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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11
    [책] 우화라기엔 슬픈 희극
    평발
  2. 2008/06/11
    촛불, 그리고 투표와 투표사이(2)
    평발

[책] 우화라기엔 슬픈 희극

* 장르문화 잡지 <판타스틱> 6월호에 실린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의 첫 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에 대한 메모. 

 

 

렘의 단편은, 이미 저자 자신이 소개한 바대로, 반전소설이다. 그런데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반전은 이야기의 말미에 보이는 희귀한 형태의 결말로 나타난 '얘기치 못한 전환'이라는 의미의 반전과 공명한다. 그런데 하나도 유쾌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에겐 콘센트를 달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명의 창조주는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이들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사회에서 창조주의 능력은 뛰어난 알고리즘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예측력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기계는 알고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렘은 각각의 개체가 공동의 의식으로 고양될 수록 '공존'으로 이끌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식의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움에 대한 것'과 같이 뭐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문제에 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확장에 비추어 보면 조그마한 영토를 둘러싼 싸움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동서 냉정의 한가운데서 활동을 했던 렘의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간에 또렸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결말에 대해 '웃을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렘이 '로봇'들의 세계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인간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도피로 보인다. 우화라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이 같은 생명체를 대상으로 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단편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렘의 독백이자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이, 콘센트로 연결되듯이 조금만 서로를 더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모두 함께 같은 꿈을 잠깐이나마 꿀 수 있다면 전쟁따위는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는 렘 스스로의 희망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도자만 빼곤 다 현명한 로봇세상이 인간세상과 비슷하여 웃음이 나지만, 렘의 희망은 슬플 뿐이다. 인간인 우리는 과연 공존의 길로 가고 있는가?

 

이번에 출간될 단편집의 내용들이 이와 비슷하다면 꽤나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끝)

작가소개- 스타니스와프 렘: 1921년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르보프에서 태어나, 1946년 크라코우의 야기에보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에는 이론생물학을 필두로 사이버네틱스, 수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으며, 시와 소설, 희곡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1946년에 <화성에서 온 사나이>로 데뷔했다. 1955년에 발표한 <마젤란 성운>은 미래의 우주탐사를 사회주의적인 시점에서 묘사한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으로, 폴란드 문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957년에는 우주 방랑자 욘 티키의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린 <우주여행기>를 발표, 문명 비판가이자 신랄한 풍자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후 <에덴>(1959), <솔라리스>(1961), <무적호>(1964) 등 '우주 3부작'을 발표해, 동구권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SF작가로서 부동의 명성을 쌓았다.

 

 

사이버리아드 - 6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오멜라스(웅진)

 

솔라리스 - 10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안종설 옮김/집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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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그리고 투표와 투표사이

 

1. 비폭력이라는 상징재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비폭력이라는 도덕의 철갑이 없었더라면 촛불의 절반 이상은 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회가 일상인 이들에겐, 집회가 비일상인 이들이 말하는 비폭력이라는 도구는 코르셋보다도 숨을 조일 것이 분명하다. 100명 정도 모인 집회는 전경버스에 가로막혀 숫제 전경을 상대로 집회를 하는 촌극을 낳고 있다. 사업주의 위법은 법적 절차의 유연함으로 하루이틀 지연되는 반면 그 피해자인 노동자의 삶은 기하급수적으로 하강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상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털봉숭이 영감님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법이라는 놈이 다가오는 속도에 있어 이건희와 나 사이엔 무궁화호와 KTX 의 차이보다 더 큰 갭이 존재한다.

 

그래서 근자에 촛불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비폭력이라는 상징재가 이명박보다는 노동자들을 얽매는 것은 아닐까라는 '하지 않아도 될' 우려를 하고 있는 즈음이다.

 

 

2. 최장집과 강재섭

 

결국 대안이 문제인데, 오늘 <경향>과 <프레시안>, 그리고 간접적으로 본 <찌라시 3인방>을 보다 깜짝 놀랐다. <경향>은 어제 집회에 참석한 최장집교수를 스케치한 기사를 실었는데 최교수 왈 "이제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정당이 제역할을 해야할 때다"고 했다. 뒤이어 강재섭 왈 "촛불 참가자들은 이제 집에 돌아가고 국회가 역할을 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찌라시 3인방> 역시 거리->국회의 등식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요구했다.

 

적어도 최장집교수와 강재섭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라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유사성의 원인은 뭘까?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한다. 최장집 교수는 그동안 정치경제적 이슈가 정당 분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의 진보정당 지지는 균형잡힌 정당 제도를 바라는 일종의 '미적 태도' 이상은 아니다. 강재섭이야 당연히 국회로 이슈를 가져오고 싶을 것이다. 일단 180석에 육박하는 안정적인 의석이 있으니 뭐든 주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리라. 이런 강재섭의 꼼수는 찌라시s와 공명한다.

 

다시 대안을 생각하면, 제도적 해결방법과 비제도적 해결방법만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일종의 제3의 길이 있지 않나 싶다.

 

 

3. 투표와 투표사이

 

선거라는 것이 단 하루의 우발적이고 감성적인 결정으로 4년이나 5년간의 '지배자'를 뽑는 장치에 불과하다면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현행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어 한번 내려진 '투표'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투표 자체는 매우 중대한 정치적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정치적 행위가 4년이나 5년의 장기적인 지속성을 가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투표와 투표사이의 정치가 중요해진다.

 

나는 진보정당이,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관심을 가져야할 공간은 바로 투표와 투표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문제라 생각한다. 진보정당이 제도와 비제도의 사이에 존재하는 준제도적(그도 그럴 것이 정당은 제도의 산물이지만 의석이 없다면, 제도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방식들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인 방법들은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국민청원제도, 각 행정사항에 대한 의견 개진 운동, 일상적인 시민발언활동 조직 등등) 그래서 최장집과 강재섭이 수렴하는 이상한 상황도 벗어나면서, '법적 테두리에서 할만큼 하고 시위를 하라는' 도덕적 상징재를 무력시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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