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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8/27
    미디어참세상에 트랙백 기능을 추가하자.(1)
    순수
  2. 2004/08/27
    새로운 인용 방법
    순수
  3. 2004/08/27
    텍스트(1)
    순수
  4. 2004/08/26
    유물론(3)
    순수
  5. 2004/08/26
    왜 덧글에 장문의 글을 쓸까?(9)
    순수
  6. 2004/08/26
    전쟁은 사소하게 시작된다.(1)
    순수
  7. 2004/08/26
    "아이 좀 안 낳으면 어때?"(7)
    순수
  8. 2004/08/25
    리좀(5)
    순수
  9. 2004/08/25
    여성해방 + 어머니 ?(18)
    순수
  10. 2004/08/25
    RSS(Really Simple Syndication)(1)
    순수

미디어참세상에 트랙백 기능을 추가하자.


한줄 답글, 장문의 답글, 트랙백은 각각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한줄 답글의 경우 즉흥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쉽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가식적이지 않고 그대로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단지, 여기에서 본격적인 논쟁이 붙을 경우 공간과 검색 상의 어려움으로 사실상 파행으로 치닫는 건 수많은 게시판에서 확인했을 꺼라고 믿는다.
두번째, 장문의 답글을 달 수 있는 시스템도 상당히 좋다. 이미 수많은 토론형 게시판이 이 형태를 채택하고 있으며, 여기서 논의되는 이야기들을 보면 상당히 정리되서 표현된다. 인터넷 언론들이 채택하고 있는 방법이 바로 이 두번째 방식이고, 여기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다. "장문의 답글"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과 "장문의 답글"이 써지는 것은 다르다. 실제로 짧은 글을 통해 한줄 답글과 큰 차이가 없는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최근에는 오히려 회원/비회원을 가르는 폐쇄적인 답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게 자칭 열린 인터넷 언론들의 현실이다. (예전에는 분명히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왜 최근에 메이저 인터넷 언론의 한계가 보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세번째, 트랙백을 제안하고 싶다. 물론 트랙백과 기존의 방식은 엄염히 다른 장/단점이 존재하고, 트랙백만으로 국한하자는 것은 또 다시 블로거/비블로거를 나누게 된다. 그저 기존의 시스템에 트랙백도 가능하게만 하자는 거다. 이미 수많은 블로그가 트랙백과(and) 덧글이라는 양 날개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블로그는 1인 미디어"라는 허황된 슬로건을 내거는 것보다는 우리가 정말로 "네트"로 연결될 수 있도록, "노드"가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을 생산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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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용 방법

짧은 인용을 할 때는 큰따옴표("), 좀 많은 인용을 할 때는 독립 문단으로 기울임을 줬는데요, 이게 상당히 눈이 아프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hof님의 조언에 따라 박스로 처리하는 걸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스트는 테스트란 거죠^^)
1099년에 설립된 유럽의 비밀단체, 시온 수도회는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이다. 파리 국립 도서관은 1975년에 기밀문서로 알려진 양피지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작 뉴턴, 보티첼리, 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한 수많은 시온 수도회의 회원들 이름이 있었다.
인용 출처는 요새 잘 나가는 모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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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유물론의 덧글에 대해..
'텍스트는 열려 있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해석학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를 꺼냅니다. 우리는 세계-속의-존재이고,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가장 단순한 것부터 본다면 "언어" 같은 게 있을 수 있죠) 이것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입견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는 틀을 "지평"이라고 하는데요, 주목할 부분은 이 "지평"이란 게 변한다는 겁니다. 즉, 조선시대의 글을 지금 읽는다고 합시다. 분명히 그때 사람들이 읽던 것과 우리가 지금 읽는 것은 확연히 다르겠죠?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야! 그때의 시대 상황 등을 충실히 이해해야지!"라고 버럭 우길까요?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아니, 작가가 "분열"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는 있을까요? "분열"로 오면서 많은 부분이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이 "분열"을 강조한 라캉이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긍정적이든, 비판이든) 계속 다뤄지는 것이지요.
라캉 이야기 전으로 돌아가면, 이걸 미학에서는 "수용미학" 정도로 볼 수 있겠죠? 그래도 아직까지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모델이 작동을 합니다. 어디까지나 텍스트/예술은 "작가"를 떠날 수 없고, 그 틀 안에서 텍스트/예술이 채우지 못한 빈 자리(의도적이든, 어쩔 수 없는 한계이든)를 "수용자"(독자)가 생산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68년을 전후로 "작가의 죽음"이 화두로 오르게 돼죠. 작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데리다처럼 텍스트를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나, 에코처럼 열린 텍스트 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요한 건 작가-독자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아니라, 우연히 나오는 다양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라는 거죠. (들뢰즈-가타리식으로 본다면 이렇게 탈주선을 그어나가는 거죠. 들뢰즈-가타리의 글을 보면 그래서 재밌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걸 "본질" 이야기와 연결한다면, "작가"가 바로 "본질"에 해당하겠죠? 분명히 이 텍스트/예술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우리가 정확히 알아내야 한다는 게 바로 본질주의죠. 그와 다르게 우리가 즐겨야 하는 것은 "최종 어휘"의 권위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사유하는 겁니다.
주의할 점은 이게 도식적으로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아"라고 떠드는 게 아니라, 내가 진리를 쥐고 있다는, 현전(現前)을 안다는, 최종 어휘에 도달했다는 오만함을 경계하고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지요. 이런 걸 리처드 로티식으로 말하면 "아리러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두서없이 글만 길어지고 있는데, 참고할 걸 정리를 해본다면, 고전적인 독해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이데거를 보시면 좋을 듯 하구요. 가다머, 데리다 등도 보신다면 좀 더 현대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겠죠. 그외에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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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여성해방 + 어머니 ?의 덧글을 이어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건 유물론입니까? 선언한다고 유물론이 되지는 않지요. 자발적 모성을 얘기한다고 해서, 모성을 본질적인거라 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성이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로 받아들였다고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아니랍니다^^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그걸 부정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안합니다. 이론적으로 방대한 얘기를 그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거에 한계가 느껴지는군요.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 원문도 "여성운동하는 사람"이 쓴 거 아닌가요? "이론적으로 방대한 얘기"라면 방대하게 하나씩 이야기하면 됩니다. 우리는 엘리트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대중과, 민중과 함께 오손도손 하나씩 이야기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 행동이 필요한 겁니다.
당연히 노동개념의 재구성과 전략이 필요하겟조.
저는 그 반대입니다. 단순히 "노동 개념"을 다르게 "재구성"하고 새로운 "전략"을 사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노동"이란 "언명"에 사로잡힌 것은 그대로이기 때문이죠. 그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소비에트"입니다.
좀 다른 식으로 접근한다면, 행동심리학의 어포던스라든가, 라캉의 대문자 타자라든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장 보드리야르의 거울상 등으로 살펴볼 수도 있겠죠.
다양한 개개인들 속에도 결국엔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있다는 거조.
바로 그겁니다. 다양한 개인들을 그대로 보지 못 하고, 타자를 설정하고 그에 의해 동일자가 생산되는 형태였던 게 여태까지의 모습이었죠. 이 "구분"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게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그저 그 구분을 그대로 둔 채 투쟁을 벌인다면 한마디로 놀아나는 꼴이죠.
인간을 아무리 개개인으로 본다해도, 여성과 남성이라는 종적으로 다른 두개의 유적존재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중요합니다. 해방을 위한 조건들과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문제설정은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단절을 언급하면서 나오는 겁니다. 즉, 기존과는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문제 지점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거죠. 남성/여성의 여태까지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문제설정이라는 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종적으로 다른 두개의 유적존재"라는 것은 철저히 동성애자를 배제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라도 해도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구분인(!) 남성/여성의 이분법 위에 올려놓겠다는 거죠.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 성적소수자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주민등록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을 남녀로만 구분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정확이 어떤 지점이 어떻게 다른가요?
따라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재구성이 중요합니다. 여성은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을 가져본적이 없조. 타자에의해 규정되엇구요. 따라서 여성들의 공통분모에서 시작할수 있을꺼구요.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이라는 건 아닙니다. 둘의 관계는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 "공통분모"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타자"입니다.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라고 꿈꾸고, 그것을 발견했다고 믿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게 바로 "마초"입니다. "싸나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고, 그에서 어긋나면 싸나이가 아닌 "계집애"라는, 동일자/타자의 모델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겁니다. 남성의 정체성은 남성에 의해 규정되었나요? (혹시라도 "타자"를 "남성"으로 오해하실까봐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성의 정체성이 말씀하신대로 모성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조. 쉴라 로보쌈의 글은 절대 그런 맥락이 아니구요. 여성이 모성의 깃발아래 모이자고 한 것도 아니구요. '자발적'이란 말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은데, 그래서 모성이 권리가 되어야 한다는 거구요.
저도 "모성이 권리가 되어야 한다"라고 읽는 것 또한 "맥락"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텍스트는 열려 있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자발적 모성"은 본질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기존 모성의 폐기 / 새로운 모성의 제안"이라는 명확한 표현이 아닌 "자발적 모성"이라는 고루한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성으로서 나의 여성성을 찾는다"라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차이"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차이의 유희는 충분하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 "차이"를 자기 안에서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을 구분하는 방법에 의해, 그리고 그에 따라 속해버린 집단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는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분명히 근대 국가 체계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겠죠?(언명) 나는 그러므로 한국인이라는 범위 안에서 공통 분모를 찾아서 (좀 오버한 예를 든다면, "한국인은 근면성실하고 머리가 좋다!")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요? 좀 더 극단적으로 봅시다. 모성 본능이 없는, 아이를 끔찍히 싫어하는 여성은 "진정한 여성"이 아닌 걸까요? 바로 이 부분이 "타자"를 설정하는 부분이고 "진정한 여성"이라는 "본질"이 만들어지면서 "동일자"가 생산되는 지점이지요.
덤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만들어진 공통분모를 볼까요? "합리성" 같은 걸 들 수 있겠죠? 이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그 유명한 "광인 / 정상인"을 보게 됩니다. "합리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공통분모일까요? 이걸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동일자/타자 모델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아니, 정말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의 공통분모를 찾았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인간/비인간이라는 모델로 갑니다. 예? 그럼 전지구로 가죠. 그럼 또 다시 지구/비지구의 모델로 갑니다.
이렇게 하면 끝이 없겠죠? 예,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이 모든 걸 바로 폐기하자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의 산물임을 인정하는 것 입니다. 본질주의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리처드 로티식으로 말하면 "최종 어휘"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역사 위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속의-존재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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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덧글에 장문의 글을 쓸까?

덧글은 폐쇄적이다. 누군가 새로운 이야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 어렵게 한다.
글을 작성해서 트랙백을 거는 것과 덧글을 즉흥적으로 다는 것은 각자 장단점이 있다. 장문의 글을 쓰거나, 논쟁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트랙백이 어울린다.
사실 덧글을 확인하고 거기에 또 덧글을 다는 건 귀찮다.
트랙백을 걸자. 트랙백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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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사소하게 시작된다.


#1.
평소 PS2주1)에 관심이 있던 순수(pure)는 루리웹주2) 사이트를 들렸다. 오늘도 웹서핑은 즐거운 일이고, 게임에 대한 소식과 게시판의 이야기들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2.
한편, 평소 순수를 괴롭히던 플래쉬주3) 광고주4)는 오늘도 사이트 상단에서 자신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으며, 플래쉬 광고의 놀라운 무게는 너무 빠른 웹서핑을 잠시 멈추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다행히 순수의 컴퓨터는 사랑과 우정의 파워주5)를 발휘해 다운될 위기에서 벗어났다.
#3.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플래쉬 광고가 아니었다. "거상"의 제작진이 만든 온라인 게임 "군주"라는 복병이 있던 것이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중국과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갈등은 이 광고에까지 침투했던 것이다.
#4.
"중국파병 찬성합니다"라고 한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역사왜곡 막아야 합니다"라고 한다. 결의에 찬 목소리다. 흡사 "인권"을 침해하는 걸 감수(?)하면서 친일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한다고 외친 노무현을 보는 듯 하다.
"시대를 초월한 역사 수호 전쟁"이라고 한다. 뻔한 레파토리다. "수호"를 위한 "전쟁". 정치와 전쟁은 명분과 광기에 기반해서 작동한다.
"우리가 심판 합니다!"라고 한다. 갑자기 모두 역사의 심판자로 등극하게 된다.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이여 모두 일어나라!
전쟁은 이렇게 아주 사소하게 시작된다.
#5.
배너를 클릭하면 나오는 페이지에선 우리의 영웅 "오인용"주6)에서 만든 플래쉬 애니가 순수를 반겼다.
순수, 결국 이 광고의 몰상식함과 한국의 변태적인 민족주의주7) 앞에 좌절... 패(敗)!!!

주1) 일본의 소니에서 개발한 가정용 게임기. "Play Station 2"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으나 너무 길어서 "플스2" 또는 "PS2" 등으로 불리운다. 인터넷 글쓰기를 하는 사람 중에는 추신을 붙일 때 "P.S." 대신에 "플스"라고 언어 유희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주2) 한국 최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규모의 비디오 게임 커뮤니티. "루리"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으며 지금은 인티즌에서 인수해서 좀 더 거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옛날의 그 디자인이 계속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주3) FLASH란 툴을 이용해 제작된 Shorkwave 미디어를 일반적으로 그냥 "플래쉬"라고 부른다.
주4) 현대 소비사회는 전통적인 수요-공급을 붕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을 생산했다. 그 중 대표적인 방법이 단순히 상품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 자체도 생산하는 것인데 광고는 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주5) 사랑과 우정은 허상이지만 그 허상을 존재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바로 이 파워의 원동력이다. 물론, 이걸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바보짓이다.
주6) 처음에 5명으로 시작한 애니메이션 제작팀. 마초이즘을 기반으로 "연예인 지옥" 등을 제작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주7) 최근 한겨레21에서 서세원을 인터뷰했다. 그가 안중근을 다루고 고구려에 대해 다룰 꺼라고 해서 띄우는 걸 보고 한국의 민족주의의 천박함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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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좀 안 낳으면 어때?"

분명히 아이를 낳는 게 두려운 최악의 경제 상황 내지는 복지 정책 등에 대해서는 비판을 해야 한다. 기사에서도 분명히 그 지점을 집어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걸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나라의 절대인구가 줄어드는 날도 멀지 않은 분위기다.

절대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기사에서는 "절대인구 감소라는 위기"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이게 위기가 되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단순히 "위기"인 것 뿐이다. 이 효과에 대해서는 간단히 살펴보고 싶다면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을 봐도 좋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푸코를 읽어도 좋다.
이걸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절대인구 감소라는 위기뿐 아니라,"라고 하면서 다음 이야기로 확대시킨다. "한국경제에 치명적 걸림돌"이라는 어디선가 많이 써먹은 듯한 내용이 바로 흘러나온다. "회생불능의 침몰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위기"다!!!
이 엄청난 위기 앞에서 조금만 오버해보자. 감히 남성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여성들을 색출해야 한다. 남성과 결혼했으면서도 감히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여성들을 색출해야 한다. 섹스는 즐기면서 피임은 꼬박꼬박하는 악랄한 여성들을 색출해야 한다. 감히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아이를 낳지 못 하는 동성애자를 색출해야 한다. 그들은 "한국경제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회생불능의 침몰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대중이 접근할 수 없다. "아파트값 거품을 빼고 세계최고의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국지도층이 매진해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디까지나 "지도층"이 이끌어야 한다. 집값 좀 지금보다 싸게 하고 (절대로 무료가 아니다. 경제정의에 따라 정확한 "교환가치"를 끌어내는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을 좀 줄이고(입시와 학벌은 그대로 두고?) "이제 아이 낳아도 좋은 환경이에요~"라고 "한국지도층"이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웃긴다.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하는 것은,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를 갖길 원하지 않는(또는 가질 수 없는) 사람을 배제하는 기사의 위기 논리는 도대체 뭔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런 개개인의 소망과 실현에 대한 따스한 마음이 아닌 "위기"를 거론하면 그때부터는 단순한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총제적 위기 앞에서 우리는 박정희 장군을 위대한 "한국지도층"의 대부로 모신 게 아닌가?
아이 좀 안 낳으면 어떤가? 기존의 가족-국가 체제가 붕괴할까봐 위기 운운하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상황과,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이 두려운 상황과, 집에서 살고 싶어도 철거 용역에 시달리는 상황, 그리고 평화롭게 있도 싶어도 군대에 끌려가고 심지어는 이라크로 진출(?)하는 상황 같은 거다. 개개인에 대한 우리의 눈을 가리고 몰상식하게 위기를 거론하는 건 유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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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

글을 보니 "리좀"이 떠올랐다. "천개의 고원" 서문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제안했던 모델... "노드"를 뻗어나가는 시발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우연히 "겹쳐진/만나는" 곳이고,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뻗어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노드에는 중심이 없다. 좀 더 많이 연결될 수도 있고, 적게 연결될 수도 있고 그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트랙백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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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 어머니 ?

그냥 뒷부분에 있던 "어머니"란 단어에 뭔가 어색함을 느껴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 여성의 평등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
 * 여성의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동등한 참여.
 * 동일노동/동일임금, 여성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종식, 특정 직업들로부터 여성의 배제의 종식.
 * 가내노동자들(가내하인들)에게 공장노동자들과 동일한 임금지급

 * 실업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나누기
 * 산파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을 위한 직업훈련 센터
 * 자본이 제공할 수 있는 연맹의 힘을 바탕으로 남녀 노동자들 사이에서 협동조합을 발전시킬 필요성
 * 고용 조건의 개선
 * 필요할 때 여성들에게 노동을 대가로 생산물과 보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수단들 - 해당 분야의 여성노동자들을 도와 분학/예술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킬 수 있는 문학/예술 협동조합, 실업여성들을 위한 협동조합을 포함하는 수단들- 의 마련
여기까지는 노동자와 관련해서 당연히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특별히 "여성"이란 주제로 갈 내용은 아니다. (그 당연함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하는 이야기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내용 자체만 검토하자.)
 * 모든 작업장에 식당과 탁아소 설치
 * 아이들과 편부모로 구성된 가족들에게 저렴한 공동식사/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정권이 딸린 크고 쾌적한 주택
 * 공공의 식당/탁아소/세탁실/회의실/도서실/오락실
 * 여자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에 대한 무상의 공공교육, 훈련
 * 빈곤한 어머니들에게 모욕감을 주지 않는 사회복지 제도
 * 무상의 의료서비스, 그리고 산파들에 대한 국가의 보수 지급
 *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도록 그들에게 제공할 사회기금 조성
여기까지는 아동 및 기타 "사회복지"에 관련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에 조금 어색함을 느끼는데, 많은 부분이 "아이"에 대한 부담 없이 "노동"을 할 수 있는 "어머니"란 내용으로 흐르는 느낌을 받는다. 이건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자본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첫번째 내용은 이미 자본이 수행 중이고, 두번째는 사실상 효율적 노동 관리를 위한 감금의 형태다. 군 관련 시설을 참고하면 딱 이 형태다. (여담이지만, 글 중에서 "정권"이 아니라 "정원"이 아닐까...)
"여성해방"과 "어머니"가 결합하는 것도 좀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여성에 의한 노동력의 재생산을 사회적으로 보장(강요?)하는 것 아닌가? 재생산에 관련한 "조건"을 찾아서 해결하려는 게 자본 분석의 기초라면 ─ 그래서 생산수단의 사유화 폐지를 말하는 거다 ─ 이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은가? 뒤에서 또 이야기하겠지만 "자발적 모성"이라는 것도 "어머니"라는 환상에 의한 착취 모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걸 인정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면 어떻게 또 되는 것인가? 글쓴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약간 오버를 해본다면, 노동력의 재생산이 불가능하므로 국가와 사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되니 퇴치해야 할까? 너무 오버한다면 글을 다시 살펴보자. 반복해서 "산파"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분명히 노동력의 재생산에 국가에서 개입한다는 이야기다. 푸코식으로 말하면 침실에 개입하는 권력, "생체관리"다.
아래는 분류가 애매한 이야기들...
 * 매춘부들에 대한 대안적인 일자리 제공
대안 일자리를 제공하면 "매춘" 문제가 해결될까? 매춘의 원인이 단순히 "가난" 같은 경제적 이유만 있을까?
 * 가내노동자들의 회합과 조직을 위한 센터
"가사노동자"를 포함한 더욱 커다란 "가내노동자"란 이야기인가? 위에 보면 "가내하인들"이란 말이 있는데 이걸 의미하나? 요새도 하인이 있나? 가정부 등을 의미하는 걸까? 이 부분을 정확히 알기 어려우므로 패스 -_-;;;
 * 자발적 모성
"모성"이란 무엇일까? 유물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단순한 "유명론"의 결과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 처럼 그저 언어에 의한 착각에 불과하다. "여성" 문제라면 "가부장제", "가족주의" 등과 떼어놓을 수 없고 그 근간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모성"이다. 개인들이 모성을 가지는 것은 자유다. 분명히 필요성도 어느정도 존재한다. (자녀를 그냥 버리길 바라지 않으므로.. 물론, 자녀를 억압하는 용도로 쓰이는 걸 훨씬 많이 봐서 개인적으로는 반감이 더 크다. 자녀가 여성이라면 아예 그냥 부모의 컨트롤 안에 가두려고 별짓을 다 한다.) 하지만 이게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조치'"가 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장담하건데 소비에트의 악몽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오오오, 숭고한 여성해방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여성의 개념 정의와 정신 개조, 훈육이여... 소비에트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봉기를 억압했다. 과연 이 조치는 어떤 놀라움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을까?
"노동해방"이라는 말은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할 수 있다. 너무 방대하고 곤혹스럽다. "여성해방"이라는 거대담론도 너무나 거창하고 애매하다. "여성의 해방"과 "여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나누어 보자.
여성의 해방이라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 남성? 이건 너무 웃기는 이야기가 된다. 가사노동? 자녀? 과연 무엇일까? 반대로 남성해방도 존재하지 않을까? 아내, 자녀, 과도한 책임 등 오히려 가족주의에 의해 묶여버린 그 꼴도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는 여성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자. 그렇다면 "여성"이란 타자의 선언으로부터의 해방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여성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장점과 단점 이 둘로부터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어떻게 해야 여성이라는 언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해방의 그 날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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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네에 있는 RSS 글을 보고 RSS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좀 약한 것 같아서 호프님의 글을 연결했습니다. 두쪽에 모두 트랙백을 걸껀데, 아무래도 진보네 쪽에 들르는 분들을 위한 트랙백이겠죠?
그저 단순한 "징검다리 포스트"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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