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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문제다.
100명이 사는 동네에서 대표를 뽑는다.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따른다고 하자.
산술적으로만 보자면, 51명이 넘는 지지를 얻은 쪽이 대표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 다수제의 의미인 민주주의에 부합한다.
그런데, 후보가 3명이라고 하자. 박빙이다. 그러면 어느쪽이든 34명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 역시 다수제의 원리에 부합한다. 어떤 나라에선 이를 다수의 지지로 만들기 위해 결선투표제라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한다. 그래야 다수의 지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몇 해전 프랑스에서 우익이었던 국민전선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선거연합이 일어났다. 이는 결선투표제의 결과이다.
지난 1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지난 총선의 대표성 문제를 제기했다. 정리된 표가 바로 옆의 것이다.
경기 안산상록을에서 당선된 홍장표라는 사람을 보자. 전체 유권자가 11만명인데 그를 지지한 사람은 1만명 남짓이다. 유권자의 13% 지지만으로 지역의 대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사람 뿐인가? 수두룩하다.
이거 이상하지 않은가? 난 이런 제도를 민주주의라 배운 기억이 없다. 다수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13%의 지지만으로 지역 대표가 되다니, 이는 민주주의의 배반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 것'도 정치적 의사표현의 방식이라 한다. 다시말해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행위로서 유효하려면, 행위의 영향이 나타나야 한다. 고작 13%의 지지만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해놓고도 '이거 잘못되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귀찮아서이건 정치적 목적에서건 투표 당일날 집을 나서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정치적으론 '샘샘'인 셈이다.
이들이 적극적인 정치행위로 '귀찮아서 투표하지 않은 사람'과 구별되려면, 일단 투표소엔 가야했다. 그리고 백지로 기표함에 넣던지, 아니면 고의로 무효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 표가 적어도 13%보다 많았으면, 아니, 그런 무효표가 1위와 2위의 격차보다 컸으면 선거자체가 무의미했다.
결국, 어떤 의미도 없는 정치적 행위(라는 자기위안) 덕분에 13%의 지지는 '적극적 의사표명 집단의 과반수'라는 의미를 획득했다. 여기서 나부끼는 것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자들은 발언할 기회가 없다는 깃발이다.
이런 구도하에서 최연희가 또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가 우리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만만세!
나는 기권이 아니라 무효표를 조직하는 운동이, 선거 보이콧이라는 명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만 시골 내려가 자급자족하면 세상이 바뀌나? 그리고 이 놈의 민주주의에 대한 것부터 뜯어 고치는 운동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최소한 다수제라도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는 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에 반면, 지속적으로 풀뿌리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하다. 하지만 풀뿌리 운동을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상정하게 되면 지는 싸움이 된다. 이는 구조의 문제다. 구조는 거시적인 작동원리에서 부터 미시적인 조작체계까지 개입해야 바꿀 수 있다.
개인의 각성도는, 원칙적으로, 집단의 각성도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아무리 훌룡한 민주주의자가 있어도 지역감정이, 학연/지연이 판을 치는 집단에서는 힘도 못 쓰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뭐 하자는 거냐'고 짜증이 날테지만, 적어도 난 '선거제도'를 바꾸는, 절대 만만하지 않는 싸움을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게 다른 어떤 주장보다고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우선적인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진석, 민주주의 문화는 폭력의 다중적 상징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시대와 철학 2007 제18권 3호
- 거꾸로,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 목적합리적인 제도나 상황으로 설정하며, '공적인 공간'을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이성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상적 공간으로 해석한다. 곧, '공적인 공간'을 마치 폭력이 사라진 공간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공간으로 이해한다.(423-424)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민주주의 문제는 결국 폭력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밑의 폭력과 제도 위의 폭력이 거론될 뿐이다. 결국 현실의 민주주의체제를 응당 '이래야 한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혼동하는 것 아닌가 싶다. |
- 나는 민주주의를 '협의적 민주주의'로 정의하려는 이론적 시도들과도 거리를 취하고 싶다. 그 시도들은 현재처럼 갈등이 많은 사회에서 다른 어떤 관점보다 협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장점을 갖기는 하지만, 그 이론에서는 여전히 폭력적 상황에 대한 주의가 부족하거나 없다. 담론을 통해 발화되고 주장된 이야기들은 그 담론들이 권력이나 폭력과 맺는 관계를 떠나서는 제대로 분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428)
[ 법의 지배 문제]
- 법에 의한 정의를 민중의 직접적 의지의 표현이나 실행이 아니라 특정 시험을 통해 선발된 소수 엘리트에 의한 정의의 해석이라고 할 때, 문제는 복잡해진다.(429)
- 한 예로 월린은 헌법을 통한 제도화가 민중적 동력을 통제 혹은 억압하는 계기이자 민주주의의 퇴행을 가져온다고까지 말한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민중이 중심이 된 반란적 계기를 의미하며, 그런 관점은 극단적으로 민중적 민주주의에 닿는다. ... 여기서 형식적인 헌정주의와 민중적 동력을 강조하는 관점 사이에서 정치적 균형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게 떠오른다. (430-431)
소위 민중헌법 제정을 통한 혁명을 골자로 하는 '21세기 혁명'의 양상은 베네수엘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활용하는 것은, 다른 어떤 맥락에서 보다 과거의 지배계급을 억누를 수 있는 정당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런 점에서 헌정주의는 그 자체로 초기적인 양상을 띤다. 김진석이 이 한계를 지적한 것은 옳지만, 시계열상에 배치해 사태의 선후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헌정주의의 초기단계가 민중적 역동성으로 수렴될 수 있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다. 물론, 21세기 현재의 조건에 한정지어서. |
[민주주의의 속성]
- 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자신의 근거를 삼는 정치적인 것 내부에서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또 정치적인 것의 지배와 법적인 것의 비재 사이에서도 심각한 균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사회의 복잡한 권력 및 폭력관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434)
[폭력의 상징화 전략]
- 사람들은 한쪽으로는 시장을 통한 과도한 경쟁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반면에, 다른 쪽 사람들은 오히려 그 경쟁이 나쁜 폭력을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배제하려고 한다. 사회적 폭력의 성격에 대한 평가나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평가하는 것을 끝없이 미루기만 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상징적 추상화에 기댄다. 다르게 말하면,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폭력'이라는 이름은 금기로만 존재하는 듯하다. 보수적 집단에게는 그것은 시장적 경쟁이나 질서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고, 진보적 집단에게는 그것은 거꾸로 무조건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만 여겨진다. (444)
폭력의 상징화는 결국 지배계급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진보나 보수의 양자는 폭력을 금기시하는 입장을 강화해나간다. 문제는 폭력이 발생하는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렇게 은폐되어진 폭력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도외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전략에 있어 실망일 수 있다. |
- 사실 민주주의 제도는 정치적으로 약자들의 이 원한을 '정당하게' 만들면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이 '원한'을 그렇게 이름 부르지 않는다. 폭력이 금기의 대상이듯, 원한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회는 폭력적 원한을 '정의'로 호명한다. 여기서 폭력은 상징적으로 배제되고 '정의'라는 추상적 명칭이 유통된다. 강자의 폭력이나 그것에 대항하는 약자의 폭력적 원한이 적나라하게 호명되지 않는 상황에서, 추상적 상징화가 팽배해진다.(446)
- 현재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들, 혹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사회적 구조들이 이미 피할 수 없이 폭력적이라고 비판되거나 비난될 때, 우리는 해결하거나 극복할 방법도 모른 채 구조와 제도의 폭력적 미로에 같히게 될 것이다.(448-449)
- 만일 교육적 문화적 복지적 폭력이 기존의 사회적이고 경제적 계급차별을 더욱 은밀하게 만들고 세련되게 승화시킨다면, 결국 이 차별들은 극복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징적 수단을 통하여 보이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더 극복하기 어렵게 된 것일 게다.(450)
김진석이 사회제도적 폭력을 폭력의 상징화라는 맥락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를 가능케하는 의의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상징화된 폭력, 그것이 이념적 구분선을 뛰어넘는 현재 정치구조내에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구조적 맥락이라는 것. 역사적으로 보면, 폭력 문제에 대한 감수성이 결국 볼세비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 까? |
- 국가의 존재를 기본전제로 삼는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이 국가의 폭력을 근대화 과정에서 생기는 피할 수 없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개별 국가의 폭력을 당연하게 혹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와, 국가의 폭력을 민주주의의 발생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관찰하는 태도는 다른 것이다.(451)
- 그렇다면 소위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것도 이상적 목적으로서의 인권이나 평등의 깨끗한 '발견'이나 '승리'라기보다는, 인간 행위들에 내재하는 폭력을 조절하는 단순한 코드들과 체계들을 복잡한 코드들과 체계들로 대체하는 과정의 산물에 가까운 듯하다. 다르게 말하면, 비민주적 폭력을 민주적 폭력으로 대체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얻어진 다소 '긍정적'이며 휴머니즘적 산물의 하나일 것이다. 그와 달리 '불길한' 산물이 있다. 폭력이 똑바로 응시되기 보다는 자꾸 타자의 시선 속으로 도망가고, 자꾸 추상적 구조의 틀에 떠넘겨지고, 자꾸 상징의 애매모호함으로 뒤덮인다는 것이다. 이 인식은 매우 중요하며 새로운 성찰과 진단을 요구한다.(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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