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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행진곡에 오스만제국은 없다

이 글은 현재 쿠르디스탄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쉬티가 시민의신문에 게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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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쿠르드족 하면 제일 먼저 이라크의 쿠르드족을 떠올리지만 사실 쿠르드족의 대부분은 터키에 살고 있고, '쿠르디스탄'이라고 불리우는 쿠르드족 거주지역의 대부분은 터키에 속해있다. 그래서 쿠르드족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터키의 쿠르드족을 이해하는 것이고, 터키의 쿠르드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터키 쿠르드족의 중심이자, 터키 쿠르드족 독립 투쟁의 중심인 ‘디야르바크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쿠르드족의 수가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이란과 이라크에 살고있는 쿠르족의 인구는 대충 밝혀져 있지만, 쿠르드족의 대다수가 살고있는 터키에서는 쿠르드족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축소하고 인구수에 따라 배분되는 중앙정부의 지방정부에 대한 교부금을 줄이기 위해 터키정부는 쿠르드족 인구를 가능한 축소하고자 한다.

일례로, 터키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디야르바크르의 인구는 50여만 남짓으로 나와있지만, 이곳 지방정부가 자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30여 만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 중 디야르바크르의 인구가 200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 주민들은 그 근거로 쿠르드족 최대의 축제인 네부루스(새해) 축제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가 100만 여명에 달하는 것을 든다. 이 100만 명은 터키 정부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사람들이고, 군인 및 교사와 공무원 등의 참석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고 또한 상점 문을 닫을 수 없는 자영업자들은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수를 모두 감안한다면 족히 200만은 될 것이라는 것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간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디야르바크르 인구의 약 20% 남짓은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쉽게 말해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존재하되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사람인 셈이다.

또한 시리아에 살고있는 쿠르드족에 대해서는 이나마도 집계가 아예 없다.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집시와 같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높은 쿠르드족의 출산율을 감안할 때 이들의 인구는 언론에 흔히 발표되는 수보다 적어도 30% 이상은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스만제국 건설과 박해

어쨌든 이들 쿠르드족의 대다수는 터키에 살고있고, 터키의 쿠르드족은 이라크의 쿠르드족과는 여러 면에서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91년의 걸프전과 이번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면서 쿠르드족의 협력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쿠르드족의 맏형 격인 터키의 쿠르드족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터키의 쿠르드족은 자본주의 제국 미국과의 협력을 거부했고 결국 미국은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손을 잡았었다.

그 결과 미국의 협력을 등에 업은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독립 쿠르드국가 건설이라는 쿠르드족 공통의 꿈에는 한발 앞서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터키 쿠르드족의 협력 없이는 독립 쿠르드국가 건설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한 터키의 쿠르드족은 여전히 자본주의 제국 미국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설혹 이라크의 쿠르드족이 미국을 등에 업고 국가로서의 독립을 선언한다 할지라도, 이는 전체 쿠르드족의 독립국가가 아닌 쿠르드족의 일부가 건설한 개인 왕국에 불과할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의 배반

터키족과 쿠르드족의 갈등의 역사를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자. 터키족이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이동해 온 것은 약 1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당시 쿠르드족은 이 지역에서 수천 년을 살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흔히들 쿠르드족을 유랑민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한 지역에서만 수천 년을 살아온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장구한 역사를 갖고있는 붙박이 민족이 쿠르드족인 것이다.

이동과정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터키족이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였던 쿠르드족은 이들을 이슬람 형제로서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이들에게 거주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제공하였다.

쿠르드족의 영역 내에서 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은 터키족은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스탄불에 터를 잡고 약 600여년전 드디어 오스만이라는 대 제국을 건설한다. 제국 건설 후 다른 이슬람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정복지역에 대단히 관대한 정책을 펼쳤던 터키족은 어찌된 일인지 쿠르드족 만큼은 엄청나게 박해를 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쿠르드족의 영토 내에서 시작된 제국이기 때문에 쿠르드족이 제국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가 아니었나 짐작할 뿐, 터키 정부의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쿠르드족의 고문서들이 소각되거나 유실되어 이를 밝혀줄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몇몇 쿠르드족의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의 박해에 항거하여 봉기하지만, 무자비하게 진압을 당하고 이후 더욱 심한 박해가 되돌아오는 과정을 겪게된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편에 섰던 오스만제국은 패전을 겪고, 연합군에 의해서 나라가 분할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당시 군인이었던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정 국가 설립을 목표로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 후, 자신이 지역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디야르바크르를 찾아와 쿠르드족 지도자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며 그 댓가로 쿠르드족 독립국가 수립을 약속한다.

이에 쿠르드족은 케말과 함께 터키 공화국 설립에 커다란 기여를 한 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역시 케말과 함께 이번에는 연합국 측에 서서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케말은 쿠르드족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이후 쿠르드족은 여러 차례의 산발적인 봉기를 통해서 약속 이행을 요구했고, 케말은 이를 잔인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쿠르드족 지도자들이 터키군에 의해 살해를 당한다. 디야르바크르 시내 한 복판에 딜란 시네마라는 현대식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 극장이 있는 자리는 원래 이때 살해당한 쿠르드족 지도자들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덤은 손상하는 것은 망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로 이슬람에서는 철저하게 금기시되고 있는 행위이다. 그 무자비했던 사담 후세인마저도 무덤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직도 저항세력이 마지막 항전 장소로 공동묘지를 택하는 모습을 이라크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미국은 이슬람 사회에서 무덤 훼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을 향해 총과 대포를 발사할 수 있었지만,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이슬람국가 터키에서 터키 정부가 무덤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극장을 세웠다는 것은 터키 정부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압둘라 오잘란과 PKK

그 후 1970년대 후반 ‘압둘라 오잘란’이라는 정치 지도자가 사회주의 성향을 쿠르드 노동자당을 설립한다. 흔히 우리에게 테러 조직으로 알려진 PKK다. PKK는 쿠르드족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터키 정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터키 정부는 이를 번번히 묵살한 후 탄압한다. 이에 분개한 PKK는 1980년대 중반부터 정치 투쟁을 무장 투쟁으로 전환한다.

그러다가 1990년 PKK는 터키 정부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후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한다. 그러자 터키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쿠르드족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에 돌입한다. 그 후 약 10여 년 간 약 4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이 터키 정부군과 터키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무장세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 터키 정부에 협력했던 일부 쿠르드족 사람들이 PKK에 의해 처형을 당하자 터키 정부는 이 모든 학살이 PKK의 짓이라고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터키 정부는 PKK가 공식적으로 부장 봉기를 선언한 1984년부터 2002년까지를 “특별한 전쟁상황”이란 정말 ‘특별한’ 표현으로 이 전쟁이 내전이나 쿠르드 독립전쟁이란 것을 부정하고 있다. 1999년 압둘라 오잘란이 터키 정부에 의해 체포되면서, 오잘란은 모든 쿠르드족 게릴라들에게 터키를 떠나도록 지시한 후, 2004년 5월 1일까지 일시적인 휴전을 선언하며 이 휴전기간 중에 터키 정부가 쿠르드족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후 PKK는 단 한건의 군사행동도 실시하지 않은 채 이라크 등 인근 국가로 은신한다. 하지만 터키는 더욱 본격적으로 게릴라 소탕작전에 나서 심지어는 국제법마저도 위반한 채 이라크의 쿠르드족 영내 깊숙한 곳까지 군대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이는 아직도 진행중에 있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PKK가 군사작전을 중단한 1999년에 터키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서방 정보기관들이 PKK를 테러단체로 분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터키 정부는 이에 관해 유럽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1990년대 초반 3,000에서 4,000에 달하는 산간지역의 쿠르드족 마을에서 터키 정부는 주민들을 모두 몰아내 버린다. 이들 마을이 게릴라의 근거지라는 것이 터키 군부가 내세운 이유였지만, 이는 쿠르드 언어와 전통문화를 금지한 것과 연결된 터키 정부의 쿠르드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들 마을에서 쫓겨난 쿠르드족 대부분은 난민 아닌 난민이 되어 터키의 도시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분명 국내 난민임에도 불구하고 난민 대접을 받지 못한채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 중 소수는 유럽 등지로 이주하여 난민 지위를 부여받았고, 또 소수는 이라크 등 인근 국가로 이동하여 난민촌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 중 일부가 지난번 기사에서 이야기했던 이라크의 마흐무르 캠프에 살고 있다.

1990년대 쿠르드족과의 내전과 함께 막대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터키 정부는 그 해결책으로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한다. 그 과정에서 유럽연합의 압력으로 90년대 중반부터 쿠르드 족에게도 약간의 자유가 주어진다. 1999년에는 지방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터키에서 최초로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정당 해산을 당했던 쿠르드족도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여 이 선거에 참여하였고, 첫 번째 선거에서는 38개 도시에서 그리고 2004년 치러진 두 번째 선거에서는 68개 도시에서 선거에 승리하여 쿠르드족 시장과 의회를 배출한다.

하지만 터키 정부가 쿠르드족에게 완전히 지방정부의 모든 권한을 내줄 수는 없으니, 고민하던 터키 정부는 독특한 행정 체계를 고안해 낸다. 바로 한 지역에 두 개의 정부를 두는 것이다. 한 개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상적인 지방 정부이고, 다른 한 개는 중앙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시장이 총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권력은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총독에게 부여되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방 정부는 문화 등 극히 한정된 권한만을 갖는다.

물론 이 시스템은 쿠르드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전체 터키에 적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시스템은 쿠르드족 지역에서 특히 중요하게 작용을 하고 있으니, 중앙정부에서 임명된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있는 총독은 바로 터키족이기 때문이다.

터키족 지역에서 이 두 정부는 서로 협력 보완을 하는 관계이지만, 쿠르드족 지역에서는 상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선거로 구성된 지방 정부가 추진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웃지 못할 헤프닝이 발생한다.

다음 호에서는 이런 헤프닝을 소개한다.

터키=아쉬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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