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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행복

오늘 한겨레에서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의 칼럼을 읽었다.

 

이 칼럼은 물론 '철학적' 탈성장의 관점에 기반한 글이다.

 

"물질이 어느 정도나 있으면 우리가 행복해질까? 우리는 부가 늘어나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물질의 증가를 행복의 전제로 두는 점에서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는 큰 차이가 없다.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누느냐를 두고 생각이 갈라질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세계 각국의 부와 행복지수를 나타낸 도표 한 장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자나라가 될수록 더 행복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필리핀이나 브라질 국민들은 그보다 훨씬 잘사는 포르투갈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사람들도 미국보다 ‘못살지만’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 칼럼과 또 이 칼럼을 진지하게 읽는 나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사회가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변했다는 거다. 나 자신도 그렇고.

(물론 간혹 어떤 사람이 '행복하세요' 이런 류의 인사를 하면 아직도 낯 간지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우리(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 자체가 참으로 '생뚱맞게'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에 앞서 '우리(나)는 정당한가'가 질문돼야 한다고 믿었더랬다.

 

어쨌든 조효제 교수는 이 칼럼에서  리처드 레이어드의 <행복의 경제학>이란 책을 인용,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의 경우에도 전후 50년 동안 무려 6배나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지수는 변치 않고 있으며 여기에는 행복의 복잡한 사회심리적 요인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국민소득 1만5천달러를 분기점으로 하여 더 잘살게 되어도 행복은 거의 제자리걸음 또는 심지어 퇴보하는 경향까지 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윌킨슨은 어느 수준 이상부터는 발전보다 오히려 사회의 응집력과 평등이 그 사회의 건강도와 행복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장과 평등 사이의 해묵은 논쟁에 대한 어떤 암시를 얻는다...1만5천달러의 고지를 눈앞에 둔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진정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의 꿈으로 비웃지 않을 만한 집단적 지혜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어쩌면 결론은 '우리(나)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확연히 다르며, 심지어 결과조차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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