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세월이 갈수록, 수행을 해나갈수록, 오늘날의 수행자상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더욱 자주 던지게 됩니다. 즉 "수행자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뜻하지 않은 곳에서 충격적인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지난 5월31일 경북 군위읍 사직리 낙동강 둑에서 조계종 소속의 문수(文殊)스님이 소신공양을 함으로써,
"이명박 정권은
1.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폐기하라!
1.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1.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는 유서를 남긴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자가 정치권의 실정과 독주에 대하여 소신공양을 통해 경종을 울린 예는 1963년 남베트남 사이공에서 있었던 틱 쾅둑(Tich Quang Duc)스님의 소신공양이 있습니다. 온몸이 불타는 가운데서도 가부좌한 자세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이신 스님은 고딘 디 엠 정권의 압제와 불교탄압에 항거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름으로써 반민주-반독재의 외침을 온 나라와 세계에 전했으며, 스님을 본받아 다른 스님 36분과 여신도 1분이 소신공양에 동참함으로써 마침내 고딘 디 엠 정권은 물러나고 베트남의 종교탄압은 막을 내립니다. 이때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지라 의도적으로 "사회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극렬분자 스님의 자살시위"로 왜곡-폄하하여 보도함으로써, 이 소신공양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속인의 눈으로 본다면, "한 몸 불사름으로써 여럿을 살린 '살신성인'의 장한 행동"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이 하나"요 "색이 곧 공"이며 "내가 곧 너"라는 불교적 가르침을 실천한 보살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온몸을 불살라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용기와 희생정신을 그대는 갖고 있는가?"라는 준엄한 질문입니다. "세속을 떠나 정진해야 할 스님이 왜 쓸데없이 정치에 관심을 갖느냐", "꼭 '자살'을 해야 하느냐?", "불살생(산 목숨을 죽이지 않음)을 근본지침으로 삼는 불교의 수행자가 할 일이냐?"와 같은 질문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수행자로서 문수스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불교 수행자의 행동은 불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해서 우선 이해하여야 하고, 이어서 이것이 당대의 사회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가치있는 종교라면, 세속적으로나 종교적으로도 모두 훌륭한 가치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신공양의 불교적 가치와 철학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경전으로는 <법화경> '약왕보살품'이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일체중생희견보살(一切衆生喜見菩薩)이 1만2천년의 수행 끝에 온갖 중생의 모습을 뜻대로 나타낼 수 있는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은 다음,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자신을 가르쳐준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과 <법화경>에 공양하기로 마음먹고, 이 삼매에 들어 꽃과 향으로 공양하였으나, 이 공양을 마치고 삼매로부터 일어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신통의 힘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소신공양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 부분은 경전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공양을 마치고 삼매로부터 일어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비록 신통의 힘으로 부처님께 공양하였으나 몸으로써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곧 전단향.훈육향.도루바향.필력가향.침수향.교향 등의 모든 향을 먹고 또 첨복 등 모든 꽃의 향유 마시기를 일천이백 년이 되도록 하였으며, 또 향유를 몸에 바르고는 일월정명덕 부처님 앞에서 하늘의 보배옷으로 몸을 감고 모든 향유를 몸에 뿌리고 신통력의 서원으로 몸을 스스로 태우니, 그 밝은 광명이 팔십억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세계를 두루 비추었느니라. 그 세계에 계시는 여러 부처님께서 동시에 찬탄하며 말씀하셨느니라.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여.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이 참으로 법답게 부처님께 공양함이 되느니라. 만일 꽃과 향과 영락과 사르는 향.가루향.바르는 향과 하늘의 비단번개와 해차안의 전단향 등 이와 같은 여러가지 물품으로 공양할지라도 능히 이에 미치지 못하며, 혹은 국토와 아내와 자식을 보시할지라도 또한 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선남자야, 이것이 제일가는 보시라 하며 모든 보시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법으로써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모두 잠자코 계셨느니라. 보살의 몸은 그후로도 일천이백 년 동안을 불타고 난 뒤에야 그 몸이 다하였느니라."
소신공양의 의미는 이처럼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신통력과 서원의 힘으로 자기의 몸을 태워 우주를 밝히는 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단순한 등불이 아니라, 윤회의 기나긴 밤을 밝혀주는 '지혜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소신공양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참된 정진(精進)의 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소신공양은 즉 법공양(法供養)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는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이와 같은 법공양을 마치고 목숨이 다한 뒤에 다시 일월정명덕 부처님의 국토 가운데 정덕왕 가문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부모의 인연을 받지 않은 채 홀연히 태어나 그 아버지에게 해준 게송에 드러나 있습니다.
대왕이신 아버지시여, 마땅히 아옵소서.
내가 저곳 국토에서 오래도록 경행하여
일체색신 나타내는 삼매를 얻었으며
부지런히 정진하고 아끼던 몸 버리면서
부처님께 공양드려 위없는 도(道) 구했나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수행자로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은 일체중생희견보살이 '아끼던 몸을 버린' 이유는 최상의 도를 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것입니다. 몸이 불타는 가운데서도 삼매와 서원은 파괴되지 않고 정진은 깊어간 끝에 마침내 일월정명덕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부촉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두 가지 병고를 구완하는 약왕보살이 된 것으로 <법화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지혜와 자비심이 함께 일어나고 증진된다고 부처님을 비롯한 많은 선지식들이 말씀하십니다. 즉 참다운 지혜는 실천으로 이어지고, 실천은 지혜를 더욱 완전하게 함으로써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수행해야만 누구나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이상적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기초를 한국의 수행자들이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잠시, 문수스님의 유서로 돌아가 보면, 그 내용은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물 속에 사는 여러 생명체들에 대한 자비심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신공양을 통해 정진하신 문수스님의 서원입니다. 거기에 이미 '나(Ego)'는 없고 '우리(We)'만 있습니다. 스님의 소신공양 속에는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아니하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입니다. 그 속에서 저는 약왕보살 뿐 아니라 온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끌어안아 보듬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비(大慈悲)를 봅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와 독선을 향해 온몸을 던져 봉사하신 문수스님의 참뜻을 조금이라도 오늘에 되살릴 수 있는 수행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세상의 모든 훌륭하신 수행자 여러분 앞에 깊이 참회합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
성기서((사)위빠사나 명상센터 호두마을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