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를 읽음서

  사람은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말한다. ‘말하다’는 자동사다. 그러나 우리는 말한 것을 들을 때 그 말이 무언가를 의미하며, 그 의미는 내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믿어버린다. 이는 ‘쓰다’와 ‘읽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글이 써진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기 의도로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쓴 것을 듣고 읽는 타자의 역할은 내가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이기 때문에 진정 타자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말해지고 쓰인 것이 타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는지 자체'의 문제는 의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텍스트 자체에 의미 생산성이 있다는 신화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의미가 만들어지느냐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의미가 만들어지는 순간, 타자와 동일 의미를 공유하는 순간에야 해명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전까지의 위태로움은... 그저 견뎌내야 할 것.
 
 
  걸레가 되어버린 시나리오를 위한 조문이다. 그냥 써지고 말해진 데다 어떤 의미로 풀이되는 게 가장 보편적일지 고민하고 의도를 덧붙이고 그에 따라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다 이제 보니 만신창이다. 그녀를 규정하려고 할수록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진짜 너는 어디 숨어 웃음 소리만 전하느뇨. 어느 면에서는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나 줄줄이 짚어가며 이건 이런 뜻이야, 하고 나도 모를 의미를 쥐어짜서 설명하는 민망한 꼴을 겪다보니 나까지 망가진다. 그런다고 누가 그 의미를 그대로 읽겠는가? 근 열흘간은 누구 말처럼 악마가 씌인 것 같았다. 만우절을 기념해 그냥 웃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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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1 14:27 2010/04/0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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