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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4
    [빌어옴]최근 읽은 글 중 최고!!(1)
    평발
  2. 2008/06/24
    촛불의 이해득실
    평발

[빌어옴]최근 읽은 글 중 최고!!

배병삼이라는 교수는, 도올선생과 함께 논어를 공부했다는 것 정도 밖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한겨레에 싣곤하는 칼럼은 정말 읽을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빌어온 글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글이다. 리더쉽의 문제에 대해 고민, 고민하게 만들다. 독백의 구조라... 무시무시하다. 역시 愼獨의 가르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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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배후의 리더십 / 배병삼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영·정조 시대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였다. 특히 정조는 경학에 밝았다. ‘경연’이란 본시 신하가 임금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정조는 도리어 그 자리에서 신하를 가르쳤다. 그가 던진 질문은 정약용 같은 신예에게조차 평생 화두가 될 정도였다. 이런 정조의 위상을 군사(君師)라고 칭한다.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뜻이다. 큰 영예다. 플라톤이 꿈꾼 이상적 군주, ‘철학자·왕’을 몸소 시현한 셈이다.
 
한데 정조가 죽자 정국은 곧 세도정치라는 반동으로 추락한다. 하면 어째서 황금기가 그토록 짧고도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을까? ‘임금이자 스승’이라는 영예 바로 그 속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맹자라면 이 지적에 찬동하리라. 그는 전국시대 혼란의 뿌리가 “스승 되기 좋아하는 버릇”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임금들이 자기 가르침을 받는 신하는 좋아하지만, 임금을 가르치는 신하는 싫어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

 

힘으로 말하는 사람이 권력자요, 이치로 말하는 사람은 스승이다. 둘 다 혼자서 말하고, 또 아래를 향해 말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니 ‘스승이자 군주’의 말은 힘으로나 이치로나 거역할 수가 없다. 여기서 완벽한 독백의 공간이 탄생한다. 독백 속에는 권력은 가득 차 있지만, 함께하는 정치는 부재한다. 세도정치의 씨앗은 ‘군사’인 정조가 뿌린 게 맞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약용은 대화와 논쟁 속에 정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에게 부친 편지 속에서 요순 정치의 핵심이 “제 목소리로 스스로 말하기”에 있다고 들뜬 필치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정조의 통치가 독백적 구조인 탓에 파산하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길은 소통, 즉 대화와 논쟁을 통해 정치를 복원하는 데 있음을 그는 알아챈 것이다.

 

최근 대통령은 총리를 위시한 각부 장관과 청와대 참모진을 대대적으로 교체하려 한다고 들었다. 아마 맹자라면 대통령을 가르칠 정도의 인물을 선발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조언할 것이다. 또 말은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고, 대통령에겐 듣기를 권할 것이다. 듣는 귀는 말하는 입보다 높이 달려 있으므로, 귀담아들으려면 몸을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곧 일을 제대로 알려고 든다면, 겸손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정치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점도 지적하리라.

 

한편 다산이라면 현 정국의 문제가 보고하고 지시하는 회의 방식에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앞 정권의 “계급장 떼놓고 토론하기”는 지나치다 하더라도, 제 목소리로 제 주장을 내세워 쟁론하는 회의 방식은 꼭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할 테다. 이름은 ‘회의’(모여서 함께 의논함)라고 해놓고 윗사람 혼자서 말하고 나머지는 듣고만 있는 것은 조그만 학교에서 큰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병폐다. 요컨대 국무회의든 참모회의든 자기 업무를 담당자들이 큰 소리로 주장하고 대통령은 그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기, 이것이 다산이 권하는 회의(소통)의 모습이라는 것. 덧붙여 대통령을 뜻하는 영어, 프레지던트(president)가 본시 ‘사회자’를 뜻함은 이 대목에서 함께 참고할 만하다.

 

독백 속에는 ‘함께, 더불어’가 부재한다. 내 사람을 공공기관에 심는 것도 고작 독백의 구조를 확산시킬 따름이다. 독백적 조직은 너의 것일 뿐 우리의 것일 수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그 책임 역시 단 한 사람에게 귀결한다. 나머지 사람에겐 그들의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사태가 지목한 것도 오로지 한 사람이었고, 그 촛불을 끌 사람도 단 한 사람뿐임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 “필요한 게 뭡니까?”라고 묻는 배후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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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이해득실

아무래도 말들이 쏟아지는 형국인지라, 여기에 한 스크롤을 얹는다고 티도 안날 지경이다.

그러니, 읽고 읽는 수 밖에. 하지만 2mb의 오만한 반격이 예정되어 있는 작금의 상황은 다시금 머리를 굴리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궁금했다. 당최 촛불정국에서 이익을 본자와 손해를 본자가 누구냔 말이다. 모든 것이 '선택이론'에서 와 같이 이해관계에 따른 합리성에 근거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향후 정국의 '예상'을 하는데 나름의 기준을 삼기위함이다. 뭐, 술판에서 흔히 있는 감상비평을 벗어나진 않겠지만.

 

1. (다시) 최장집과 하승우

 

뭐, 대응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이 대립항 밖에는 없다. 최장집은 얼마전 퇴임을 하면서까지 '정당의 제도화'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가 쓴 '이명박정부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되나?'(비평, 2008년 여름)를 보면 그의 생각이 잘 정리되어있다.

 

쉽게 보면, 원래 정치제도는 운동-제도-권력의 세개항으로 구성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당이 개판이라 운동-권력의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이런 이면엔 과도하게 집중된 '대통령의 권력'이 있다. 따라서 의원제 개헌이 필요한데, 당장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정당체계부터 운동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정도. 반면 하승우는 촛불을 그간 정치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볼 것을 주문한다. (이는 매우 의미있는 반전이라고 생각한다.)[MB없는 대한민국을 상상하자] 그리고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최초의 공식적인 시민성을 획득한 이번 사건에 주목하자고 말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제도정치는 기본적으로 배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그런데 이번 촛불은 배제되었거나 배제될뻔한 것들이 날 것으로 등장했다. 제도가 이를 포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직접행동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제도 정치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은 불필요하니 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정도.

 

재미있는 것은 한동안 악명을 떨치던 '다중'이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것이며,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 다중과 집단 지성

 

개념은 구별 지음을 통해 확정된다. 그러니까 다중은 다중이 아닌 것과 구분되고, 집단 지성은 집단지성이 아닌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뭐 대략 '이 정도?'식의 가늠으로는 공허한 말장난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내 생각으론, 다중과 집단지성이 가지는 엄청난 포용력(설명력이라고 해도 좋겠다)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사후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본다. 무엇이 다중이고 무엇이 집단지성인지는 사후에 명명되는 것이다. 또한 하승우는 민중 대신 다중을 주장하지만, 민중이라고 불리던 대상이 어떤 질적 도약을 통해 다중이 되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부적절하다. 역으로 다중이라고 불리었던 것이 민중도 될 수 있고, 대중지성이라고 불렸던 것이 대중독재의 근거가 되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과 하승우의 차이는 분석과 해설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3. 조중동과 한겨레, 그리고 경향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한겨레와 경향의 차이를 많이 느끼는 편이다. 뭐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한겨레는 여전히 계몽적 성격이 강한 '선동성'이 있는 반면, 경향은 르몽드나 네이션과 같이 '지성지'의 포지션을 갖는다고 본다. 그래서 한겨레는 당파성이 존재하고, 경향은 유연한 균형감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최근 <시사인>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6% 가량이 구독하던 신문을 바꿨는데 첫번째가 한겨레로 바꿨고, 두번째가 동아일보로 나왔다(뭐, 이런 병~~ 똥차 피한답시고 쓰레기에 처박히는 센스하곤). 재미있는 것은 경향으로 옮겨간 이들이 너무 적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부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경향 걱정을 더한다. 왜냐하면 완전 위기라는 설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 미움 받고 있지, 돈 될만한 광고는 안들어오지...

 

(흥미로운 건 경향은 최장집과 겹치고, 한겨레는 하승우와 겹친다는 것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4. 어쨌든 맞짱의 시간이 오는 걸까?

 

그런데, 제도정치의 안정화든 직접행동의 다양한 가능성이든, 당장 싸움을 걸고 들어오는 2mb와 어떻게 대응할까가 문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역시 보수 우익의 레토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정체성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누군가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젠장!!

 

촛불의 피로감이 그 특유의 천민성때문에 청와대의 귀족적 피로감보다 빠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춧불들은 돈을 써가며 거리에 있지만, 청와대나 정부에 있는 놈들은 어떻게 뻐기든 한달에 한번씩 꼬박꼬박 세금을 받아가지 않는가? 당최 피로감이 쌓일 이유가 없는 거다.

 

누군가, 6월 28일에 150만이 모이자고 격문을 썼다.

 

난 리니지 등의 온라인 게임을 하진 않지만, 공성전에 돌입할 때의 긴장감이 이런 것인가 싶다. 아자 아자.

 

참, 그래서 최장집과 하승우 중 누구냐면 머리는 최장집, 심장은 하승우... ^^ 안될까? 신문은 경향이 많이 컷으면 한다. 폼나는 지성지로...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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