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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여, 춤을 추자"

"남성들이 춤을 멀리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다."

 

엊그제 퇴근 후 서점에 들러 이런 저런 책을 훑어보다가 <무용의 현대>라는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게 됐다.

 

늦은 나이에 발레에 미치게 됐다는 일본 문예평론가 미우라 마사시(三浦雅士)가 쓴 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는 이 책에서 20세기 후반부터 무대예술의 중심이 연극에서 무용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마사 그레이엄(1893-1991. 미국 현대 무용의 개척가. 그의 이름을 딴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와 무용단이 있다),  조지 발란신(1904-1983. 뉴욕시티발레단을 만들었으며 네오클래식(신고전주의) 발레의 창시자), 유리 그리고로비치(1927.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 볼쇼이 발레단에서 33년간 수석 안무가를 맡았었다) 등에 대한 평을 실었다.

 

서점에서 잠시 저자의 무용관을 밝힌 부분인 '지금, 왜 춤인가'라는 글을 읽었는데, 춤과 산업화와 신체의 표준화에 대한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끔 방송에서 일부 아프리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아직도 부족사회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춤이 그 사회를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사회에서 춤은 특정 성별이나 연령, 계층이 향유하는 예술이라기 보단 온 부족이 기쁨, 슬픔, 분노 등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소통 수단이다.

 

저자는 남성이 춤을 추지 않게 된 것은 산업화 이후로 그 이후 노동자 남성들에겐 춤 대신 '체육'이 심신을 단련하는 수단으로 확실히 자리잡게 됐다고 밝혔다.

 

춤의 궁극적 목적이 몸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체육은 인간 신체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저자는 또 체육은 인간의 몸을 표준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동시에 그것이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산업화로 공장을 통한 대량생산체제가 도입되면서 똑같은 기계를 사용해 생산을 할 수 있는 표준화된 노동자들이 대거 필요하게 됐다. 규격화된 신체를 가진 노동자들을 확보하는 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산업화 이전 사회구성원들의 몸의 다양성은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말했다.

 

저자는 또 남성들의 신체를 표준화시키는 것은 근대 국가의 '군대'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고로 남성들이여, 춤을 춰라.

 

당신의 몸과 감성 체계를 정해진 틀에 몰아넣으려는 자본과 국가의 음모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춤을 함께 추자.

 

고백의 글

 

난 거의 모든 종류의 운동에 소질이 없지만 춤추는 것은 좋아한다. (결코 잘 춘다는 의미가 아니다.)

 

난 공을 가지고 승패를 가르는 종류의 운동은 싫어한다. 이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태권도, 권투 등 힘을 쓰는 운동도 싫어한다. 맞으면 아프기 때문이다. 스키, 사이클, 롤러브레이드 등 바퀴가 달린 것을 타는 운동 역시 싫어한다. 넘어지면 다친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 혼자 하는 달리기나 등산이 유일하게 부담을 갖지 않는 스포츠다.

 

춤은 다르다. 춤은 경쟁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만족이 목적이다. 춤은 신체의 한계에 도전한다기 보다 몸을 내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다. 

 

그렇다면 춤을 출만한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어디서 춤을 추냐고?

 

좀 호사스런 취미라고들 할지 모르지만 내 취미 중 하나가 '발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건 1년반 정도 지났다.

 

일주일에 두번 집 근처의 발레스튜디오에 가서 천근만근 무게의 다리를 들어올리며 뒤뚱뒤뚱, 1시간 반 가량 땀 흘리며 춤추는 게 내 일상의 한 부분이다. 춤과 함께 춤추는 여자들의 수다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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