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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유물론의 덧글에 대해..
'텍스트는 열려 있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해석학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를 꺼냅니다. 우리는 세계-속의-존재이고,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가장 단순한 것부터 본다면 "언어" 같은 게 있을 수 있죠) 이것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입견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는 틀을 "지평"이라고 하는데요, 주목할 부분은 이 "지평"이란 게 변한다는 겁니다. 즉, 조선시대의 글을 지금 읽는다고 합시다. 분명히 그때 사람들이 읽던 것과 우리가 지금 읽는 것은 확연히 다르겠죠?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야! 그때의 시대 상황 등을 충실히 이해해야지!"라고 버럭 우길까요?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아니, 작가가 "분열"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는 있을까요? "분열"로 오면서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이 "분열"을 강조한 라캉이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긍정적이든, 비판이든) 계속 다뤄지는 것이지요.
라캉 이야기 전으로 돌아가면, 이걸 미학에서는 "수용미학" 정도로 볼 수 있겠죠? 그래도 아직까지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모델이 작동을 합니다. 어디까지나 텍스트/예술은 "작가"를 떠날 수 없고, 그 틀 안에서 텍스트/예술이 채우지 못한 빈 자리(의도적이든, 어쩔 수 없는 한계이든)를 "수용자"(독자)가 생산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68년을 전후로 "작가의 죽음"이 화두로 오르게 돼죠. 작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데리다처럼 텍스트를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나, 에코처럼 열린 텍스트 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요한 건 작가-독자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아니라, 우연히 나오는 다양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라는 거죠.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본다면 이렇게 탈주선을 그어나가는 거죠. 들뢰즈-가타리의 글을 보면 그래서 재밌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걸 "본질" 이야기와 연결한다면, "작가"가 바로 "본질"에 해당하겠죠? 분명히 이 텍스트/예술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내야 한다는 게 바로 본질주의죠. 그와 다르게 우리가 즐겨야 하는 것은 "최종 어휘"의 권위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사유하는 겁니다.
주의할 점은 이게 도식적으로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아"라고 떠드는 게 아니라, 내가 진리를 쥐고 있다는, 현전(現前)을 안다는, 최종 어휘에 도달했다는 오만함을 경계하고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지요. 이런 걸 리처드 로티식으로 말하면 "아리러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두서없이 글만 길어지고 있는데, 참고할 걸 정리를 해본다면, 고전적인 독해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이데거를 보시면 좋을 듯 하구요. 가다머, 데리다 등도 보신다면 좀 더 현대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겠죠. 그외에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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