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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6/24
    [빌어옴]최근 읽은 글 중 최고!!(1)
    평발
  2. 2008/06/24
    촛불의 이해득실
    평발
  3. 2008/06/11
    [책] 우화라기엔 슬픈 희극
    평발
  4. 2008/06/11
    촛불, 그리고 투표와 투표사이(2)
    평발
  5. 2008/06/03
    '안티 이명박' 그 자체다
    평발

[빌어옴]최근 읽은 글 중 최고!!

배병삼이라는 교수는, 도올선생과 함께 논어를 공부했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한겨레에 싣곤하는 칼럼은 정말 읽을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빌어온 글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글이다. 리더쉽의 문제에 대해 고민, 고민하게 만들다. 독백의 구조라... 무시무시하다. 역시 愼獨의 가르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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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배후의 리더십 / 배병삼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영·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였다. 특히 정조는 경학에 밝았다. ‘경연’이란 본시 신하가 임금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정조는 도리어 그 자리에서 신하를 가르쳤다. 그가 던진 질문은 정약용 같은 신예에게조차 평생 화두가 될 정도였다. 이런 정조의 위상을 군사(君師)라고 칭한다.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뜻이다. 큰 영예다. 플라톤이 꿈꾼 이상적 군주, ‘철학자·왕’을 몸소 시현한 셈이다.
 
한데 정조가 죽자 정국은 곧 세도정치라는 반동으로 추락한다. 하면 어째서 황금기가 그토록 짧고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을까?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영예 바로 그 속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맹자라면 이 지적에 찬동하리라. 그는 전국시대 혼란의 뿌리가 “스승 되기 좋아하는 버릇”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임금들이 자기 가르침을 받는 신하는 좋아하지만, 임금을 가르치는 신하는 싫어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

 

힘으로 말하는 사람이 권력자요, 이치로 말하는 사람은 스승이다. 둘 다 혼자서 말하고, 또 아래를 향해 말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니 ‘스승이자 군주’의 말은 힘으로나 이치로나 거역할 수가 없다. 여기서 완벽한 독백의 공간이 탄생한다. 독백 속에는 권력은 가득 차 있지만, 함께하는 정치는 부재한다. 세도정치의 씨앗은 ‘군사’인 정조가 뿌린 게 맞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약용은 대화와 논쟁 속에 정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에게 부친 편지 속에서 요순 정치의 핵심이 “제 목소리로 스스로 말하기”에 있다고 들뜬 필치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정조의 통치가 독백적 구조인 탓에 파산하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소통, 즉 대화와 논쟁을 통해 정치를 복원하는 데 있음을 그는 알아챈 것이다.

 

최근 대통령은 총리를 위시한 각부 장관과 청와대 참모진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려 한다고 들었다. 아마 맹자라면 대통령을 가르칠 정도의 인물을 선발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조언할 것이다. 또 말은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 대통령에겐 듣기를 권할 것이다. 듣는 귀는 말하는 입보다 높이 달려 있으므로, 귀담아들으려면 몸을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곧 일을 제대로 알려고 든다면, 겸손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정치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점도 지적하리라.

 

한편 다산이라면 현 정국의 문제가 보고하고 지시하는 회의 방식에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앞 정권의 “계급장 떼놓고 토론하기”는 지나치다 하더라도, 제 목소리로 제 주장을 내세워 쟁론하는 회의 방식은 꼭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할 테다. 이름은 ‘회의’(모여서 함께 의논함)라고 해놓고 윗사람 혼자서 말하고 나머지는 듣고만 있는 것은 조그만 학교에서 큰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병폐다. 요컨대 국무회의든 참모회의든 자기 업무를 담당자들이 큰 소리로 주장하고 대통령은 그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기, 이것이 다산이 권하는 회의(소통)의 모습이라는 것. 덧붙여 대통령을 뜻하는 영어, 프레지던트(president)가 본시 ‘사회자’를 뜻함은 이 대목에서 함께 참고할 만하다.

 

독백 속에는 ‘함께, 더불어’가 부재한다. 내 사람을 공공기관에 심는 것도 고작 독백의 구조를 확산시킬 따름이다. 독백적 조직은 너의 것일 뿐 우리의 것일 수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그 책임 역시 단 한 사람에게 귀결한다. 나머지 사람에겐 그들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사태가 지목한 것도 오로지 한 사람이었고, 그 촛불을 끌 사람도 단 한 사람뿐임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 “필요한 게 뭡니까?”라고 묻는 배후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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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이해득실

아무래도 말들이 쏟아지는 형국인지라, 여기에 한 스크롤을 얹는다고 티도 안날 지경이다.

그러니, 읽고 읽는 수 밖에. 하지만 2mb의 오만한 반격이 예정되어 있는 작금의 상황은 다시금 머리를 굴리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당최 촛불정국에서 이익을 본자와 손해를 본자가 누구냔 말이다. 모든 것이 '선택이론'에서 와 같이 이해관계에 따른 합리성에 근거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향후 정국의 '예상'을 하는데 나름의 기준을 삼기위함이다. 뭐, 술판에서 흔히 있는 감상비평을 벗어나진 않겠지만.

 

1. (다시) 최장집과 하승우

 

뭐, 대응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이 대립항 밖에는 없다. 최장집은 얼마전 퇴임을 하면서까지 '정당의 제도화'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가 쓴 '이명박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되나?'(비평, 2008년 여름)를 보면 그의 생각이 잘 정리되어있다.

 

쉽게 보면, 원래 정치제도는 운동-제도-권력의 세개항으로 구성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당이 개판이라 운동-권력의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이런 이면엔 과도하게 집중된 '대통령의 권력'이 있다. 따라서 의원제 개헌이 필요한데, 당장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정당체계부터 운동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정도. 반면 하승우는 촛불을 그간 정치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볼 것을 주문한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반전이라고 생각한다.)[MB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하자] 그리고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최초의 공식적인 시민성을 획득한 이번 사건에 주목하자고 말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제도정치는 기본적으로 배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그런데 이번 촛불은 배제되었거나 배제될뻔한 것들이 날 것으로 등장했다. 제도가 이를 포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직접행동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제도 정치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불필요하니 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정도.

 

재미있는 것은 한동안 악명을 떨치던 '다중'이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것이며,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 다중과 집단 지성

 

개념은 구별 지음을 통해 확정된다. 그러니까 다중은 다중이 아닌 것과 구분되고, 집단 지성은 집단지성이 아닌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뭐 대략 '이 정도?'식의 가늠으로는 공허한 말장난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내 생각으론, 다중과 집단지성이 가지는 엄청난 포용력(설명력이라고 해도 좋겠다)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사후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본다. 무엇이 다중이고 무엇이 집단지성인지는 사후에 명명되는 것이다. 또한 하승우는 민중 대신 다중을 주장하지만, 민중이라고 불리던 대상이 어떤 질적 도약을 통해 다중이 되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부적절하다. 역으로 다중이라고 불리었던 것이 민중도 될 수 있고, 대중지성이라고 불렸던 것이 대중독재의 근거가 되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과 하승우의 차이는 분석과 해설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3. 조중동과 한겨레, 그리고 경향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한겨레와 경향의 차이를 많이 느끼는 편이다. 뭐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한겨레는 여전히 계몽적 성격이 강한 '선동성'이 있는 반면, 경향은 르몽드나 네이션과 같이 '지성지'의 포지션을 갖는다고 본다. 그래서 한겨레는 당파성이 존재하고, 경향은 유연한 균형감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최근 <시사인>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6% 가량이 구독하던 신문을 바꿨는데 첫번째가 한겨레로 바꿨고, 두번째가 동아일보로 나왔다(뭐, 이런 병~~ 똥차 피한답시고 쓰레기에 처박히는 센스하곤). 재미있는 것은 경향으로 옮겨간 이들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부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경향 걱정을 더한다. 왜냐하면 완전 위기라는 설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 미움 받고 있지, 돈 될만한 광고는 안들어오지...

 

(흥미로운 건 경향은 최장집과 겹치고, 한겨레는 하승우와 겹친다는 것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4. 어쨌든 맞짱의 시간이 오는 걸까?

 

그런데, 제도정치의 안정화든 직접행동의 다양한 가능성이든, 당장 싸움을 걸고 들어오는 2mb와 어떻게 대응할까가 문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역시 보수 우익의 레토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정체성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누군가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젠장!!

 

촛불의 피로감이 그 특유의 천민성때문에 청와대의 귀족적 피로감보다 빠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춧불들은 돈을 써가며 거리에 있지만, 청와대나 정부에 있는 놈들은 어떻게 뻐기든 한달에 한번씩 꼬박꼬박 세금을 받아가지 않는가? 당최 피로감이 쌓일 이유가 없는 거다.

 

누군가, 6월 28일에 150만이 모이자고 격문을 썼다.

 

난 리니지 등의 온라인 게임을 하진 않지만, 공성전에 돌입할 때의 긴장감이 이런 것인가 싶다. 아자 아자.

 

참, 그래서 최장집과 하승우 중 누구냐면 머리는 최장집, 심장은 하승우... ^^ 안될까? 신문은 경향이 많이 컷으면 한다. 폼나는 지성지로...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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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화라기엔 슬픈 희극

* 장르문화 잡지 <판타스틱> 6월호에 실린 <트루를과 클라포시우스의 첫 번째 외출 혹은 가르강티우스의 덫>에 대한 메모. 

 

 

렘의 단편은, 이미 저자 자신이 소개한 바대로, 반전소설이다. 그런데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미의 반전은 이야기의 말미에 보이는 희귀한 형태의 결말로 나타난 '얘기치 못한 전환'이라는 의미의 반전과 공명한다. 그런데 하나도 유쾌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에겐 콘센트를 달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명의 창조주는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나리오대로 이들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사회에서 창조주의 능력은 뛰어난 알고리즘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예측력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기계는 알고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렘은 각각의 개체가 공동의 의식으로 고양될 수록 '공존'으로 이끌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식의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움에 대한 것'과 같이 뭐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문제에 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확장에 비추어 보면 조그마한 영토를 둘러싼 싸움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동서 냉정의 한가운데서 활동을 했던 렘의 정치적 감각은 그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간에 또렸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결말에 대해 '웃을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렘이 '로봇'들의 세계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인간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도피로 보인다. 우화라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같이 같은 생명체를 대상으로 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단편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렘의 독백이자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이, 콘센트로 연결되듯이 조금만 서로를 더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모두 함께 같은 꿈을 잠깐이나마 꿀 수 있다면 전쟁따위는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는 렘 스스로의 희망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도자만 빼곤 다 현명한 로봇세상이 인간세상과 비슷하여 웃음이 나지만, 렘의 희망은 슬플 뿐이다. 인간인 우리는 과연 공존의 길로 가고 있는가?

 

이번에 출간될 단편집의 내용들이 이와 비슷하다면 꽤나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끝)

작가소개- 스타니스와프 렘: 1921년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르보프에서 태어나, 1946년 크라코우의 야기에보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학창 시절에는 이론생물학을 필두로 사이버네틱스, 수학, 철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으며, 시와 소설, 희곡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 1946년에 <화성에서 온 사나이>로 데뷔했다. 1955년에 발표한 <마젤란 성운>은 미래의 우주탐사를 사회주의적인 시점에서 묘사한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으로, 폴란드 문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957년에는 우주 방랑자 욘 티키의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린 <우주여행기>를 발표, 문명 비판가이자 신랄한 풍자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후 <에덴>(1959), <솔라리스>(1961), <무적호>(1964) 등 '우주 3부작'을 발표해, 동구권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SF작가로서 부동의 명성을 쌓았다.

 

 

사이버리아드 - 6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오멜라스(웅진)

 

솔라리스 - 10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안종설 옮김/집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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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그리고 투표와 투표사이

 

1. 비폭력이라는 상징재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비폭력이라는 도덕의 철갑이 없었더라면 촛불의 절반 이상은 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회가 일상인 이들에겐, 집회가 비일상인 이들이 말하는 비폭력이라는 도구는 코르셋보다도 숨을 조일 것이 분명하다. 100명 정도 모인 집회는 전경버스에 가로막혀 숫제 전경을 상대로 집회를 하는 촌극을 낳고 있다. 사업주의 위법은 법적 절차의 유연함으로 하루이틀 지연되는 반면 그 피해자인 노동자의 삶은 기하급수적으로 하강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상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털봉숭이 영감님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법이라는 놈이 다가오는 속도에 있어 이건희와 나 사이엔 무궁화호와 KTX 의 차이보다 더 큰 갭이 존재한다.

 

그래서 근자에 촛불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비폭력이라는 상징재가 이명박보다는 노동자들을 얽매는 것은 아닐까라는 '하지 않아도 될' 우려를 하고 있는 즈음이다.

 

 

2. 최장집과 강재섭

 

결국 대안이 문제인데, 오늘 <경향>과 <프레시안>, 그리고 간접적으로 본 <찌라시 3인방>을 보다 깜짝 놀랐다. <경향>은 어제 집회에 참석한 최장집교수를 스케치한 기사를 실었는데 최교수 왈 "이제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정당이 제역할을 해야할 때다"고 했다. 뒤이어 강재섭 왈 "촛불 참가자들은 이제 집에 돌아가고 국회가 역할을 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찌라시 3인방> 역시 거리->국회의 등식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요구했다.

 

적어도 최장집교수와 강재섭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라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유사성의 원인은 뭘까?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한다. 최장집 교수는 그동안 정치경제적 이슈가 정당 분화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의 진보정당 지지는 균형잡힌 정당 제도를 바라는 일종의 '미적 태도' 이상은 아니다. 강재섭이야 당연히 국회로 이슈를 가져오고 싶을 것이다. 일단 180석에 육박하는 안정적인 의석이 있으니 뭐든 주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리라. 이런 강재섭의 꼼수는 찌라시s와 공명한다.

 

다시 대안을 생각하면, 제도적 해결방법과 비제도적 해결방법만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일종의 제3의 길이 있지 않나 싶다.

 

 

3. 투표와 투표사이

 

선거라는 것이 단 하루의 우발적이고 감성적인 결정으로 4년이나 5년간의 '지배자'를 뽑는 장치에 불과하다면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현행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어 한번 내려진 '투표'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투표 자체는 매우 중대한 정치적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정치적 행위가 4년이나 5년의 장기적인 지속성을 가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투표와 투표사이의 정치가 중요해진다.

 

나는 진보정당이,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관심을 가져야할 공간은 바로 투표와 투표 사이의 정치적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라는 문제라 생각한다. 진보정당이 제도와 비제도의 사이에 존재하는 준제도적(그도 그럴 것이 정당은 제도의 산물이지만 의석이 없다면, 제도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방식들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인 방법들은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국민청원제도, 각 행정사항에 대한 의견 개진 운동, 일상적인 시민발언활동 조직 등등) 그래서 최장집과 강재섭이 수렴하는 이상한 상황도 벗어나면서, '법적 테두리에서 할만큼 하고 시위를 하라는' 도덕적 상징재를 무력시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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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이명박' 그 자체다

트랙팩님의 [촛불집회를 말하다.] 에 관련된 글.

 

최근 촛불집회에 대해 이런 저런 해석들이 가해지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들은 미디어들이 내놓고 있는데, 대부분 '자발성', '수평적 관계망; 네트워크?','다양성'이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해석의 문제중 하나는, 현재 촛불집회의 성격이 '과거의 운동방식'(이라고 명명된) 조직화된 집회의 논리적 대척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과거 과격폭력운동의 상징으로서 '노동단체'의 투쟁은 급격히 평가절하되고 있다.

 

두번째 문제점은 그 다양성에 있다. 애국가가 불려지고 항의의 상징으로 태극기가 나오는 상황은 지금의 국가를 극복함으로서 얻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즉, '합리적이고 존중할 만한 대한민국'의 건설인 것이다. 이로써 '국가를 말하지 않기'라는 암묵적인 운동적권적 합의는 무의미해졌다.

 

나는 그래서 이번 촛불집회는 민중의 우발성을 보여주는 징표임과 동시에, 자본주의적 질서체계의 안정화로 귀결될수도 있는 사건으로 생각한다.

 

1. 우발적인 사건과 과잉된 의미

 

실제로 촛불집회에 참여를 해보면 이 집회를 통해 주장하는 바는 간단하다. '고시철회'와 '재협상'.

중요한 것은 이런 주장들이 현 이명박 정권하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요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상 재협상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과정에서 결정적인 장애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한미FTA라는 미-한 자본의 요구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쇠고기 재협상 자체가 한미 FTA의 핵심적인 고리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 축산업계-미 정계 커넥션에 의해 외삽된 '추가 요구'의 성격에 더 가깝다.

 

오히려 이런 의미를 오판한 것은 이명박이었다. 그런 점에서 쇠고기 검역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이명박 정부의 오판에서 불거진 우발적인 사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급진화 요구로도 받아들이수 있는 부분이 있는걸까? 개인적으론 있다고 생각한다. 집회에서 요청되는 '민주공화국'에 대한 언급과 '국민주권'에 대한 합의는 이전의 어떤 상황보다도 민주주의를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이런 민주주의의 심화 기획은 오히려 '건전한 대한민국'의 건설이라는 국가주의 틀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한 항의를 배제한다는 측면(최근 '다함께'의 배제는 이런 움직임을 보여준다)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2. 자본주의체제의 합리화

 

만약 이번 촛불집회의 최소공약수가 '체제내의 절차적 합리성' 부분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면, 현재 서 있는 체제 내와 외의 경계에서 오른쪽으로 넘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집회 참가자 자체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부분은 놀라울 정도다. 이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아니 이 부분만 주목하더라도 이번 촛불집회의 의미는 중대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절차성'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의 심미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오히려 검역주권으로 칭해지는 '국가의 경계'를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자본과 노동에 대한 상이한 기획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물론 과도한 비관적 관점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정치'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한다. 솔직히 촛불집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판단하더라도, 국가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치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벡터'의 방향성이 아니라 '벡터' 자체의 등장에 있다. 방향성은 이후의 정치적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만, 각각의 시민들에게 '벡터의 성격'이 나타난 것은 대단한 것이라고 믿는다.

 

'촛불집회'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지금의 한계에 놓여 있다. 만약, 쇠고기의 문제가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함께 FTA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안티 이명박'에 갖힌 촛불집회는 체제 내적의 자기 갱신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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