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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미래를] 00년 8,9월

 

6.8 울산시의원 보궐선거투쟁


낮은 투표율과 또 한 번의 '패배'

  6.8 울산시의원 보궐선거는 울산시 북구 제2 선거구 선거인 36,849명 가운데 13,683명이 투표하여 37.1%라는 최악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한나라당 이병우 후보가 7,051표(52.1%), 무소속 김주희 노동자 후보가 6,460표(47.8%)를 얻어 591표 차로 한나라당 이병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선거구는 98년 6.4 지방선거에서 이상범 시의원 후보가 13,785표, 조승수 구청장 후보가 10,715표, 송철호 시장 후보가 13,646표를 얻어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이 큰 표 차로 앞섰던 곳이고 2000년 4.13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가 9,935표, 민주노동당 최용규 후보가 9,293표를 얻어 642표 차로 민주노동당 최용규 후보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 뒤졌던 곳이다.

  낮은 투표율, 특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밀집해 있는 양정, 염포동에서의 낮은 투표율(39%, 32%)이 이번 보궐선거에서 노동자 후보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다. 투표율이 이처럼 낮았던 것은 보궐선거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과 더불어 6월 7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정갑득 집행부가 임금협상안에 잠정합의하면서 6월 8일 부분파업을 철회하고 투표 당일 현대자동차 대부분의 사업부에서 잔업이 실시되면서 퇴근 후에 투표하려고 했던 많은 조합원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던 탓이 컸다.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를 6월 9일로 잡은 것도 투표율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98년 6.4 지방선거는 정리해고 반대투쟁이라는 대중투쟁의 '일환'으로 치러졌고 결과는 '노동계'의 압승이었다. 지난 3말 4초 총파업투쟁은 4.13 총선을 위한 '선거용' 파업으로 일관됐고 결과는 '석패'였다. 이번 보궐선거는 단위사업장 임·단투와 해고자 복직투쟁 등의 현장 '쟁점'들을 선거 공간에서 일반화시켜 뚜렷한 대중적 쟁점으로 집약시켜내지 못하면서 또 한 번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후보, 무소속 노동자 후보, 민주노총 지지 후보

  5월 21일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는 5차 임시 지도부 회의에서 "후보에 대한 합의 추대가 안됨으로 인해 시·구의원 보궐선거는 참여하지 않기로 최종 확인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원이 6.8 울산시·구의원 보궐선거에 참여할 경우 이 후보는 민주노동당을 탈퇴하여야 한다"는 결정까지 덧붙였다. 4.13 총선을 전후한 민주노동당 내부의 갈등이 6.8 지방선거를 계기로 오히려 더 증폭되어 대단히 '심각한' 양상으로까지 치닫는 상황이었다.

  5월 22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정치위원회 3차 회의를 열어 6.8 울산시·구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노동당이 아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차원에서 적극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5월 25일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조합 후보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5월 25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제25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 소속 의장 2부 김주희 대의원이 6.8 울산시의원 보궐선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후보로 확정되었다. 김주희 후보는 출마의 변을 통해 "이번 보궐선거는 썩어빠진 보수 정치를 폭로하고 또 다시 불어닥칠 구조조정과 고용 문제에 대한 노동자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후 더 큰 투쟁을 조직해 들어가는 힘찬 투쟁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보궐선거에 입후보하면서 현장과 지역을 누비며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를 정면에서 맞받아치는 힘찬 선거투쟁을 치러내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밝혔다.

  5월 27일 김주희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후보는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에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북구 제2 선거구는 한국 사회 보수정치를 혁파하기 위한 가장 전략적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힘을 합쳐 지난 총선의 패배를 딛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희망을 이어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대략 5,000여명의 민주노총 조합원과 그 가족이야말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체이자 당사자들입니다. 거의 모든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현재 임투가 진행중이고 민주노총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난 98년 6.4 지자체 선거 때처럼 우리가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을 힘있게 결합시킨다면 울산 북구를 확실한 노동자 텃밭으로 다시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울산 북구 제2 선거구가 갖는 전략적 의미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대의에 입각해서 이번 선거투쟁에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가 적극적인 하나의 주체로서 함께 할 것을 당부드립니다.…민주노동당 후보에 대한 민주노총의 태도에 근거했을 때 노동조합 후보·노동자 후보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주1)

  5월 28일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는 6차 임시 지도부 회의를 열어 이 제안에 답했다.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는 6.8 보궐선거 노동자 후보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별 당원이 노동자 후보 선대본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김주희 후보 진영은 울산에 있는 청년진보당에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 그러나 청년진보당은 6.8 보궐선거에 결합하는 것에 대해 의의를 못느끼겠다면서 공동선대본에 불참했고 개별적으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5월 29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정치위원회 4차 회의에서 시의원 후보에 대한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후보 추대과정에서 4만 조합원의 단결된 힘으로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4.13 총선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내부 분열도 봉합하는 계기로 승화시키자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현자노조 후보자의 해당 지역구(광역시 제2 선거구)는 유권자의 다수가 노동자인 밀집 지역에 출마하는 노동자 후보로서 민주노총의 지지 후보자로 활동코자 합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정치방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지역본부 운영위에 상정하여 현자노조 김주희 후보자를 민주노총 지지 후보자로 결정하여 줄 것을 요청합니다."

  6월 2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6차 운영위원회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요청에 따라 시의원 후보 김주희, 구의원 후보 김진영 동지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지지 후보로 한다"고 결정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이 결정 과정이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어긋나는 부분도 있"지만 "지난 16대 총선투쟁의 패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한 순간도 멈춰서는 안된다는 대의"에 따른 것이라고 6월 5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로써 김주희 후보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후보·무소속 노동자 후보로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지지 후보로서 선거투쟁에 임하게 되었다. 김주희 후보는 울산지역의 민주노조, 노동·사회단체, 여러 정치조직들을 아우르는 '범노동계 단일후보'로서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총역량을 결집하여 "정리해고를 날치기 통과시켰던 한나라당 후보를 심판하고 4.13 총선의 패배를 설욕하여 노동자의 자존심을 되찾는 한판 승부"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일부와 청년진보당 세력이 공동선대본 구성에 불참함으로써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총력'이 결집되지는 못했다(주2).

'재정립'이 불가피해진 민주노총 정치방침

  6월 2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가 민주노동당원이 아닌 후보를 민주노총 지지 후보로 결정함으로써 민주노총 정치방침의 재정립이 불가피해졌다.

  1999년 8월 23일 제15차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부르조아 보수정당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대의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제정치조직에 민주노총 조직원이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민주노총은 제정치조직과의 관계에서 대중조직 고유의 상대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정치조직과 연대, 지지, 지원을 강화하되 구체적인 내용은 조직의 결정에 의한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 1월 1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민주노총 후보는 단위노조, 연맹, 지역본부의 승인을 전제로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의 동의를 거쳐 민주노동당 후보로 결정"한다는 방침을 정했고, 1월 26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정치위원회가 보낸 "민주노동당원이 아니더라도 민주노총 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내용의 질의에 대해서도 2월 1일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 명의의 답변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추천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민주노총 후보의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못을 박음으로써 대중조직 안에서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을 민주노동당이라는 특정 정당의 하부조직으로 만들어버렸다.

  2월 11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는 '노동자 후보냐, 민주노동당 후보냐'를 둘러싸고 5시간 이상 격론을 벌였다. 팽팽한 논란 끝에 표결에 부쳐져 166:80으로 '민주노총 방침'대로 한다는 안이 통과되었다. 결국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4.13 총선 후보는 민주노동당 '예비'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반발한 민투위 강성신 후보는 유세를 마치고 총선 후보를 사퇴했다.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 박상철 후보와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현노신) 이상범 후보가 표결에 들어갔고 1차 120:114로 박상철 후보가 이겼으나 과반수에서 1표가 모자라 2차 투표까지 가는 경합 끝에 110:121로 이상범 후보가 역전 당선되었다. 애당초 민주노동당 내부 경선으로 치르면 그만일 문제가 무리하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의 예비 경선을 거치게 된 데는 울산 민주노동당 내의 '역학관계'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기정사실화'하여 민주노동당 내부 절차를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계산'이 예비 경선 과정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계산'은 결과적으로 '오산'이 되고 말았다. 3월 9일 민주노동당 울산광역시지부 총회에서 이상범 현대자동차 예비후보와 세종공업 위원장 최용규 후보 사이에 북구 총선 후보 경선이 벌어졌다. 이상범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절차만 거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경선까지 가게 된 것이다. 투표 결과 전체 당원 90.8%가 투표에 참여하는 치열한 접전 끝에 466:513으로 최용규 후보가 당선되었다.(주3)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 내 일각에서는 "울산연합세력의 패권주의적이고 분열주의적인 행태를 공개한다"면서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선에 울산연합 세력인 박상철을 내보내 지게 되자 그 결과를 뒤집고 자파 세력의 출마를 위해 세종공업의 최용규를 내세워 연맹과 민주노총이 조정할 여유도 주지 않고(사실상 이를 거부하고) 당의 경선을 준비했던 것"(주4)이라는 격한 비판이 쏟아졌다. 민주노동당 내 경선과정의 '후유증'은 4.13 총선 패배와 6.8 보궐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를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 4.13 총선을 둘러싼 울산 북구 '사태'의 뿌리에는 이처럼 잘못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놓여져 있었다.

  6월 2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가 내린 결정은 분명 1월 1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정치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99년 8월 23일 15차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일반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올바른' 결정이었다. 게다가 이 결정은 4.13 총선을 전후한 울산지역 노동운동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활로'였다. 2000년 1월의 잘못된 민주노총 정치방침은 '현실'에서 이미 '교정'되었다. 그런데도 민주노총은 민주노총 정치기금 모금(안)과 민주노동당 재창당에 대한 입장 심의 건을 7월 12일 민주노총 18차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7월 12일 대의원대회는 성원이 안돼 유회되었지만 민주노동당에 대한 민주노총 단병호 2기 보궐집행부의 태도는 그다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스스로 민주노동당의 하부 조직을 자처해 들어가는 민주노총의 잘못된 정치방침이 빠른 시일 안에 분명하게 '재정립'되지 않는 한 울산 북구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것이고 우리 사회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그만큼 더 지연되고 왜곡될 것이다.

선거투쟁

  노동자 후보 김주희 선대본은 "노동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 "고용불안 없는 일터! 사람 사는 것 같은 북구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신자유주의·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현장 대중투쟁과 긴밀하게 결합한 선거투쟁을 벌여내며 ▲정리해고를 날치기 통과시킨 썩은 정치집단 한나라당을 심판하고 ▲울산지역 노동운동 진영의 심각한 분열상을 극복하여 새롭게 단결력을 회복함으로써 ▲4.13 총선의 패배를 딛고 노동자의 자존심을 되찾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목표를 걸고 선거투쟁에 돌입했다.

  현대자동차 각 정문과 부품사업장들이 밀집해 있는 효문지역에서의 출·퇴근투쟁이 5월 29일부터 6월 7일까지 휴일을 빼고 매일 계속되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본관 집회에 김주희 후보는 6월 2일과 5일 두차례 연사로 나섰다. "지난 4월 13일 우리는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한나라당에게 북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선거의 후유증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조합 활동가로서…내부의 분열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온힘을 다하겠습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회사는 우리의 너무나 정당한 요구를 수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식당 여성 조합원 동지들의 목숨 건 투쟁을 지켜보면서 저도 무급휴직을 당했던 입장에서 회사의 반성할 줄 모르는 자세에 치가 떨립니다. 회사는 우리의 요구를 수락해야 합니다.…조합원 동지 여러분. 단결합시다. 그리하여 반드시 2000년 투쟁을 승리하고 우리 현자 노조의 자존심인 북구를 다시 되찾읍시다."

  합동연설회는 5월 31일과 6월 4일 두차례 열렸다. 김주희 후보는 유세를 통해 정리해고의 아픔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점점 힘들어져가는 현장의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은 "노동자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지렛대로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내는 확성기가 될 것이며 노동자의 요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치우는 불도져가 되겠다"고 소리를 높였다. 양정초등학교에서 있었던 6월 4일 2차 합동연설회에서는 대의원대회를 마친 '빨간 조끼'(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대거 참여하여 관광버스까지 동원한 한나라당 이병우 후보측과 맞붙었다. 한나라당 이병우 후보는 김주희 후보를 "철없는 초보 운전자"로 비난하면서 자신은 "믿음직한 일꾼"이며 "지난 번에는 노동계가 했으니까 이번에는 지역 주민 쪽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 표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 "믿음직한 일꾼" 쪽 선거 운동원들은 이병우 후보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연설회장을 우루루 빠져나가는 구태의연한 추태를 버리지 못했다.

  매일 계속된 거리유세는 선거 막바지로 가면서 유세단 규모가 2∼300명으로 참여 인원이 점점 늘어났다. 노동자 출신 시·구의원들과 이상범 전시의원, 최용규 세종공업 위원장 등이 거리유세를 함께 했다. 6월 5일에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본관 집회를 마치고 오토바이 부대가 효문, 연암, 화봉동 일대를 행진했다. 김주희 후보와 연사들은 "정리해고를 날치기 통과시킨 썩은 정치집단 한나라당을 심판하고 4.13 총선 패배를 설욕하여 노동자의 자존심을 되찾읍시다! 투표율이 관건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투표합시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6월 7일 개인연설회는 박준석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 이갑용 민주노총 전위원장, 박상철 실노회 의장 등이 연사로 참여하여 "4.13 총선 패배를 극복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자"고 역설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쟁대위 속보, 노조소식, 노조신문 등을 통해 거의 매일 노동자 후보의 주장을 알려나가고 조합원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민투위, 실노회, 현노신,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현지사), 미래를 여는 노동자회(미래회), 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노연투) 등 현장조직들도 조직 신문이나 유인물을 통해 김주희 후보를 지원했다. 덕양, 한일이화, 세종공업, 한국TRW, 대덕사 등 효문지역 노동조합들도 '무지개'라는 공동 소식지에 부품사 공동임단투 소식과 더불어 보궐선거와 김주희 후보를 알려나갔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전화 홍보 작업도 계속됐다. 전화 홍보 작업을 주로 한 민투위 가족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은 정리해고와 무급휴직의 아픔을 얘기하면서 민주노총 조합원과 그 가족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주민 간담회는 상대적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거투쟁의 초점이 '현장'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이른바 '지역 조직'이 충분히 가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바지에 부분적으로 시도됐던 '조합원이 조합원을 방문하는' 활동은 효과가 매우 컸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북구 제2 선거구에 사는 민주노총 조합원 특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투표하느냐 마느냐, 조합원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함께 투표하느냐 마느냐가 이번 보궐선거의 당락을 결정짓는 관건이었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노동자 후보 김주희 선대본은 현장 출·퇴근투쟁을 매일 전개하고, 현대자동차 임투와 식당 여성조합원들의 원직복직투쟁, 회사와 경찰의 농성천막 철거와 강제 연행에 맞선 현대미포조선 해고자 김석진 동지의 원직복직투쟁, 효문·연암지역 부품사업장 공동 임단투 등 지역 투쟁 현안에 최대한 결합하여 선거투쟁을 벌여내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투쟁 집회와 합동연설회, 거리유세와 개인연설회, 유인물 등에서의 선전·선동에 제한되면서 실제 대중투쟁에 복무하는 선거'투쟁'의 '실천'으로, 그리고 그 실천의 상을 풍부화시키는 데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B55코드(파업시기 무노동 무임금 문제), 현대자동차 식당 여성조합원들과 징계 해고자들의 원직복직 문제 등 남아 있는 임투의 쟁점들을 가지고 노동자 후보가 현대자동차 정문 앞 천막농성투쟁에 들어가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다소 '선도투'적 방식이긴 했지만 이와 같이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을 뭔가 새롭게 적극적으로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좀더 기울었어야 했는데 이 점에서 많이 부족했다.

  게다가 실제 조합원들과 밀착해 있는 현장활동가들이 제대로 선거투쟁을 벌여내지 못했다. 민투위를 제외하고 나머지 현장조직들은 선전 지원과 합동연설회에 부분 결합하는 것 이상으로 선거투쟁에 '몸'을 싣지 않았다. 민투위 또한 조직원의 절반 가까운 40명 이상이 임투에 발목이 잡힐 수밖에 없는 대의원들이라, 대의원이 아니면서 월차 결의까지 하고 헌신적으로 선거투쟁에 뛰어들 수 있는 조직원들의 수는 한계가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후보,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지지 후보의 선거투쟁은 실제로는 '민투위의 선거투쟁'으로 받아들여졌고 또 그렇게 진행되었다. 이 점에서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이른바 '조직'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전개됐던 98년 6.4 지방선거와 차이가 난다. 그리고 현장의 '조직 동원력'이라는 점에서도 4.13 총선과 견주어 훨씬 취약했다.

  마지막으로 6월 7일 정갑득 집행부의 잠정합의와 부분파업 철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궐선거에서 얻은 것들이 당선보다 소중하다

이번 6.8 보궐선거에서 비록 딴나라당 후보에게 노동자의 자존심인 북구를 내어주었지만 우리 민투위가 이번 보선에서 얻은 것은 당선보다도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

첫째, 진정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4.13 총선 이후 갈라져 있던 노동진영을 하나로 추스려 노동자, 서민을 위해 당당하게 함께 하는 길을 만들었다는 점.

둘째, 민투위가 추구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형을 만들어가는 첫 단계라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선거란 점.

셋째, 처음 시작 때에는 조직원들의 참여가 저조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도가 늘어나 대의원 동지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조직원들이 결합했다는 점.

넷째, 노동자, 학생, 단체 등 진정한 이 땅의 주인들이 선거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연대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

이외에도 작은 희망들을 많이 보여준 선거였다.

윤실근, '6.8 보궐선거에서 얻은 것들이 당선보다 소중하다'

http://scdw.jinbo.net, 2000. 6. 9

  6.8 울산시의원 보궐선거투쟁은 "민투위가 추구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형을 만들어가는 첫 단계라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선거"였다. 민투위는 민주노총의 잘못된 정치방침을 바로잡는 투쟁의 연장선에서 6.8 보궐선거에 입후보했다. 5월 25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의 결정과 6월 2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결정은 사문화되었던 99년 8월 23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정치방침' 일반원칙을 되살려 2000년 1월 1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잘못된 '정치방침'을 바로잡는 결정이었다. 이 결정으로 민주노총 정치방침은 '재정립'이 불가피해졌다. 노동자 후보 김주희 선대본은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결합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노력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 많이 부족했고 말 그대로 '첫 단계'를 경험하는 것에 그쳤다. "민투위가 추구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형"은 바로 이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을 어떻게 더 한 단계 발전적으로 결합시켜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98년 6월과 2000년 4월, 6월의 '차이'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98년 6월과 2000년 6월의 '다음'을 96∼7년 '총파업 정치'의 진전 속에서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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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현자노조 울산시의원 입후보자 김주희,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 동지들께 제안합니다', 2000. 5. 27.

2) 선거대책본부 공동본부장에는 박준석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 정갑득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위원장, 윤성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전위원장, 최용규 세종공업 위원장, 이갑용 민주노총 전위원장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윤성근 전위원장은 이헌구 전위원장의 불참을 이유로 공동본부장직을 중간에 사임했다. 자문위원에는 진한걸, 윤종오, 강혁진 울산시 북구의원들과 이상범 전시의원이 참여했다.

3) 이종호, '민주노총 정치방침을 바로잡자!', 「노동자의 힘」 특보, 2000. 3.

4) 조정모(5공장), 장충권(1공장), 이재인(2공장), 이상도(엔진기어), 황세영(통합) 외 북구지역 현자 당원 200인 일동, '북구지역 조합원들께 드리는 글', 200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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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41 2005/02/1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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