 규정은 없다"고 설명한다. 현재 동티모르 법원은 동티모르 형법이 제정되기까지 과도기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형법을 차용해 사용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형법은 신체적 폭력과 성적 폭력만을 규정할 뿐 정신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 등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 사건의 경우 여성들이 모든 증거를 제출해야하는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이 현재 제정 과정을 거치고 있는 동티모르 형법에서 보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작성 중인 법안은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물론 의회가 여성단체의 의견을 듣는 어떤 자리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단체들은 어떤 내용으로 법안이 작성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여기에 현재 동티모르의 법원이 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 역시 '부정의'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동티모르는 3심제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현재는 과도적으로 3개의 지방법원과 1개의 고등법원만이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운영되고 있는 법원조차도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인력부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재판을 원할 경우 재판 가능지역으로 옮겨오는 수고를 감수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포기하게 된다. 특히 가정폭력을 '폭력'의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혹은 '여성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법 집행관들의 분위기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사회적 풍조는 사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걸림돌로 작용된다. |
학살의 기억, 빈곤의 현실 | ||||||||||||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 ||||||||||||
"아직까지 한번도 기념비나 추모탑을 세워야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기념비나 추모탑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 잔혹한 역사와 죽어간 이들을 기억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비석을 만들고 행사를 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잊지 않는 것'이고 동티모르인들은 삶에서 그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문에 '현답'이 날라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학살지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렇지 않은 곳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만큼 학살이 자행된 땅에서, 학살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찾고자 했음은, 그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비 앞에서 당시의 사건을 기억해내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었음은 이방인의 욕심이었을 뿐이다.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될 듯 했다. 학생운동가로 독립운동을 해왔다는 유리코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이슬람 종교 운동가 안와르도 91년 발생한 '산타 크루즈 대량학살'의 피해자들이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 학살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살해된 세바스티아노 고메스(Sebastiano Gomes)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 크루즈 묘지에 모인 동티모르 평화시위대열에 인도네시아 군대가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최소 250여명 최대 90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서방인 저널리스트의 비디오에 그 참상이 담기면서 당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논리에 갇혀 철저히 외면받던 동티모르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군은 사망자들을 트럭에 실어 바닷가에 내다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집단 매장했다고 한다. 유리코도 안와르도 이 사건을 알리는 흔적하나 세워지지 않았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24년 인도네시아 무력 강점기간 동안 인구의 1/3이 죽어갔지만 그래도 '산타쿠르즈 학살'은 우리네의 광주항쟁쯤으로 인식될만한 '사건'이었기에 '표식'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했던 '산타 크루즈' 묘역에선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넋들이 묻힌 자리를 '찾아가보고 싶다'고 딜리에 도착한 날부터 졸라보았지만 그들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었다. '너무 쉽게 역사의 무게를 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답변은 그제야 '맥'이 잡힌다.
정의 세우기 가슴으로부터 동티모르인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동티모르내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와의 과거청산이며, 식민지 시절 동티모르내의 인도네시아 부역 세력에 대한 청산이다. 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래, 2002년 5월 유엔의 신탁 통치를 거쳐 자국 정부를 갖게 된 이래 전쟁범죄자,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엔의 결정 하에 1999년 9월 인도네시아 내에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가 설립돼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검찰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조무래기들 18명만을 기소하는데 그쳤고, 또한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3년의 유죄를 선고했을 뿐이다. 동티모르 독립 이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99년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이, 딜리지방법원 내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이 설립되긴 했지만 기소된 사람 중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은 끝내 진행되지 못했다. 형식적인 조사와 처벌은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내의 정치, 사회적 지형이 낳은 결과로 동티모르인들이 외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독립운동을 해왔던 청년들이 사회의 올바른 설립을 꿈꾸며 만든 라디오 <라캄비아>(RAKAMBIA)에서 일하는 닌도는 "인간적으로 용서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책임을 묻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못 밖는다. 그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게릴라가 되어 산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아버지가 독립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로 아버지의 죽음을 인식할 뿐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사라져갔고 그 역시 사물을 인식했던 나이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했다. 하지만 그는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고 한 이웃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이뤄진 뒤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그런 피해자가 손을 내밀어 가해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화해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티모르에 세워진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 '뉴그'는 정의세우기의 이유를 자국으로부터 찾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아직도 자국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들은 정부가 불쌍한 동티모르를 지원한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동티모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인도네시아의 굴절된 역사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는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를 생각해봐라.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 군이 저질렀던 만행이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수탈의 역사가 남긴 경제적 상흔 '정의세우기'의 발목을 잡는 것이 '경제'라고 할만큼 경제문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티모르의 최대현안이다. 국민들의 체감 실업률이 90%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티모르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한 형편이다. 수도인 딜리에서조차 하루에 1달러를 벌기위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집 인근의 과실나무에서 따왔음직한 과일을 팔러 나온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버스 도우미로 일한다. 해진 뒤 물이 빠진 바다에서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조개를 줍거나 해초를 캐는 일상은 '낭만'이기보다는 '생계'를 위한 전투다. 해방을 맞은 도시는 출퇴근 시간조차 '활기롭기'보다는 '침울'하고, 밤을 맞은 도시는 '침묵'으로 가득 차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같은 느낌마저 준다.
40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지배와 24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는 동티모르의 모든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심각한 빈곤을 가져왔다. 커피 등의 주요 작물은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시절에 들어왔던 유럽이나 미국인 '거대' 회사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사람들은 수익을 빼앗긴다. 농부들은 긴 식민지배 하에서 '고리대금'의 방식을 통해 농토를 빼앗기거나 장기간의 피난 생활로 기반을 상실했고, 도시의 대부분 땅과 비옥한 농토는 포르투갈인이나 포르투갈 시대에 관료를 지냈던 사람들, 그리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경제 수탈정책 하에서 제조업이 전혀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세제, 신발 등의 생필품을 비롯한 모든 물자는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동티모르엔 공장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이러다보니 고용은 창출되지 못하는 반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며, 이런 악순환으로 빈곤은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교사 등의 공무원 임금이 한달 평균 120∼150달러인데 비해, 한끼 식사가 3∼5달러에 달하고 펜틴 샴푸가 10달러에 달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사관 및 유엔 직원 등의 외국인이 많이 들어와 있는 도시 딜리는 정확히 외국인 거주지역과 내국인 거주지역으로 양분된다. 경계는 밤이면 더욱 또렷해진다. 전기 수급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이틀에 하루 꼴로 저녁 7시를 전후해 전기가 나가는데, 대사관을 비롯해 대사관 직원 등이 묵는 거주지와 해변가를 따라 위치한 호텔과 레스토랑, 바 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정전사태는커녕 늦은 밤까지 꺼지는 법이 없다. 아직 전기선조차 구비되지 않는 집들이 즐비하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암흑 속에서 밤을 나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전기불은 단순한 불빛이 아닌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상징한다. 단 돈 1달러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지만 정부 역시 빈곤하긴 마찬가지다. 99년 독립 이래 동티모르 정부의 모든 재원은 유엔과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기구, 외국의 무상 원조로 충당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정부 역시 재원마련을 위해 매년 '예산 계획서'를 작성, 제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행히 티모르 해에서 유전이 발견돼 2004년부터 개발에 착수, 2004년 6월부터 2005년 5월까지 1년간 2억 4천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이 발생했다. 이는 동티모르 정부의 한해 예산의 1/4에 달하는 금액이다. 유전 개발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지만, 다른 물적 기반이 전무하고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위기를 탈출하기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이런 상황에서 동티모르 정부는 2005년부터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동티모르 노동자 1만 여명의 해외취업을 알선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 발표했다. 실업문제 해소와 우수한 해외 기술의 이전, 노동자의 질 향상 등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국은 바로 한국. 현재 계획에 따르면 올 해 연말까지 200여명의 동모르인들이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년에서 3년간의 기간동안 한국에서 건설현장이나 공장 등에 투입될 전망이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 겪어야할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동티모르에서 '평화캠프'를 준비하고 있는 종교단체 '개척자'의 박윤애 씨는 "이주노동을 희망하는 이들에 대해 정부가 하는 교육이라곤 '무조건 참고 버티기'"라고 말한다. "속된 말로 '첫 타자가 잘하고 와야 다른 동티모르인들에게도 기회가 생기니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아야한다'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동티모르 청년들은 기회에 갈급하고, 생계는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사무실에조차 한달에도 몇 명씩 '일자리가 없냐'고 찾아오는 청년들이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전한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동티모르인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일 수밖에 없다. 한편 심각한 동티모르의 경제적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생산해 낸 값싼 물자, 그리고 식민지배를 통해 익숙해진 인도네시아의 물품들이 동티모르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 인도네시아는 식민지배가 끝난 지금, 동티모르의 최대 무역 수입국으로 자리잡으며 동티모르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가져가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에 나설 경우 동티모르의 경제는 벼랑에 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상황의 역학관계는 정치적, 사회적 부분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해 동티모르를 압박하는 권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경제적 '예속의 질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동티모르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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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동티모르는 이미 잊혀진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지배와 억압에 신음하는 웨스트 파푸아와 아체에게는 동티모르 승리의 역사가 커다란 희망이자 자신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동티모르 독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독립을 염원한 수십만 명의 희생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된 국제사회의 연대와 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활동가들은 동티모르의 승리를 기억하며 투쟁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는데 인색한 우리가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할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동티모르인들의 계속되는 투쟁 그러나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직까지 동티모르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가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를 침략한 이후 1999년까지 수많은 살인·고문·성폭행·강제실종·불법감금 등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을 저질렀는데도, 아직까지 이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처벌을 위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5월 5일 인도네시아·포르투갈·유엔이 동티모르인들에게 독립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1999년 초부터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이를 막기 위한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의 만행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국민투표가 진행된 1999년 8월 30일을 전후해서는 학살과 재산파괴가 절정에 달했다. 유엔은 1999년 약 1,3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독립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파견된 유엔 직원들도 공격당했다. 유엔은 '동티모르 국제조사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on East Timor)를 임명하고 1999년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는데, 국제조사위원회는 국제법정을 설립하여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인도네시아, 단 한 명만 유죄판결 하지만 유엔은 인도네시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체적으로 1999년 9월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를 설립하여 포괄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임시인권법정'(Indonesia Ad Hoc Human Rights Court on East Timor)을 설립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검찰총장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위로부터 지휘를 받고 움직인 18명만 기소했고,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징역3년의 유죄판결을 확정했다. 한편 동티모르 독립 이후 설립된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1999년 사건 조사를 위해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을, 재판을 위해 딜리지방법원 안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을 설립했다. 중대범죄란 △대량학살(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s) △반인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살인(murder) △성폭행(Sexual offence) △고문(Torture) 등이다. 동시에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를 설립하고 중대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화해를 통해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중대범죄특별법정에 95건, 총 440명이 기소되었는데 이 가운데 339명은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을 진행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군대 서열 6위이며 반인륜범죄를 지휘했던 위란토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지만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어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 진행된 사법절차는 독립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 또는 유엔이 동티모르에 들어온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의실현 측면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의 실제 책임자에 대하여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동티모르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티모르인들, 국제전범재판 요구 동티모르인들과 국제시민사회단체는 유엔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중대범죄사법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며 국제법정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유엔은 올해 2월 18일 '전문가 위원회'(Commission of expert)를 구성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전문가위원회는 5월 26일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동티모르 정부에 대해서는 중대범죄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계속 진행하고 △이에 대해 유엔이 지원하며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정한 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조사와 재판을 다시 진행하라고 권고했다. 또 전문가위원회는 두 정부가 위 권고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엔은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해야 하고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하지 않을 경우 국제형사재판소의 활용가능성을 고려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 및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정부는 유엔의 권고사항을 따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두 정부는 2004년 12월 14일 설립하기로 합의한 '진실과 친선위원회'(Commission of Truth and Friendship)에서 1999년 문제를 일괄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위원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사면을 권고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사실상 지원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한 미국·영국·호주도 인도네시아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1999년 사건에 대한 국제전범재판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높은 비용과 비효율을 형식적인 이유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1999년 동티모르에서 발생한 살해·고문·불법감금, 동티모르인들에게 가해진 집단 살해는 명백히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이고 대량학살이므로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 약 4년 전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1999년 4월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가 수십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던 리키샤(liquica)를 방문해, "가해자 처벌을 통해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말했고, 2004년 11월 9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도록 유엔 회원국들의 협력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2003년 7월 전 인권고등판무관 로빈슨도 '동티모르 1999, 반인륜범죄'라는 보고서에서, "유엔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줄 특별한 책임이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동티모르 국제법정을 설립해야 한다. 안전보장이사회와 사무총장은 이를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동티모르 정부가 더 이상 정의실현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이상 국제전범법정을 설립해 동티모르 내에서의 정의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1999년 이전 범죄도 처벌해야 그리고 1999년 사건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침략 이후부터 자행된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에 대해서도 전범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 헌법에서도 "1974년 4월 25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발생한 반인륜범죄, 대량학살,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국내 또는 국제 법정을 통해 사법조치를 취해야 한다(제160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발전도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동티모르 침략 및 반인륜범죄와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포기할 경우, 보복을 통한 또 다른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25년간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인권침해를 자행했기 때문에 조사와 재판을 통해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로 옮겨간 동티모르 학살자들 그러나 무엇보다 동일한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범재판의 설립은 절실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인권침해를 주도한 군장성들을 승진시켰고 2004년 초 전 동티모르 경찰 간부였던 팀빌 실랜(Timbil Silaen)을 웨스트 파푸아 경찰 간부로 임명했다. 동시에 악명 높았던 동티모르 민병대장 유리코 구테레스(Eurico Guterres)를 와메나(Wamena) 지역에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 두 사람은 1999년에 발생한 동티모르 학살사건에 연루된 자들인데, 동티모르에서 한 것과 똑 같은 반인륜범죄를 웨스트 파푸아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동티모르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이 사실상 면책을 누리는 이상,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동티모르인들이 겪은 고통의 길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동티모르인들은 국제전범법정의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 시민사회단체, 동티모르 내 국제 시민사회단체, 학생조직 등 42개 단체가 '국제전범법정 설립을 위한 동티모르 연대모임'(East Timor National Alliance for an International Tribuanl)을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침공 이후부터 1999년까지 발생한 전쟁범죄 및 반인륜범죄 등에 대한 국제법정 설립을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티모르인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 |||||||||||||||||||||||||||||||||||||||||||||||||||||||||
미군기지 철수의 땅, 수빅과 클락 방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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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조차도 사방가도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라며 땅의 심각한 오염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정부에 지역폐쇄와 경고문구 게시를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차는 이미 밀라 '국제 미군기지정화운동 연합'(Alliance for Bases Clean UP International: ABC International) 사무국장이 가리 킨 위험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부터 시작된 인가는 뜀 없이 이어졌다. 10여분쯤 더 달린 후 차는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췄다. 하나 둘, 아이를 안은 엄마들이 집으로 모여들더니 작은 마당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아이는 님플,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육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존말이에요. 간에 문제가 있지요. 이제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자궁질환을 갖고 태어났고, 조지와 에드워드는 각각 11살인데 둘 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의 엄마를 대신해 밀라가 아이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용어로 시작된 설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말로 끝났다. 갑자기 화가 북받쳤다. '왜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미 아이들로써 그 심각한 위험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하지만 화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누구라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 저주받은 땅을. 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애초부터 조금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미군에 의해 저주받은 클락(Clark)의 사방가도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가도는 미군의 기지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클락에서도 환경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 중 하나이며,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다.
88년 미군 주둔의 역사 마닐라에서 불과 70∼80킬로미터 떨어진 수빅(Subic)과 클락이 미군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뒤부터. 1880년대까지 스페인 해군의 선박수리소가 있었던 수빅에는 1903년 해군기지(Subic Naval Station)가, 클락에는 1910년 공군기지(Clark Air Base)가 만들어졌다. 1946년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두 기지는 굳건히 유지됐다. 필리핀과 미국은 1947년 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을 체결하고 99년간 무상 기지임대에 합의했다. 하지만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군기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면서부터 철옹성 같던 기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기지협상을 재개하여 임대기간을 25년으로 감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기지 사용과 관련된 보상 문제를 제기해 일정금액의 경제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1991년 필리핀 상원은 미군 기지임대 연장안을 거부했다. 88년 미군기지 주둔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미군은 91년 철수했고, 두 지역에는 기지전환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빅과 클락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미군의 아시아 최대 기지였던 수빅과 클락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과 레저, 경제지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빅과 클락의 재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떠난 기지에 드리운 재앙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수빅 피해자들의 조직 '수빅 자연자원보호 운동본부'(Yamang Kalikasan Aming Pangangalgaan: YAKAP, 아래 수빅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리노는 이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일흔을 넘긴 리노는 1957년부터 미군기지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미군을 위해 일했으며, 괌 기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35년 동안 미군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석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오염됐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이미 결핵 등의 질환으로 고인이 된지 오래다. 마일도 마찬가지다. 미군기지에서 청소일을 했다는 마일은 "쓰레기를 치우다가 (화학물질 냄새에) 여러 번 기절했습니다. 관리인은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 저는 계속 몸이 안 좋았지만 직장을 잃을까봐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폐암을 선고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앙은 수빅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했던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리고 미군 철수 이후 기지로 사용됐던 건물들이 공장 등으로 임대되면서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제이슨(8)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제이슨의 아빠는 해군기지에서 일했으며, 엄마는 미군철수 이후 핸드폰 조립 공장으로 임대된 미군건물에서 3년간 일했다. 그때 잉태된 제이슨은 생후 3살 이후부터 백혈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했던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유산했으며, 한 명은 제이슨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낳았다. 회사에 책임을 묻기도 했지만 사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
'미군기지정화 민중운동본부'(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 PTFBC) 필리핀 대표인 부기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과 전문적인 조사인력 확보의 한계, 게다가 미군이 정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염물질을 바다와 강 등으로 방류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상황을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미군기지 노동자로 일하면서 화학물질 오염으로 숨을 거둔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95년 수빅 관리청이 투자유치를 위해 수빅 44개 지역에 대해 실시한 환경조사에 따르면, 사격연습장·병원소각장 등 11개 지역에서 오염물질이 검출됐다. 화산폭발로 미군기지에서 생활…최대 피해자는 아이들 클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991년 6월 클락 미군기지 인근에 있던 피니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존의 터전에서 내몰린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기지 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클락 공군기지 본부로 사용됐던 캅콤(Clark Air Base Command: COBCOM)에만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로 사용됐던 땅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가꾸고,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면서 2년에서 5년가량 생활했다. 가끔 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이물질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이 절박했던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산폭발로 캅콤에 이주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씻기 위해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온 가족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물 때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손자는 뇌성소아마비를 앓고 있고, 저 역시 피부병과 두통, 위장장애 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클락 피해자들의 가족을 위한 공동행동'(Sama-Samanhg Aksyon at Ugnayan ng Mga Pamilyan ng Biktima: SAUP, 아래 클락 공동행동) 사무실에서 만난 노마가 말했다. 노마는 "캅콤에서 나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물이 오염됐으며 이로 인해 저희 가족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질환을 앓거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저는 단지 평화로운 생활을 원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캅콤에 거주했던 다른 이들의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다. 케빈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 11살인데도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아 6∼7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미 케빈의 동생은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았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라베스 역시 독극물에 의한 오염으로 인해 뇌성소아마비와 백혈병을 앓고 있다.
정부 독극물 오염 확인…보상과 복구는 전무 상황의 참혹함은 이미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96년 캐나다 병리역학 전문의인 로살리 베르텔 등 독극물 전문가들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클락 공군지기 인근 13개 지역에 거주중인 여성 761명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독극물에 감염된 상태였다. 특히 캅콤에 거주했던 여성들 가운데 당시 임신을 했거나 아이들이 있었던 경우에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병, 암 등의 질환을 보였다. 이후 진행된 다른 조사에서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중추신경 마비, 선천성 심장병 그리고 언어장애 등 희귀병에 걸려 있음이 확인됐다. 환경오염 문제가 붉어지면서 클락 개발공사 역시 우물과 지하수 수질 검사와 토양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폴리염화비페닐 등이 검출됐으며, 14개 지역이 폐쇄되거나 개발이 보류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치료와 배상은 물론이고 환경오염지역에 대한 복구 정화작업 역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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