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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법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에 관심 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도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 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엑스트라 / 정해종



난 정해종(41)이란 시인을 잘 모른다. 지난 91년 등단해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이란 두권의 시집을 냈으며 삼십대 중반이 넘어 아프리카 미술에 매료돼 지금은 '터치아프리카' 대표로 있으며 국내에 아프리카 미술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전부다.

 

"정해종의 시는 즐겁지 않다. 때로는 착잡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이미 청춘의 꿈의 내용대로 우리 일상을 채워갈 수 없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또한 버릴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데서 온다. 그래도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시인에게 희망은 막막하고 절망은 구체적이다."

 

그의 시에 대한 비평이다.

 

무엇보다 난  그의 직설법이 마음에 든다. 폐부 깊숙이 우려난 냉소와 비관을 빙 둘러 말하지 않고 확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는다. 아니 머리 속에 팍팍 새겨진다.

 

절망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게 그가 가진 희망이다.  

 

을지로 순환선
                                정해종

 

구멍난 도시의 심장을 여러분께선
관통하고 계신 셈인데, 관통을
자꾸 간통으로 알아듣는 이가 있다
혀가 짧은 것도 아닌데 순환선을
수난선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그는 종일 간통죄 폐지의 거론과
도덕의 수난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잠실과 신도림이 은밀하게 연결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교통과 고통을 얼버무리고
다 그게 그거라고, 우리말 사전의 몇몇
어휘들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우겼다
90년대에 이르러 그는 문명과 문맹을,
利器와 利己를 얼버무려 놓았다.

이제 그는 없다, 언젠가 그가 바람난 서울을
떠나겠노라 했을 때 아무 말하지 못한 건
관통과 간통의 일맥상통을,
소득수준과 소비지수가 다른
잠실과 신도림의 은밀한 밀회를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호흡의, 팽창하는 성감의 서울
간통죄 폐지의 거론과 도덕의 수난을
생각하며 마크네틱 테잎 들이밀 때
나는 문명의 진공 속으로 빨려드는
담배꽁초가 되고, 아랫배에 힘주어
바리케이드 밀고 나오면
그렇다, 이건 영락없는 문명과 이기의,
간통

 


연애편지를 쓰는 밤 

                             정해종


당신이 마련하신
기쁨과 고통의 행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몇 명이 다녀가셨다지요
꽃을 준비하지 못한 건
시들지 않는 기쁨을
선사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시들지 않는 꽃이란 게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하던가요
살아 있음을 인생이라 하고
피어 있을 때만이 꽃이라 하고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요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대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 건
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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