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살 때 강간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최근의 아동성폭력 사건같은 아픈 기억이 있는 건 아니니 오해마시라.

  할아버지 장례 중이었다. 생전 나를 어여뻐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없으니, 평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할아버지 방에 맘 편히 들어갔다. 할아버지 방에는 책이 많았다. 나는 책상 밑에 들어가 앉아 이 책 저 책 마음껏 뽑아보며 살폈다. 아동문학지 따위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없었고 '전남문학'이라는 잡지들이 꽤 있었다.

  그 중 한 권을 떠듬어 보다가 한 희곡을 봤다. 희곡 장르를 처음 봤기에 호기심이 생겼을까. 바닷가에 사는 광뭐시기라는 어부, 그리고 그가 여자를 강간하고, 그 여자와 어부가 어찌어찌 살게 되고... 당연히 자세히 기억 안나지만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정확히 누구의 어떤 희곡인지 알고 싶지만 그 이상의 정보가 없어서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포르노소설이 아니니 자세한 성적 묘사는 없었을 거다.

  재밌는 건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 분명 '강간'이라는 말에서 묘한 낌새를 느꼈었다는 거다. 곧 누군가 들어오자 나는 책을 급히 덮었다. 떨떠름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감지했다는 자체가 더 떨떠름하다. 들어온 누군가는 날 보고 어린애가 이리 어려운 책을 읽느냐며, 초상집 구석구석에 방송을 해서 문상 온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며 나를 칭찬했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그 책을 더듬어 무슨 내용인지 살필까봐, 그러고 나면 혼날까봐 무섭기만 했다.

 

  가끔 이 일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도 생각난다. 당신이 관 속에 드러누워 있을 때,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당신의 서재에서 어린 손녀는 아직 몰라도 될 단어를 깨우쳤다. 꽤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시원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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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9 12:59 2010/06/1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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