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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3호, 2000년 3월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


1. 평가들

  공권력과 대치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재취업, 리콜, 고용안정 기금 등 대책 있는 정리해고의 부분적인 수용을 통해서 고용안정 국면을 돌파할 것이냐, 아니면 공권력과 한판 투쟁을 벌이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냐……김광식 위원장이 막판에 정리해고를 조건부로 수용할 때 다음과 같은 심정이었다고 피력했다. "제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이기까지 3일이라는 시간은 그야말로 내 인생의 반 이상이 지나간 듯한 고통과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제가 정리해고 최소화 문제를 접근하게 된 단 한가지 이유는 바로 공권력에 의한 대량 살상을 막고 수백 건에 이르는 고소·고발이 불러올 가정 생계 문제를 막고 노동조합 파괴를 막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상집 평가서, 현자노조신문 12-7호, 1998.12.

  우리는 정리해고 철회에만 매달려 왔다. 어쩌면 발목이 잡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리해고가 필요한지 회사의 경영상태를 노사 공동으로 분석해 보자는 주장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정리해고 대상자의 선정 기준에 대해 논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사측이 정한 인사고과(근태, 징계 등)가 적용돼 다수의 활동가들이 포함되고 잘려나가는 최악의 결과가 빚어졌다. 물론 정리해고 철회가 최선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집행부, 대의원, 소위원, 활동가, 열성조합원들이 힘을 모아 차선을 위한 논의를 하고 준비를 했더라면 8.24 잠정합의안보다 훨씬 내용 있고 명확한 안을 쟁취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측의 일방적인 합의 파기와 정리해고자 선정이나 배치전환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천창수,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남긴 과제', 『연대와 실천』98.9.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을 강요한 가장 큰 장본인은 바로 '한국 집어삼키기'를 목적으로 한 IMF……외세의 '노조 말살 음모'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민주노총, 금속연맹 지도부를 비롯한 현자 집행부는 당시 정세를 재벌의 문제로 협소하게 봄으로써,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설정 못하였고 정작 싸워야 할 대상에게는 힘을 집중하지 못하여 제 때에 투쟁을 확전(전민중적인 투쟁전선으로)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원인과 과정이 불분명한 '정리해고 반대' 투쟁은 이데올로기전에서부터 밀려 힘있게 투쟁을 조직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현자 실노회, '98년 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평가', 1998.12.

  이번 투쟁은 정리해고 분쇄와 생존권 사수라는 조합원들의 분노를 전혀 조직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집행부가 보여준 최악의 상황이었다. 또한 이러한 무능력하고 기만적인 김광식 위원장을 현장으로부터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현장활동가들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투쟁이었다.……상층부 운동가들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인해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면서 내용적으로 전국성을 띤 현자의 정리해고 분쇄투쟁이 단위사업장의 투쟁으로 매몰되고 말았다.

하수봉, '누가 밀실협상, 직권조인을 아름다운 투쟁이라 하는가?', 1998.12.

  98년 현대자동차 파업투쟁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무엇보다 공권력의 살상을 막은 아름다운 투쟁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비판하고 있지만, 98년 여름의 퍼즐 맞추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어떻게 보면 98년 현대자동차 파업투쟁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모했던 대형 이벤트였다. 지도부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던 3개 현장조직은 물론 대소위원, 중간 활동가, 평조합원들까지……모두가 위계질서와 운동의 대의라는 명분, 현실적 한계라는 핑계를 대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동의를 하고 암묵적인 공조체계를 유지했고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소통 부재의 현장, 세기말 한국 노동운동의 맨 얼굴이 거기에 있다.

임인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세기말 현장보고서, 1999.11.

  277명 정리해고 수용……현자가 협상으로 끝나자마자 만도는 공권력으로 평정됐다.……물론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낸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던 조합원 동력을 보았다면 싸워서 깨지더라도 '이긴' 싸움이었다. 공권력에 맞서 장렬하게 투쟁했더라면……지금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한 자본과 정권이 타사업장에서 일방적으로 정리해고 칼날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5기 민투위, '현대자동차 생존권사수투쟁 평가서', 1998.9.

  98년 현대자동차 투쟁은 객관적으로 전계급적 관심과 파급력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한라중공업 투쟁과는 비교되지 않을만큼 훨씬 긴장이 높았다.……그러나……현대자동차 지도부는 대중의 투쟁 의지를 끊임없이 교섭이라는 제한된 틀 내로 가두었다. 이것은 대중(투쟁동력)이 투쟁 과정 속에서, 스스로 발전 계기나 전망을 잡지 못하고, 지도부의 교섭을 강화하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 주요한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해 현대자동차 지도부는 대중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투쟁 의지를 강화하는 방향에서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동력을 소진하고 갉아먹는 형태로 투쟁을 이끌어갔다. 그 결과 대중투쟁동력과 교섭이 투쟁을 상승시키는 계기로 작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제약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현대자동차 투쟁이 외견상으로는 '국가의 폭력'을 직접적 형태로 불러들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 압력(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리해고'에 대해서도 국가와 자본이 일방(폭력)적으로 관철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보다는 거꾸로 노동자가 선택하는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노동자의 힘(준비모임), '결코 꺾이지 않은 미완의 투쟁', 1999.11.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은 정리해고 문제를 첨예한 사회적 쟁점으로 연일 부각시키면서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표·대리전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다. 이 투쟁은 1998년 8월 24일 김광식 집행부가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일단 '패배'로 끝났지만, 곧바로 있었던 9월 1일 조합원 총회에서 63.6%의 반대로 잠정합의안이 부결되고 이후 '정리해고·무급휴직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정투위), '정리해고자 생계대책위원회'(생대위),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면서 패배가 아니라 '미완의 소규모 장기전'으로 지속되었다. 이 '장기전'은 1999년말 무급휴직자들이 전원 복직되고 2000년 들어와 정리해고자 조기 복직이 거의 확실시됨으로써 1차 마무리되었고, 7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출근투쟁 속에서 지금도 굽힘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투쟁을 둘러싼 평가들은 아주 다양하게 제출되었다. 평가들은 '대책있는 차선'으로서 정리해고 최소화를 주장하거나, 반(反) IMF 전선으로의 '확전'을 주장하거나, 상층 지도부의 무능력과 기회주의를 성토하거나, 파업 현장에서의 평조합원과 지도부와의 의사소통의 부재를 개탄하거나, 싸워서 깨지더라도 조합원을 믿고 공권력과의 일전을 불사했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1992년 초 현대자동차 성과분배투쟁의 '패배'를 둘러싸고 '노동운동 위기론'으로 평가와 논쟁이 확대된 것처럼 이 평가들이 공개적이고 대대적인 노선 논쟁으로까지 확장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쟁점들은 1999년 2월의 금속산업연맹 2기 임원선거와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전개 속에서 모습을 달리 하며 부단히 재생산되었다.

  여기서는 지난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의 전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봄으로써 쟁점이 되었던 지점들을 드러낼 것이다. 그 쟁점들은 지금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둘러싼 '낯익은' 쟁점들로 계기마다 되살아나고 있는 것들이다.

2. 첫 번째 양보 - 희망퇴직 합의

  이른바 'IMF 국면'에 접어든 1997년 11월 이후 현대자동차 자본은 '1998년 인력관리 운영계획'을 통해 1998년 한 해에만 총 3,001명의 여유 인원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7년 말부터 자본은 하청 노동자 1,800여명을 쫓아내고 1998년 들어와 회사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에 대한 명예퇴직을 실시하여 800명 이상을 '정리'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1998년 1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쟁의행위를 결의하고 '단협 사수, 고용 안정, 민중생존권 사수를 위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월 15일 조합원 찬반투표를 실시해 83.8%의 찬성으로 쟁의행위를 결의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여 1998년 2월 6일 새벽, 2년간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를 조기에 받아들이는 노사정 합의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나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직권조인'된 노사정 합의안을 부결시키고 상근 임원 전체의 퇴진과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결의했다. 2월 10일 비상대책위원회는 2월 13∼14일의 총파업투쟁을 결정했다. 그러나 2월 12일 비상대책위원회는 8시간의 회의 끝에 다시 총파업을 철회해버렸다. 바로 이날 대우조선 최대림 조합원은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에 전조합원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며 분신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로 전국 투쟁전선이 무너지고 2월 14일 임시국회에서 유예조항이 삭제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통과됨으로써 이제 자본의 정리해고 공세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전공장에 걸쳐 잔업이 축소되고 일방적 배치전환과 집단 순환 휴가가 실시되었다.

  노동조합은 2월 19일 '중앙비대위'를 '고용안정대책위'로 전환하고, 3월 23일 노사실무협의에서 집단 휴가시 통상임금 70% 지급과 '고용안정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노조가 스스로 단체협약을 위반한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캐피코 노조나 현대정공 노조에서는 집단 휴가 시 단협에 의거 통상임금 100%씩을 쟁취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이 합의는 이후 다른 사업장에서의 집단 휴가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3월 24일 노동조합은 조합원 총회에서 76.8%의 찬성으로 금속산업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연맹의 중앙교섭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대각선 교섭은 자본측의 제3자에 대한 교섭권 위임 때문에 내용 있는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위노조 보충교섭 또한 자본측의 불참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6월 12일 이 때 위임된 교섭권을 재위임받아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로 협상 구조를 전환하게 된다.

  4월 들어서 승용 2공장 아토스 라인을 제외한 모든 라인에서 야간 작업이 없어지면서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져갔다. 노동조합은 4월 7일부터 매곡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조합원 밀집지역 순회 간담회'에 들어갔다. 4월 8일 노동조합 주최로 현장조직들이 참여한 2차 현장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현대자동차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실천하는노동자회'(실노회),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현노신), '한빛노동자회'(한빛) 등 현장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개선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주장에서부터 "현실적 양보교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를 제출했다. 4월 10일 노동조합은 '고용안정대책위'를 다시 '중앙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했다. 이날 '고용안정 쟁취 결의대회'에는 12,000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하여 높은 투쟁 결의를 보여주었다. 4월 17일 노동조합 중앙비대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주당 38시간으로 근무시간 단축, 주간 연속 2교대제로 근무형태 변경, 배치전환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조합의 제안을 무시하고 4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일방적으로 1차 희망퇴직 모집에 들어갔다. 통상급 4∼6개월치가 위로금으로 주어졌고 2,000명 가깝게 퇴직했다. 자본은 4월 23일 23%의 임금 삭감과 15,000여명에 대한 인원 정리를 의제로 하는 임시노사협의회를 4월 30일 개최하자고 요구하면서 정리해고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노동조합은 4월 25일 '일자리 지키기 걷기 대회 및 조합원 가족 한마당'을 열었다. 2만여명의 조합원들이 가족과 함께 공설운동장에 모여 태화강 둔치까지 걸어갔다. 4월 27일 휴가 조합원 3,000여명은 태화강 둔치에서 집회를 갖고 시청을 항의방문했다. 이 날 17명의 울산광역시의원들이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3만여명의 조합원, 학생, 빈민, 사회단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제108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집회가 열렸다. 이갑용 민주노총 2기 지도부는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및 부당 노동행위 근절,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고용·실업 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해체·노동3권 보장·노동자 경영참가, IMF 재협상' 등 5대 요구를 중심으로 5월말 6월초의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행진과정에서 격렬한 거리투쟁이 벌어졌다.

  5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2차 희망퇴직이 실시되었고 1,50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5월 19일 노동조합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쟁의발생을 결의했다. 자본은 5월 20일 '경영위기 극복 및 여유인원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 수정안'을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제시하면서 2,200여억원의 임금 삭감과 8,189명에 대한 2년간의 무급 휴직·정리해고를 기정사실화하여 노동조합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이 날 노동조합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본관 건물 로비에서 '강제 희망퇴직 중단'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강제 희망퇴직 당한 52세의 한 여성 조합원은 "나 혼자서 4명 가족 먹여 살리는데 퇴직금 2,000만원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죽고 말겠다"며 대성통곡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현장조직 민투위는 5월 들어 '주 35시간 이하로 노동시간 단축, 1일 7시간 주간 연속 2교대로 근무형태 개선,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통상임금 100% 보전과 생계비 부족분에 대한 고정 OT 확보, UPH down을 통한 적정 노동강도 유지와 생산량 조절'이라는 정책 대안을 정리하여 소책자로 제작·배포하고 조합원 중식 홍보투쟁 등을 벌여나갔다.

  5월 25일 조합원 총회에서 89.4%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총파업투쟁이 결의되었다. 5월 27∼28일 민주노총이 1차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틀동안 49개 노조 77,000여명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1차 총파업 지침에 따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도 27일 오후 1시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2만여명의 조합원들은 본관 앞에서 투쟁 결의대회를 갖고 오토바이 수천대를 앞세워 태화강 둔치까지 2시간을 행진하여 지역 집회에 참석했다.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와 열기는 그만큼 강렬했다.

  5월 29일 기아자동차의 송인도 조합원이 분신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6월 1일 '체불임금 지급과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6월 5일 6.10 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은 전국 총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2차 총파업 철회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또한 현대자동차만의 투쟁으로 고립되게 되었다. 한편 6.4 지자체 선거에서 울산지역 민주노조 후보 11명이 구청장과 시·구의원에 당선되었다. 6.10 총파업 철회에 대해서는 "5/27, 28 총파업투쟁에서 대중적인 동력이 급속히 되살아나고, 2기 지도부가 강력한 투쟁력으로 이를 더욱 강고하게 확산시켜 나가자 이에 놀란 청와대, 노사정위 이목희, 이용범, 민주노총 내 김영대 부위원장, 금속연맹의 단병호, 조준호, 문성현 등이 최대의 단위노조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김광식 위원장을 회유, 설득하여 음모적으로 6월 10일 총파업을 좌절시킨 것"(하수봉, '누가 밀실협상, 직권조인을 아름다운 투쟁이라 하는가?', 1998.12)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6월 24일 '임금 및 고용조정 대책위' 본교섭에서 김광식 집행부는 3차 희망퇴직에 합의했다. 합의 내용은 "희망퇴직을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하되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고 위로금은 10년 이상 12개월, 5∼10년 11개월, 5년 미만 10개월"치 지급 등이었다. '노사합의'된 3차 희망퇴직으로 2,000여명이 다시 회사를 떠났다.

  김광식 집행부의 희망퇴직 합의에 대해서 민투위는 "노조에서는 희망퇴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과 근무형태 변동 등을 회사가 받아들일 때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희망퇴직을 합의한 것은 조합원들을 기만한 행동이다. 이는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희망퇴직은 위장된 정리해고이며, 임금 삭감 또한 마찬가지"(민투위 대자보 '희망퇴직 합의는 잘못되었다.', 1998.6.25)라고 비판했다.

  조합원들은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동안 정리해고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노사 합의사항을 "6월 30일 이후에는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다.

3. 두 번째 양보 - 임금 삭감안 제출

  6월 30일 오전, 현대자동차 자본은 4,830명의 조합원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노동부에 신고하여 접수를 마쳤다. 신고서에는 임금을 22% 삭감하지 않으면 6,842명을 추가로 잘라야 한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었다. 노동조합은 7월 4일까지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6월 30일 오후 3시부터 26시간 1차 경고 파업에 들어갔고, 다시 7월 6일 오전 10시부터 8일 오전 10시까지 48시간 2차 경고 파업을 벌였다. 7월 10, 11, 13일 자본은 부분적으로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을 기습 발표하고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4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7월 14일 금속산업연맹을 시작으로 15∼16일 총 68개 노조 15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총파업이 벌어졌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비대위도 무기한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이틀동안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7월 15일 밤 중앙비대위는 6시간의 토론을 거쳐 전면 파업을 유보하고 16일 오전 10시부터 정상조업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또 만장일치로 고용조정 및 임금 관련 교섭 폭에 대한 권한을 위원장에게 위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김광식 위원장은 이 날 민투위를 탈퇴했다. "공인으로서 더욱더 조합원의 생존권 사수와 고용안정 쟁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져 조직을 탈퇴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삼만이천 조합원을 책임지려" 한다는 것이 이상욱 민투위 의장에게 제출한 탈퇴서의 내용이었다. 7월 16일 12시 김광식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대폭적인 양보안을 내놓았다. ▲97년 성과금 150% 미지급분, 휴가비, 선물비, 고정 O/T수당, 직책수당 등을 포함하여 1년간 약 2,500억원 규모를 지급 중단토록 고통분담안 제출 ▲정리해고 규모인 4,380명중 4차 희망퇴직자 500명을 제외한 4,300명에 대해서는 하도급 전환대상으로 포함된(식당, 출고, 시설 등) 938명은 직영으로 고용을 유지하고 ▲1,800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일자리를 유지하고 ▲나머지 1,500명에 대해서는 순환휴가제를 도입하여 6개월의 휴가를 실시하며 휴가시 임금은 회사측이 통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노동조합은 기금을 조성하여 30%를 지원한다는 안이 '마지막 협상에 임하는 노조 입장'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노동조합의 양보에도 아랑곳 없이 7월 17일부터 정리해고자 명단을 개별 통보하기 시작했다.

  7월 20일 노사협상이 1시간만에 결렬되고 노동조합은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1만 조합원이 참가한 결사항전 결의대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이 삭발과 무기한 철야농성투쟁을 시작하고, 이헌구, 윤성근, 정갑득 세 전직 위원장들이 45m 굴뚝농성에 들어갔다. 조합원 5천여명은 노동조합과 공장 출입문 중심으로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가족들도 가족대책위를 구성해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23일부터 밤샘농성을 함께 벌였다.

  자본은 7월 20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갔고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마지막 5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4차, 5차 희망퇴직으로 3,000명 가까이 회사를 떠났다. 이로써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조합원은 8,000명이 훨씬 넘었다.

  7월 22일에는 금속산업연맹 15개 노조 68,000여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7월 23일 민주노총 산별대표자회의는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말았다. 이후 전국 공동투쟁 전선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7월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은 울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동조합 상급단체 상근자들과 노동사회단체 활동가들 16명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몰아 구속시켰다. 25일 현장조직 의장단(민투위 이상욱, 김주희, 실노회 박상철, 김성철, 하부영)에 대한 체포영장도 발부되었다.

  7월 26일 300여명의 조합원들이 서울 상경투쟁에 들어갔다. 상경투쟁단은 이 날 오후 3시 서울역 광장에 모여 집회를 갖고 현대그룹 본사와 노사정위원회, 경총, 전경련 등을 항의방문해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했다. 27일 자본은 노조 간부 12명을 고소고발하고 49명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7월 28일 자본은 해고 대상자 전원에게 해고수당 입금을 완료했다. 경찰병력 23개 중대가 배치되었다. 29일 가족대책위가 시청에 항의방문을 갔는데 전경과 격심한 몸싸움이 벌어져 가족 6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7월 31일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와 노사간에 노사정 간담회가 열렸지만 자본은 오히려 1,538명에 대해 최종 정리해고 통보를 하였다. 정리해고 대상에는 노조 상무집행위원 15명과 현직 대의원 89명 등 총 115명의 노동조합 간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민투위 120여명, 실노회 70여명 등 현장활동가 대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8월 1일부터 9일까지 휴가 기간 동안 3,000여 조합원들은 휴가를 반납하고 농성투쟁을 계속 벌여나갔다. 노동조합은 휴가 기간 동안 어린이 여름학교, 노동영화제, 특별 강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가족들의 참여를 이끌었고 매일 저녁 집회를 통해 투쟁 결의를 다져나갔다.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던 태광산업에 구사대가 난입하여 안상하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를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즉시 200여명의 오토바이 기동대를 파견하여 연대투쟁을 벌였다. 8월 5일은 오토바이 부대가 울산 인근 피서지를 항의 방문하여 파업에 불참한 조합원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벌였다. 파업 불참자에 대한 '색출'과 '고립화' 작업은 파업 기간 내내 이루어졌고 파업이 끝난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반마다 파업 참가자와 불참자 사이에 깊은 골이 파여졌다.

  8월 5일 김광식 집행부는 8월 6일 김대중 대통령의 울산 방문 소식에 맞춰 또다시 추가 양보안을 제시했다. ▲사회적 상식 수준의 추가적 임금 삭감 ▲노동조합 임원에 대한 상징적 정리해고 수용 ▲노사 평화선언 및 2000년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하는 고용안정협정서 체결 등이었다. 민투위는 집행부의 추가 양보에 대해 "첫째,……만약 양보안처럼 2000년까지 정리해고 유보라면 이는 투쟁의 목표와 20여일 동안 강고한 투쟁을 전개해온 모든 노력과 성과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며, 7월 31일 정리해고된 1,538명은 시한부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정리해고를 인정하는 것이며 2, 3차의 정리해고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상식이 통하는 임금 삭감이라 하는데 이미 월 평균 임금 삭감액이 45만원 육박하고 있는데 추가적인 임금 삭감을 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집행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합원의 동의 없는 추가 임금 삭감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셋째, 무쟁의 선언은 줄 것을 다 주고 현장을 사측에게 넘겨준다는 항복인 것이다. 왜냐 하면 향후 진행될 전환배치, 라인 통합, 라인 축소, 하청 이관, 그리고 모답스 도입에 따른 여유인원 발생 등 사측의 의도가 분명함에도 무쟁의 선언을 한다면 또 다시 현대자동차는 고용 불안에 직면하고 더 큰 희생과 양보만이 남을 뿐"(1998.8.9. '민투위 통신')이라고 비판했다.

4. 공장 점거 천막농성 파업과 김광식 집행부의 정리해고 수용

  휴가 마지막 날인 8월 9일 저녁, 1만여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의 '감동'을 한 조합원은 이렇게 전했다. "집회를 한참 하고 있는데 폭우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을 땐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사측도 이 광경을 보고 "모두들 미쳤다"라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이 때 가졌습니다. 이 날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들 대부분은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겁니다."('인터뷰, 현대자동차 윤실근', 노동전선 1998.10)

  휴가 이후 첫 출근인 8월 10일 자본은 협상을 제의해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 중 60%에 해당하는 923명 3년간 무급 휴직 ▲40%인 613명 정리해고 ▲정리해고 대상자 중 식당 종사자 167명에 대해서는 고용 승계를 전제로 외주하청화하고 나머지 인원은 희망퇴직을 모집해서 정리해고 최소화 ▲희망퇴직 조건은 5차 때(10∼12개월분 위로금)와 같고 노조의 2,500억원 임금 삭감안은 수용한다는 것이 자본의 최종 안이었다. 노동조합은 순환휴가와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했지만 협상은 12일 결렬되었다. 다음 날 김광식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 옥상 위에 지어놓은 10m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농성 대오는 휴가 이후 4∼5천명으로 불어났고 매일 저녁 집회에는 1만명 이상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결합하면서 열기는 더욱 높아져갔다. 그리고 정문 앞 육교와 건물 등에는 지역 주민들이 가득 모여들어 집회를 지켜보면서 호응을 보내왔다. 자본은 정몽구 회장을 앞세워 공장을 가동시킨다는 이유로 현장에 들어와 사수대와 대치하는 모습을 언론에 보여주면서 공권력 투입에 대한 명분을 쌓아가는 한편, 용역 깡패 수백명을 동원하여 사택과 경주 등지에 대기시켜놓는 등 차근차근 공권력 투입 수순을 밟아나갔다.

  8월 14일 대검찰청의 공권력 투입 발표가 있었고 15일 범민족대회 때문에 빠져나갔던 병력이 돌아오면서 100여개 중대 12,000여명의 경찰 병력이 현대자동차 주변에 배치되었다. 16일 안영수 노동부 차관이 노조를 방문했고 17일 이기호 노동부 장관이 내려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성과없이 끝났다. 17일 자본은 관리자와 하청업체 직원들 1만여명을 동원하여 정상조업 촉구 결의대회를 가졌으며, 연일 농성에 참가하지 않는 조합원들을 일당을 줘가면서 모아놓고 울산 인근으로 놀러다니게 하는 등 투쟁 대오를 고립시키려 혈안이 되었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감이 가장 높았던 이 날 저녁 집회에는 그동안 집회 중에서 가장 많은 대오인 2만여명의 조합원과 가족들이 참여하여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노동조합은 전공장에 흩어져 있던 농성 천막들을 승용1공장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쌓는 등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18일 새벽 페퍼포그, 포크레인을 동원한 진압 병력이 정문 앞에 집결했다. 현장에 비상이 걸렸다. 순식간에 승용1공장 조합원을 중심으로 1,000여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출동하여 즉각 대치에 들어갔다. 농성 조합원들의 강력한 저지로 경찰 병력은 금방 물러갔지만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 날 저녁 정문 앞에서 민주노총 울산본부 주최로 지역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경찰이 집회 장소를 봉쇄하는 바람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건물 위에 있던 주민이 화분을 집어던지거나 집회 대오에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호응을 보냈다. 이 날 저녁 집회에도 역시 2만에 가까운 대오가 참가하여 고조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이 날 밤 노무현 부총재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이 급파되었다.

  8월 20일 정부 중재안이 나왔다. ▲정리해고 대상자 1,538명중 식당 여성 조합원을 포함하여 250∼300명으로 최소화 ▲1,200여명 무급휴직, 순환휴가 ▲고용안정기금 설치, 운영 ▲민형사상 고소고발과 손해배상, 재산가압류 취하, 징계 철회 ▲노사평화선언 등이 골자였다.

  8월 21일 저녁 협상보고대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식당 조합원 정리해고 위로금 2,000∼2,500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식당을 소비조합 형태로 노조에서 운영하겠다. 고소고발, 손해배상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만만하지 않다. 내일 17시까지 중재안을 받지 않으면 노조에서 제시한 모든 안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집회 중간 중간 야유와 함성 소리 때문에 김광식 위원장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무대 뒷편에서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집회 끝나고 대열이 반쯤 빠지고 있을 때 식당 여성 대의원 1명이 마이크를 잡고 오전에 위원장과 있었던 "식당 조합원들이 정리해고를 수용하라"는 간담회 내용을 폭로했다. 이어 민투위 이상욱 의장은 "국민회의 중재단은 바로 이것을 노렸다. 우리들이 분열하는 것을 노린 것이다. 힘을 한 곳으로 모을 때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지 못한다면 현장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선대에서도 마이크를 잡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정리해고 철회이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자"고 선동했다.

  집회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가족대책위를 중심으로 노동조합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다. 사수대를 비롯하여 1천여 조합원이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들었다. 김광식 위원장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을 설명했다. 분노한 조합원들의 즉석 발언이 이어졌다. "공권력이 무서웠으면 벌써 투쟁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권력에 맞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위원장이 투쟁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양보안과 중재안을 철회하라. 만약 그럴 자신이 없으면 노동조합 위에 매달아 놓은 관을 불태워 버려라.", "지금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과 회사가 시켜서 일당받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과 같은 투표권을 줘서 투표로 심판받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협상 때 회사는 당당한데 위원장은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 힘내라. 표정 관리 해라!" 조합원들이 김광식 위원장의 입장을 다시 요구하자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뜻을 충분히 알겠다"고만 밝히고 끝까지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았다.

  중재안 합의에 대해 민투위는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기만적 중재안 반대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받는다 ▲현장조직들간의 입장을 통일해 유인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실노회가 조직원 총회에서 자기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현장조직들간의 입장을 통일시킬 수 없었고, 전직 위원장들의 입장 또한 현장조직들의 입장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정리되지 않아 윤성근 전 위원장 혼자만 "정리해고는 저지해야 하며 무급휴직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내려보내 민투위 유인물에 실었을 뿐이었다.

  8월 22일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 조합원, 민투위, 사수대 등은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던 본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가졌다. 항의집회 대오는 저녁이 되어 500여명으로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저녁 집회에는 농성투쟁 이후 가장 적은 3,000여명이 참여했다. 이 날 김광식 위원장은 "앞으로 협상에 목매달지 않겠다. 지금까지 노조에서 밝혔던 임금삭감안을 철회한다. 더 이상 비굴하게 머리 숙여 협상에 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힘있는 투쟁을 조직하자"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장의 입장 발표에도 언론에서는 계속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8월 23일 오후 2시 태화강 둔치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정리해고 저지와 민주노조 사수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렸고 집회 참가자 3,000여명은 현대자동차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 날 권영길 민주노총 전위원장은 "현대자동차 협상이 만약 불만족스러운 내용으로 타결되더라도 인정해 주자"고 얘기하여 집회 참가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틀 째 문선대가 문화선동활동을 거부한 가운데 열린 이 날 저녁 집회에서 김광식 위원장은 "언론에 현혹되지 말라. 조합원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이 나오면 도장을 찍기 전에 조합원들에게 먼저 의견을 묻겠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8월 24일 새벽 2시 30분 노사합의 소식이 TV 자막을 통해 발표되었다. 오전 6시 잠정합의 기자회견문을 노사가 발표했다. '277명 정리해고, 나머지 1,261여명 1년 6개월 무급휴직, 정상조업을 위한 노력이 있을 때 재산가압류와 고소고발 등에 대한 부분 철회,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 등이 주요 합의 내용이었다. 아침 뉴스를 통해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합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농성장을 빠져나갔고 몇몇 분노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앞으로 몰려가 노동조합 유리창과 집기들을 부수고 사수대 옷을 벗어 불태우고 관을 끌어내려 불태웠다. 오후 들어 농성 조합원들 거의 모두가 빠져 나갔고 바리케이트가 철거되었다.

5. 잠정합의안 부결과 남겨진 과제들

  이른바 노사정이 합의한 8.24 잠정합의안은 9월 1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63.6%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대로 된 재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합의된 내용은 오히려 더욱 개악된 형태로 관철되었다.

  결국 1998년 현대자동차에서는 하청 노동자 1,800여명, 과장급 이상 관리자 800여명, 다섯 차례의 희망퇴직 8,000여명, 정리해고 277명, 무급휴직 1,261명 등 모두 12,000여명의 인원이 이른바 '고용조정'되었다. 김광식 집행부는 3단계에 걸쳐 '양보'함으로써 정리해고를 막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본은 아주 철저하고 일관된 자세로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시켜나갔고 김광식 집행부는 결국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 이 점에서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은 '패배'이다. 공권력조차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조합원 대중의 투쟁 동력을 믿지 않고, 끊임없이 수세적으로 '양보'를 거듭하면서 '아름답게'(?) 정리해고를 '최소 수용'한 김광식 집행부의 한계와 오류가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수용으로 8월 17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던 만도기계 노동조합은 전국 전선의 엄호를 받지 못한 채 9월 3일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로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36일 파업투쟁은 정리해고가 자본이 의도하는만큼 저비용으로 아무 저항없이 관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켰고, 지도부가 굳건하다면 대공장 단위 노조의 대중 동력만으로도 예전과는 다르게 공권력과의 '일전을 불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 자신감은 1999년 한라중공업 파업투쟁에서 현실로 구체화되었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은 공권력 투입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을 끝까지 이어나갔다.

  1998년 12월 22일 김광식 7대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투표가 진행되었고 62.2%가 불신임에 찬성함으로써 7대 집행부는 간신히 불신임을 모면했다. 1999년 7대 집행부가 사퇴하고 4월 30일 노동조합 임원선거 2차 투표에서 정갑득 후보 진영이 8대 집행부로 당선됨으로써 노동조합이 정상화되었다. 이후 몇차례로 나뉘어 무급휴직자들이 복직되었는데 대부분 핵심 현장활동가들로 이루어진 무급휴직자들의 복직으로 극심한 현장통제와 노동강도 강화 때문에 침체되어 있던 현장의 동력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무급휴직자들은 복직할 때 자본의 교육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면서 교육 기간을 복직자들의 자체 조직과정으로 전환시켜나갔고,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발행하고, 남은 돈을 정리해고자와 다른 무급휴직자들의 조기 복직투쟁 지원금으로 내는 등 매우 당당하게 현장에 복귀했다. 현장활동가들의 정리해고와 무급휴직으로 현장이 비어 있는 동안 컨베어 속도가 1.5배 이상 빨라졌고, 현장통제가 매우 심해졌는데 무급휴직자들이 현장에 돌아오는 모습이 당당하니까 침체된 현장 분위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1999년 12월 27일부로 무급휴직자 전원이 복직되었다. 1999년 10월 27일 현대자동차 노사는 임단협에서 "정리해고자는 무급휴직자 복직 완료 후 6개월 이내까지 복직 및 계열사 재취업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신규인원 채용 시 직군 등을 고려하여 노동력 제공에 문제가 없는 한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하여 정리해고자 조기 리콜의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이 때의 정리해고자 속에 식당 여성 조합원들도 포함된다는 정갑득 8대 집행부의 확인까지 얻어놓은 상태로 해고자 문제 해결의 여지가 남겨졌다. 늦어도 2000년 5월 안에는 정리해고자 133명의 복직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완료될 전망이다. 그러나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원직복직 문제는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1998년 8월 24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정리해고 최소 수용'이라는 '부결된 잠정합의'는 식당 여성 조합원들의 투쟁 속에서 여전히 '재협상 대상'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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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23 2005/02/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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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홀씨 2014/10/27 22:24 URL EDIT REPLY
지난 파업투쟁에 대해 사료를 모으고 비판을 붙인 백서가 나와야 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