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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철 옹에게 듣는 신불산 빨치산 이야기
"우리가 견뎌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동지애"
 

"내가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기력도 많이 잃고 그렇지만 그때는 참말로 정의밖에 몰랐다.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전쟁을 수행한다는 자체가 굉장히 영광스러웠다."

 

빨치산 장기수인 구연철(80) 범민련 부경연합 고문은 26일 신불산을 찾아 60년 전 '산 생활'과 유격대 활동을 들려줬다.

 

빗속에서 이뤄진 이날 역사 산행에는 빨치산 장기수들의 일대기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열사장학문화사업회 회원들과 <경성 트로이카>, <이관술>,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을 쓴 안재성 작가, 부경울열사회 회원들이 함께했다.

 

신불산 빨치산들의 취사장 파래소폭포

 

배내골 하단지구를 출발해 도착한 파래소폭포.

 

"여기서 밥을 해가지고 보따리를 싸서 둘러메고 길도 없는 산을 타고 올라갔다. 밥을 할 때는 연기가 나지 않는 사리나무로 밥을 했다. 부대별로 짊어지고 올라가서 고지에서 밥을 먹었다. 여기가 취사장이었다."

 

파래소폭포에서 밥을 짓던 신불산 빨치산들은 모두 7개 부대로 이뤄져 있었다. 남도부(본명 하준수) 부대로 일컬어진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 소속이었다. 홍길동 부대, 추일 부대, 차마일 부대 등 7개 부대는 신불산 주요 고지들을 장악하고 배내골 일대를 '해방구'로 만들었다.

 

구연철 고문은 6.25 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스무살의 나이에 입산했다. 신불산 일대에는 1948년부터 구 빨치산으로 불리는 야산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남한에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지하'로 못 들어가고 신불산으로 스며든 야산대는 30여명 가량 됐지만 구연철 고문이 산에 들어갔을 때는 17명으로 줄어 있었다. 신불산 빨치산은 1948년부터는 남로당 경남도당 동부지구당 소속이었고, 6.25 전쟁이 나면서 동해남부지구당으로 바뀌었다가 전쟁 중에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로 편제됐다.

 

천혜의 요새, 갈산고지

 

파래소폭포에서 산길을 타고 한 시간 남짓 오르면 3층짜리 시멘트 전망대가 있는 681고지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남도부 부대의 사령부가 있던 자리다.

 

"여기서 보면 원동재가 다 보인다. 신불산 일대는 겹겹이 겹쳐 있는 첩산이다. 간월산을 죽 타고 올라가면 팔공산까지 연결되고, 가지산, 운문산을 타고 가도 태백산맥하고 연결된다. 여기를 예전엔 갈산고지라고 했다. 산세가 굉장히 험하다. 사방이 90도 가까이 경사가 져 있어서 방어가 쉽다. 남도부 대장이 와서 보고 전략적 요충지라며 아지트로 삼았다. 원동고개를 지나면 하루 저녁에 금정산까지 갈 수 있는 코스고, 천황산 넘어 밀양 표충사까지 연결돼 있다."

 

남도부 부대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 681고지에 사령부를 차리고 6.25 전쟁 시기 부산, 경남 일대에서 후방 교란 작전을 펼쳤다. 미군 트럭이 지나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보급투쟁'도 벌였다. 두 개 부대가 전방과 후방에서 트럭을 공격하면서 몇 킬로미터에 걸쳐 도로를 장악해 무기와 식량을 노획했다. 대규모 보급투쟁에는 부대원 60~70명과 당원 20~3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빨치산들의 '산 생활'

 

'산 생활'은 어땠을까? 잠은 어떻게 잤을까? 특히 겨울은 어떻게 견뎠을까?

 

"여름에는 그냥 숙영해도 괜찮은데 겨울은 참 어렵다. 눈은 푹푹 내리지 바람은 불지... 보초를 교대로 세워놓고, 천막 밑에 '페치카'라고 땅을 파서 거기다 나무가지에 불을 피운 다음 재 위에 돌을 깔고 담요를 덮어서 거기 발만 집어넣고 잠을 잤다. 그렇게 겨울을 났다."

 

천막은 물을 들인 광목천과 나무가지로 만들었다. 짊어지기도 가벼웠고 물도 새지 않았다. 신발도 고무신에 광목천을 바늘로 꿰매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도록 한 다음 묶어 신었다. 고무신 밑창으로 길도 없는 급경사의 돌산을 3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짊어진 채 누비고 다닌 것이다.

 

우리가 견뎌낼 수 있었 가장 큰 힘...동지애

 

'투쟁'을 갔다오면 며칠씩 쉬어야 했다. 발싸개를 말리고 휴식을 취한 다음날 '총화'를 한다.

 

"솔직하게 자기비판이라는 게 있다. 이게 참 어렵다. 하지만 조직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더라. '내가 참 미안하게 됐다. 잘못했다. 동지들이 후퇴할 때 내가 힘이 돼줬으면 좋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함께 지내다보니까 이런 얘기들이 누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나온다. 이것이 우리가 견뎌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아

 

구연철 고문은 6.25 전쟁이 끝난 뒤 경주 토함산으로 파견을 나갔다. 파견 나온 한 달 사이에 9명이던 부대원은 2명으로 줄었다. 무전기도 없어서 '선'을 댈 방법이 없었다. 총 하고 먹을 식량만 챙긴 채 나흘 걸려 신불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령부가 있던 자리는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지도부를 찾아 저녁에 생쌀을 조금 씹고 이천마을 입구로 내려가다 매복에 걸려 총을 맞았다. 동료는 바로 잡혔고, 구연철 고문은 정신없이 산으로 도망쳤다.

 

"총을 분명히 맞았는데 아프진 않은 거야. 그냥 내를 건너서 어두운 산을 기어갖고 바위산을 몇십 미터 올라왔어. 근데 가슴이 뻐근하고 미끈미끈한 거야. 옷을 열어보니 피가 막 흘러 있어. 팔뚝으로 총알이 관통했어. 조금만 비스듬히 섰어도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을 거야. 살았다고 마음을 탁 놓으니까 팔이 움직여지지 않는 거야. 배낭 안에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머큐룸을 솜에다 묻혀서 상처가 어딘지도 모르고 가슴에 막 발랐어. 다이아진 가루도 손바닥에 부어가지고 칠하고...그렇게 바위 틈에서 밤새도록 숨어 있다가 다음날 혼자서 지도부를 찾아갔는데 용케 찾아냈어. '죽지 않고 살아왔나' 서로 부등켜안고, 간호원이 와서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구연철 고문은 하산한 뒤 1954년 부산에서 체포돼 1974년 석방될 때까지 20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일송과 주송

 

몇해 전 민주노총인천본부 통일위원회와 구연철 고문은 초기 681고지 사령부에서 옮긴 남도부 부대의 말기 사령부 터에서 뜻깊은 행사를 치렀다.

 

남도부 부대의 말기 사령부 터와 인근 당 지도부가 있던 자리에는 당시 자리를 지키던 소나무가 그대로 살아 있다. 네이팜탄에 신불산 일대 소나무들이 거의 다 불탔는데도 이곳 소나무만은 아직도 60년 세월을 이기고 서 있는 것이다.

 

구연철 고문과 민주노총인천본부 통일위원회는 사령부 자리 소나무를 '일송'(통일 소나무), 당 지도부 자리에 있는 소나무를 '주송'(자주 소나무)이라 이름붙였다.

 

 

26일 역사 산행을 주관한 열사장학문화사업회는 구연철 고문을 비롯해 부산.경남지역 빨치산 장기수들의 삶을 역사로 기록하는 '(가칭)장기수선생님역사기록서발간추진위원회'를 꾸리고 발간추진위원을 모집하고 있다.

발간추진위원은 1년동안 달마다 5000원 이상 일정액을 후원하거나 일정 금액을 한번에 후원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문의=사단법인 열사장학문화사업회 051-637-7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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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16:50 2010/06/2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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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 격동의 시기에 이 땅을 뒤흔든 빨치산 투쟁, 그 현장을 지켜온 영남알프스 빨치산 구연철 일대기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 어린 나이로 해방을 맞은 구연철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전쟁을 맞이하면서 빨치산을 찾아 신불산에 들어가 활동했던 기록이다. 소설가 안재성이 오랜 기간 구연철 선생과 직접 인터뷰를 하여 구술사 형식으로 집필한 이 책은 일본에서 보낸 구연철의 어린 시절, 해방과 더불어 벌이게 되는 빨치..
산지니 2011/06/20 14:48 URL EDIT REPLY
구연철 옹의 일대기 <신불산>이 출간되었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들, 책이 나온 후의 이야기들을
출판사 블로그에 올려 놓았습니다.
http://sanzinibook.tistory.com/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