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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01년 1월(미발간)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발전과정과 노동자 정치운동의 과제


  87년 이후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한 해도 거르지 않은 크고 작은 투쟁 속에서 자신의 전술과 이념과 조직을 발전시켜왔다. 정치적 노동운동은 현장조직운동과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의 발전과정과 결합하면서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전화하고 발전해왔다.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88년 11월 노동법개정투쟁, 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과 전노협 5월 총파업투쟁, 91년 5월 투쟁!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우리 사회에 노동조합운동을 보편화시켰다. 88년 노개투와 128일 파업투쟁은 지역과 업종, 대공장으로 나뉘어 발전해온 당시 민주노조운동을 "건설! 전노협!"의 기치로 모아나갔다.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과 5월 총파업으로 전노협은 사수되었다. 90년 투쟁은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마창노련 동맹파업을 비롯한 선진 지노협의 동맹파업→전노협 5월 총파업(정치파업)→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의 임투 참여(경제파업)→국민연합의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 사회 대중투쟁의 합법칙적 발전경로를 보여주었다. 91년 5월 투쟁은 단위사업장의 이해관계가 당장 걸려 있지 않더라도 민주노조운동이 특정한 정세에서 민주주의투쟁 전선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5월 투쟁의 성과로 민주노조총단결 대오인 ILO공대위가 구성되었다.

  정치적 노동운동은 이 시기에 자기 발로 서기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을 정치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전노운협으로 대표되는 노동단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을 '지원·지도'하고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뿐만 아니라 ILO공대위 등 민주노조총단결 대오의 한 주체였다. 정파조직운동은 주사파와 사노맹, 그리고 인민노련, 삼민, 노동계급, 제파 등 PD 그룹으로 나뉘어 자신의 '정치'와 민주노조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91∼2년 현대자동차 성과분배투쟁, 93년 현총련 공동임투, 94년 전지협 연대파업투쟁!

  현대자동차 성과분배투쟁은 노동운동위기론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켰다. 전투적 조합주의, 사회발전적 노조운동론, 진보적 노조운동론 들이 제출되었다. 93년 현총련 공동임투는 김영삼 정권의 신노동정책과 고통분담론을 내세운 문민개혁의 반노동자적 본질을 폭로했다. 94년 전지협 연대투쟁은 한진중공업, 금호타이어, 대우기전 등 신규 대공장 민주노조들의 파업투쟁으로 확산되었고 한국통신 노조의 민주화를 계기로 공노대를 결성하는 등 민주노조운동의 외연을 공공부문으로까지 넓혀냈다.

  이 시기에 정치적 노동운동은 '분해'와 '해체'의 길을 걷는다. 노동단체운동은 선진노동자조직론자들과 민중당 불참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당 참여(동조)세력을 다른 편으로 하여 분리되었다. 전노운협의 1차 분화는 전노운협을 분리해 나온 전국노련에서 한노당세력이 빠져나오고, 전노운협에서 한노협이 다시 분리되는 2차 분화로 마감되었다. 노동단체운동은 93년 전노대가 만들어지면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공식 참가 자격을 잃어버렸다. 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 91년 박창수노대위, ILO공대위까지 '민주노조총단결 대오'에 하나의 주체로 참여했던 노동단체운동이 '민주노조총단결 대오'가 강화됨과 동시에 '배제'되어버린 것이다. 정파조직운동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온 충격과 정권의 탄압으로 안팎에서 '해체'되었다. 민중당 해체 이후 한노당에서 진정추로, 그리고 사추위와 민중회의로 갈라져온 (반)공개정치조직운동은 92년 대선 당시 백기완선대본에서 함께 했다가 사추위와 민중회의는 민정연으로 통합했고 민정연은 다시 진정추와의 통합 문제로 노진추와 노정연으로 분리됐다. 민정연 안에 있던 구 사추위 그룹은 진정추와 통합하여 진정연을 만들었다.

  95년 한국통신투쟁과 신경영전략에 맞선 분신투쟁, 96년 공공 5사 공동투쟁, 96∼7년 노동법개정총파업투쟁!

  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외연은 꾸준히 확장되어갔다. 96∼7년 노개투총파업투쟁은 우리 사회 보수정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정치'는 겨우 싹을 틔웠을 뿐이다. 권영길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97년 1월 17일 수요파업으로 전화함으로써 이 새로운 정치의 싹을 좀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97년 대선에서 노동자 정치를 "일어나라 코리아" 류의 정치로 왜곡시키면서 참담한 패배로 귀결시켰다.

  정치적 노동운동은 이 시기에 복원된 현장조직운동과 결합하면서 민주노총과 산업별 연맹 단계에 접어든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싸고 새로운 노선 분화를 준비한다. 한노정연, 한노사연, 영남노연 등 전국 단위의 연구소가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출범했다. 진정연은 96∼7년 노개투총파업 이후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로 부활했다. 노동단체, 연구소, 학술진영, 청년운동, 공개정치조직운동 등에서 좌파적 흐름을 형성해온 세력들은 정치연대와 새정조로 모였다. 정치연대-새정조는 97년 대선에서 국민후보 대신 노동자·민중후보를 주장하며 국민승리21에 참여했다.

  98년 현대자동차, 만도기계, 조폐공사 파업투쟁, 99년 서울지하철, 한라중공업, 한국중공업 파업투쟁, 2000년 대우자동차 매각반대 자동차 4사 공동투쟁, 제2 구조조정에 맞선 공공부문 파업투쟁!

  이 시기에 총파업은 일반적 지침이 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은 단위사업장의 긴박한 투쟁들과 결합되지 못했다. 98년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와 합의안 부결, 이어지는 총파업 결의와 철회로 현대자동차, 만도기계, 조폐공사, 서울지하철, 한라중공업, 한국중공업의 파업투쟁은 외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은 99년 8월 23일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대의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제정치조직에 민주노총 조직원이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민주노총은 제정치조직과의 관계에서 대중조직 고유의 상대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정치조직과 연대, 지지, 지원을 강화한다"는 정치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2000년 1월 민주노총은 이 방침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후보 방침을 정함으로써 민주노총을 민주노동당의 하부조직으로 격하시켰다. 이 결정으로 이른바 '울산 북구 사태'가 불거졌고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이 그토록 목을 메던 '국회 진출'의 실패를 가져왔다. 민주노총은 6.8 울산시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원이 아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후보를 민주노총 후보로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정치방침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이 시기는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 정치적 노동운동 모두에서 노선과 조직의 3분립이 뚜렷해지고 현장조직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이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전화·발전해왔다. 97년 대선 이후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을 등에 업고 민주노동당으로 전환했다. 새정조 논의에 함께 했던 노진추는 민주노동당에 합류하여 그 내부에서 평등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고 한청연은 정치연대-새정조의 국민승리21 참여를 비판하며 청년진보당으로 독립했다. 새정조는 노동자의 힘(준비모임)으로 전환했다.

  현 시기 노동자 정치운동이 직면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노총의 노동운동발전전략 초안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드러나듯이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 정치운동 전반에 있어서 '사회변혁적 길', '사회개량적 길', '민족(해방)주의적 길'의 3분립을 보다 투명하고 철저하게 해야 한다.

  둘째,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재정립해야 한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만의 관계가 아니라 민주노총과 노동자 정치조직 일반의 관계로 바로잡혀야 한다.

  셋째, 현장조직운동은 형식에 있어 가장 앞선 모습을 보이고 있는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의 예에서 보듯이 정치적 경향성을 점점 뚜렷하게 하면서 단사를 뛰어넘어 지역과 전국에서 조직의 질을 보다 단일화하려는 노력이 가속화되어야 한다.

  넷째,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과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은 모두 실패했다.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일부인 노동자 정치조직은 대중투쟁의 지렛대로서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에 복무해야 한다. 96∼7년 노개투총파업에서 싹이 보였을 뿐이지만 이제 '정치'는 선거라는 비좁은 공간을 뛰어넘어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과 일상적으로 직접 만나야 한다. 오로지 이 속에서만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한 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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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44 2005/02/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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