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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에서의 정신

* 이 글은 미류님의 [감기와 정신분열증]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다양한 형식의 물질작용을 통해 우리의 기억과 사고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차이", 곧 "증상"을 하나의 모델로 잡아가시는데, 그게 바로 제가 현대 의학의 맹점이자 위험한 지점이라고 보는 부분입니다. 둘의 발명의 시기가 다르다고 했죠? 임상의학이라는 커다란 틀로 보면 유사하게 발전하겠지만, 실제로 접근하는 방법에서는 크게 차이가 났습니다. 기존에는 분명히 정신과에 속하는 것도 물리적 원인에서 찾으려고 했었죠. 매우 비상식적인 정신병 치료법들이 그래서 등장한 거죠. 그렇지만, 이런 걸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으니, 이제는 정신과에서 그 부분을 아주 합리적으로 포섭했습니다.
"병의 발명"이라는 부분은 이미 서로 동의를 하고, 논의가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이전으로 넘어가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의 발명이란 사실 하나로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면서, 또한 병의 치료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난감합니다. 그 차이를 모두 지웠으면 새로운 차이 지점을 이야기를 하거나 해야 할텐데 말이죠.
언명 이전의 확연한 차이라면, 극단적으로 감기로는 죽는데 정신질환으로는 안 죽습니다. 왜냐면 정신질환이란 것 자체가 언명 이전의 신체의 사건이 아닌,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감기는 유물론적으로 작동하지만, 정신질환은 구조에 의해 작동합니다. 이 차이를 지울 때 고전 의학으로 돌아가고, 이 차이를 강화해서 포섭하면 현대 의학이 되는 거죠. 저는 그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신체질환에 있어서의 비정상성은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나 정신질환에서의 '비정상성'은 눈에 두드러지는 배제 작용을 해왔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비판이 주로 정신질환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듯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건 바로 정신/정신질환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의학 이전에는 감기라는 사건조차도 "관계"로 해석을 했죠. 대표적으로 "달거리" 같은 게 있는데요, 성경(레위기)에서는 이를 아예 부정한 것으로 분류를 하죠. 근대 의학은 확연히 차이를 드러내면서 이를 포섭하지요. 여기에서 분류의 기준들이 확연히 바뀌는 겁니다. 병의 발명의 지점 또한 바뀌는 거구요. 처음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병의 발명 지점이 어디이며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 지점들을 사정없이 지워버리면 아무 것도 되지 않죠. 광인에 대한 처리가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살피는 게 바로 "광기의 역사"죠? 거기에 보면 배제의 주요한 지점이 처음에 바뀌는 걸 다루죠? 바로 "나병환자"로부터 "광인"으로의 이행이죠. 왜 갑자기 이렇게 돌변할까요? 이걸 푸코는 근대 이성이라는 걸 테마로 잡아서 분석합니다. 이런 섬세함을 확장해서 "임상의학의 탄생"이란 것도 다루는 거지, 거기서도 "전과 마찬가지니까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각각 어떤 지점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작동했고 하는 것들을 정확히 실증적으로 다루고 있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소위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에 해당합니다. 저는 "정신"을 이 "관계"의 산물로 봅니다. 애초에 상징계로 편입되는 순간부터 게임은 끝나는 겁니다. 즉, 이쪽은 병의 발명 훨씬 이전의 문제입니다. 언명 이전의 감기는 이런 주체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주체로 편입되지 않아도 아프고 죽어버립니다. 정신질환의 경우엔 다릅니다. 정신질환이라는 언명 이전에 주체로 편입되면서 이미 "광인" 체제가 작동하게 됩니다. 근대 이성이 이걸 어떤 식으로 전유하느냐에 대해서 다룬 게 바로 "광기의 역사"인 것입니다.
차이에 대해서 두가지를 이야기하면, 첫째로 차이는 목적을 위한 분류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구요(바로 "병의 발명" 지점이 이 부분에 해당합니다), 둘째로 각 차이들은 그 자체로 분명히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두번째를 무시하고 하나로 지워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결코 목적론적 분류가 아닌 차이의 인식에 해당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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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옵티콘

* 이 글은 다섯병님의 [프라이버시와 감시]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단기적으로 보더라도 CCTV가 아닌 방식으로 범죄를 줄일 수 있는, 하지만 다른 권리(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지 않는 다른 방안을 모색해볼 수 있다.

"CCTV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우리는 감시 체제 안에 안주하고 있을 뿐"은 판옵티콘을 생각해서 쓴 말입니다. 감시 카메라 등으로 작동되는 건 어디까지나 판옵티콘을 위한 조건 중 일부에 불과하죠. 판옵티콘은 자기가 자기를 감시하는 체제입니다. 즉, "범죄예방"으로 우리가 편입되는 거죠. 좀 더 나아가면, "범죄"의 판단 기준을 만드는 "법" 체계로 효과적으로 편입시키는 거죠.
여담이지만, CCTV 설치는 정확히는 "권력자들의 통제 욕구"가 아닙니다. "권력의 통제 욕구"죠. "권력자"와 "권력"은 확연히 다릅니다. CCTV 설치는 정부 등이 주도적으로 강제로 관철시키려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미 감시 체제는 작동하고 있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그 안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권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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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발명 이전

* 이 글은 미류님의 [신체의 사건/관계의 사건]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저는 인간/몸에게서 신체와 관계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질병의 발명과 관련해서는
감기와 정신질환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naming 이전의 작동에 대해서는
naming 이후의 작동보다 차이가 적다고...
에공,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제가 파악을 못 하겠네요. ^^;;;;

당연히 인간에 대해서는 "신체"로 접근하는 게 맞습니다. (이게 유물론적 접근이죠.) 감기의 경우엔 병의 발명 이전에는 주체와 관계가 없지만, (신체의 훈육이 아닙니다) 정신질환의 경우엔 병의 발명 이전에도 이미 주체와 관계가 있다는 게 차이라는 거죠. (언명 이전의 언명입니다. 단, 초월적인 건 아닙니다.) 그래서 이후에 "실현"이라는 토픽을 가지고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거죠. 사실 이 지점이 "사회성", "적응"이라는 것으로 가시화되는 거구요.
처음 논의에서 저는 단순히 "병의 발명"을 문제로 삼았구요,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서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 그 이전으로 문제 지점을 옮긴 겁니다. 맑스가 자본의 조건을 찾는 것 처럼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한 거죠. 사실 저도 확실하게 정리된 게 아니고, 중간 단계를 많이 뛰어 넘어서 어색한 부분도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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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질환은 없다.

* 이 글은 미류님의 [발명/질병/배제]의 덧글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질환'이라는 말은 더욱 견고하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순수님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질환'-감기, 맹장염 등-은 허구라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질환' 혹은 '정신병'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참고로,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등에 대해서 현대'의학'은 약물'치료'를 기본으로 놓고 있습니다.
저는 "부르"는 행위 자체를 "욕망"으로 봅니다. 정신질환으로 분류하고 부르는 바로 그 지점과 그 효과를 저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감기와 정신질환의 가장 큰 차이는 Naming 이전의 작동이 확연히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유물론적 관점에서 감기와 정신병을 유명론의 결과로 봅시다. 그럼 이 둘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감기는 "신체의 사건"이고, 정신질환은 "관계의 사건"입니다. 저는 후자가 명확하게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훨씬 섬세하게 "권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합니다.
그 차이 지점은 바로 "실현"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욕망"의 실현에 대한 작동이 바로 정신질환인데요, 신경증이라면 자아의 억압이겠고, 정신병이라면 자아의 해방(?)이겠죠. 여기서 문제는 자아와 주체, 타자로 돌아갑니다. 타자에 의해 생산된 주체에 의해 자아는 위치하게 되는데, 그 위치를 벗어나게 되면 "욕망"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을, 교환 체계를 벗어나는 것은 실현되지 않는 거죠. 여기서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 자아가 (시장에 편입되도록) 중재를 하거나, 자아가 이 둘을 교란하거나...(자기만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자본으로부터 충분히 달아났다고 외치는 겁니다. 또는 자본가를 사살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 등은 후자에 속하는 건데요,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작동 매커니즘에 약물 등을 가해서 저지하는 거죠. 저는 이게 전기충격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타자에 의해 실현의 문제, 실재계-상징계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모든 치료 과정은 타자에 의해 주체로 포섭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지인들 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요, 굉장히 재밌는 사실은, 타자는 확고부동한 채 그들만 주체로 구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차이는 당연히 안정제 등의 약물이 차지하구요. 이건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과 별반 차이 없습니다. 타자를 배제하고 포섭하는 동일자의 폭력이죠.
타자가 정해놓은 위치를 고수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병"으로 발명한다면 이것을 "생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요? 의학은 이 모든 걸 포섭하고, 치료에 약물을 부여함으로써 또한 다시 이걸 포섭하는 재생산 조건을 생산하는 게 아닐까요? 개인을 주체로 포섭하기 위한 투쟁은 의학의 힘을 입어 더욱 가열차지고 있을 뿐입니다.
P.S. 글을 쓰고보니 푸코의 동일자-타자와 라캉의 타자-주체가 다른 때보다 심하게 뒤섞인 것 같네요.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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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

* 이 글은 다섯병님의 [ ‘강남 CCTV’ 4일만에 첫 범인 검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우리는 프라이버시권을 조금씩 조금씩 다른 가치(그것은 범죄예방과 같이 때로는 공익적이다.)와 맞바꾸고 있다. 당장은 다른 공익적 가치가 더 커보이더라도 조금씩 프라이버시권을 포기해가다보면 우리는 투명한 사회에 살게되리라는 것은 전혀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프라이버시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왜냐면 "나"와 그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만드는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거리에 있는 CCTV가 내 집을 비추지만 않는다면 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한다고 해서 그의 프라이버시 영역 설정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거리는 공적 공간인데 왜 거기에 대해서 프라이버시를 이야기하는 것이냐"라고 하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또 다시 생각하자. "범죄예방"은 "공익"에 속하는 것일까? CCTV가 예방한다는 범죄는 개인에게 속하므로 이 또한 다른 의미의 프라이버시 보장 시스템이 되는 것이 아닐까? (CCTV가 당신의 스토킹으로 인한 어려움을 해결합니다!) 과연 프라이버시의 경계와 공익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될까?
가끔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할 때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을 하는데,
물론 그 비판이 적절할 때도 있겠지만 자칫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거리에 설치되는 CCTV에 반대하는 것은 돈만 들지 범죄예방의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설사 효과가 있더라도 프라이버시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부분에서 고민을 풀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바로 "효과"란 부분. 즉, CCTV가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도식적인 말보다는 CCTV는 우리에게 "범죄예방"의 "효과"를 작동시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가운데 CCTV에 관한 담론은 이중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하나는 CCTV를 통한 범죄예방의 효과, 또 하나는 CCTV 반대를 위한 범죄예방의 효과. CCTV 논쟁은 이 "효과"를 그대로 둔 채 함께 달려나가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타자의 욕망 안에 있다.
CCTV가 판옵티콘이 아니다. 우리가 판옵티콘이라는 효과-속의-존재인 것이다. CCTV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우리는 감시 체제 안에 안주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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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문득 내가 쓴 글을 내가 읽어보니,
너무 뻔하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만 쓰는 것 같고...
이제는 내가 스스로 질릴 것 같다.
이 답답함은 최근 전혀 사유-활동하고 있지 않은 내 모습의 반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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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만들기

* 이 글은 심순님의 [도그빌]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내가 느낀 이 영화의 미덕은
아무튼 악인들이 처단된다는 것이다.
"처단"이라는 단어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 청산"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로젝트가 떠올라 포스팅을 한다.

이런 사고는 매우 편하다. "화씨 9/11"에서 처럼 억지가 됐건 뭐가 됐건 그 사람만 열심히 까면 되는 거다. 어찌됐든 악인을 축출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각오하면 되는 거다. (그 결과는? "화씨 9/11"은 정말 엉성하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보여준 그 센스는 다 어디로 간 것인가?) 8.15 연설에서 노무현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친일 청산을 해야 한다고 굳은 의지를 밝혔다. 괴물이 등장하면 건물을 부수건 누가 밟혀 죽어나가건 뭘 하건 울트라맨은 도심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의의 용사의 숙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도그빌"과 "지구를 지켜라"는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을 하고 엔딩을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으로 첨철된, 그래서 모순적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고, 또한 "유토피아적 해법은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런 인간들이 꿋꿋이 살아남아
약자들을 끝까지 탄압하니까 말이다.
"도그빌"은 강자와 약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의 미시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렇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네들이야 "왜 그럴까?"를 파고 들겠지만, 이 영화는 그 작동 자체를 덤덤히 보여주고 있다.
악인을 멸할 구세주는 재림하지 않는다.
단지, 악의 축을 상정하고 그를 멸망시킬 권력이 바뀌어갈 뿐이다.
아이들을 보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죽이고, 울지 않으면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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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아파야 한다.

오명, 더러워진 이름이나 명예.
그러나 정신질환은 그저 하나의 질병일 뿐이다.
그렇다면 "질병"은 어떻게 접근이 될까?

"정신병"의 경우엔 좀 더 미묘하다. 정신병은 "병적 정신상태"를 의미하는데, 도대체 그 "병적"인 것의 기준이 뭘까?
역시나, 문제는 어느 지점을 "병"으로 간주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 의학의 가장 큰 맹점 중 하나를 살펴보자. 나는 분명히 어딘가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멀쩡해요"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또는 병원에선 큰 병이라고 했지만 아무 이상 없이 잘 지낸 적이 있는가? 이런 극과 극의 차이를 생산하는 지점은 바로, "병의 발명"에 대한 부분이다. 이 발명 지점과 시점이 어디냐에 따라, 과거에는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분류되기도 했고, 정신병이 임상의학적으로 처리되기도 했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분류하고 있는 것 조차도 나중에 바뀔 수 있다. 푸코를 참고하라.)
문제는 이 지점에 대한 판단이 손쉽지 않음에도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모든 것을 처리한다. 대표적인 게 "수량화"다. 건강에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수치적 수명"에 대한 게 되며, 모든 자료는 수명에 연결되어 발표된다. 담배를 한가치 피우면 수명이 몇 시간, 며칠 단축되고... 이런 식으로 과학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를 단행하게 된다.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경제학"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신자유주의가 별거 있나? "경제학"이란 이름으로 "개혁"의 칼바람을 휘두르는 것 뿐이다.)
정신병으로 돌아가자. 정신병에선 병적 상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회성", 즉 "적응"에 맞추고 있다. 즉, 이 사람이 이 사회와 안 맞으면 "정신병자", 그외엔 모두 "정상인"인 것이다. 이 사회의 판별 기준은? "쪽수"일 수도 있고, "과학"일 수도 있다. "정치"일 수도 있다. 이것을 결정하는 게 바로 "지배담론"이다. 매우 간단한 이분법. 사회와 안 맞는 사람들만 줄줄이 모아서 병원에 감금하면 모두 해피하다.
그런데 그들을 어떻게 줄줄이 모아서 병원에 가두는가? 근거없는 짓을 하면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정상인들이 스스로를 배반하게 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의 구세주 정신의학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을 "아픈 상태"로 규정하고, 그 치료를 목적으로(매우 인도적이다!) 활동을 하면 된다.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병이 "발명"된 것이다.
'정신병은 정신이 아픈 거예요.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는 것처럼
정신병이 생기면 신기한 생각들이 콜록콜록 나오는 거란다.'
졸지에 "다른" 사람들은 "아픈"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을 모조리 "정신병동"에 가두고 열심히 사회 적응을 목표로 여러 활동을 펼친다. "우리"와 어울릴 수 있게, "그들"만 변화시키는 것이다. 몇년 동안 콜록콜록 앓던 아이가 어느날 아픈 게 싹 나아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되고, 이 사회에 적응하게 된다. 그를 간호하던 가족과 의료진은 환호성을 지른다. 아아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휴먼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끊임없이 아파야 한다. 평생을 두고 두고 아파야 한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아파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픈 사람들로 인해 우리들은 정상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살아가게 된다. 때로는 아픈 사람들에게 동정도 하고, 치료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아픔"은 계속 이어져 간다.
정말로 "신기한" 건 과연 누구이며, 어떤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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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장문의 답글을 달 수 있는 시스템도 상당히 좋다. 이미 수많은 토론형 게시판이 이 형태를 채택하고 있으며, 여기서 논의되는 이야기들을 보면 상당히 정리되서 표현된다. 인터넷 언론들이 채택하고 있는 방법이 바로 이 두번째 방식이고, 여기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다. "장문의 답글"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과 "장문의 답글"이 써지는 것은 다르다. 실제로 짧은 글을 통해 한줄 답글과 큰 차이가 없는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최근에는 오히려 회원/비회원을 가르는 폐쇄적인 답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게 자칭 열린 인터넷 언론들의 현실이다. (예전에는 분명히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왜 최근에 메이저 인터넷 언론의 한계가 보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세번째, 트랙백을 제안하고 싶다. 물론 트랙백과 기존의 방식은 엄염히 다른 장/단점이 존재하고, 트랙백만으로 국한하자는 것은 또 다시 블로거/비블로거를 나누게 된다. 그저 기존의 시스템에 트랙백도 가능하게만 하자는 거다. 이미 수많은 블로그가 트랙백과(and) 덧글이라는 양 날개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블로그는 1인 미디어"라는 허황된 슬로건을 내거는 것보다는 우리가 정말로 "네트"로 연결될 수 있도록, "노드"가 가능하도록 하는 조건을 생산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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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용 방법

짧은 인용을 할 때는 큰따옴표("), 좀 많은 인용을 할 때는 독립 문단으로 기울임을 줬는데요, 이게 상당히 눈이 아프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hof님의 조언에 따라 박스로 처리하는 걸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포스트는 테스트란 거죠^^)
1099년에 설립된 유럽의 비밀단체, 시온 수도회는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이다. 파리 국립 도서관은 1975년에 기밀문서로 알려진 양피지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작 뉴턴, 보티첼리, 빅토르 위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한 수많은 시온 수도회의 회원들 이름이 있었다.
인용 출처는 요새 잘 나가는 모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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