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비겁하다

어느날인가 꼬맹이 때 친했던 친구랑 같이 술 마시다가 껄끄러운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일명 지방도시의 부르조아 초등학교를 나온 나는 주위의 어릴 적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그래도 한자리씩은 하는 양반들이라... 내가 대학 때 뭐하고 다녔는지 대강 주워들은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질문들을 받곤 한다. 이 친구의 아버님은 의사신데.. 이 녀석이 하도 간만에 보니까, 세월이 흐른 동안 아직도 친구인지 이제는 적인지를 분간하려고 했던지, 턱하니 부유세랑 의보 이야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이 넘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1. 의사라는 직업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2. 그러므로 동일시간 대비 노동의 가치는 더 높은 것이 당연하다 3. 그런데도 진료비가 너무 낮다. 실제로 옷이 몇센치 찢어져도 5000원인데, 살이 찢어진게 3000원이다 4. 이렇게 축적된 자본을 부유세란 명목으로 뜯어가는 것은 부당하며, 빨간완장을 찬 인민군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5. 의보 또한 문제가 있다. 수가 조정으로 오히려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는 음성적으로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6. 진단서의 특정 약품을 잘 모르는 환자에게 약국에서 허튼소리라도 하게 되면 의사의 신뢰가 저하되므로 되도록 더 적합한 약품이 있더라도 브랜드 위주의 약품 선정을 하게된다. 7. 정치하는 놈들 개늠들 입장이 난처해졌다. 사실 의보개혁은 어떤 입장을 띄기 애매한 그 쪽 업계 사정이 얽혀 있었기에 그저 잘 모른다고 하면 넘어갈 수 있었지만. 부유세의 경우 오해가 너무 컸다. 조목조목 짚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20년만에 만난 친구에게 니가 몰라서 그렇다고 쏘아붙이기 미안하기도 했고, 이미 충분히 내가 비겁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맞받아쳤다면 나도 비슷한 주장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 1번의 주장은 당연하다. 의사되기 힘든 거 누구나 안다 2번 주장은 한편 맞고 한편 틀리다. 3번,4번 주장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최근에 의대를 졸업한 의사친구들은 부모님이 의사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크게 분류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대부분 가업처럼 개인병원을 이어 받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마누라를 잘 만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월급받는 의사가 된다. 단순히 의사라서 돈을 많이 받지는 않는다. 지방도시의 경우 돈을 많이 버는 의사는 커다란 개인병원을 가진 대학병원 과장 출신 내과의다. 왜냐하면 인근 군의 나이 많은 농민들, 재래시장 상인들은 몸이 아프면 일단 내과부터 가고, 이름 있는 의사를 찾는다. 대개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기 때문에 브랜드에 더 약하다. 이분들은 대학병원에는 돌팔이 인턴들만 있기 때문에 과장을 못 만나면 아무 소용 없다고 굳게 믿는다. 해서...이미 의사라는 직종 내부에서도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또한 지방도시의 잘나가는 병원의 원장이라면, 대부분 사모님들이 부동산 투자를 꽤 쏠쏠히 하신다. 1차 수입->지역의 저소득층의 진료비, 2차 수입->부동산 이라는 큰 흐름이 존재한다. 따라서 1차 수입만으로 어느정도의 부의 축적은 가능하나, 허나 2차 수입의 경우는 불로소득이므로, 이에 따른 세금은 적절히 책정되어야 하고. 또한 부유세는 상당한 자본을 소유해야 낼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 바, 그렇게 낮은 진료비만으로 부유세를 낼만큼의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부유세는 돈이 많은 계층에게 세금을 뜯어가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지방도시 의사들의 경우처럼 1차 수입의 수입원인 저소득층의 지원에 씌여지므로, 오히려 대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나는 이 친구가 왜 이런 내게 이런 말을 했는지 대강 감이 잡히고, 그 심정도 이해한다. 아버님은 의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계셨고, 자신 또한 그 아들로서 명예와 혜택을 받아온 모든 것이 저 부유세와 의보개혁으로 부정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언론에서 부유세 논란을 얼마나 거짓 증폭시켰고, 또한 그 정확한 목적과 용도에 대한 홍보와 토론이 부족했는가 그리고 불로소득에 대한 높은 세금이 왜 필요한지 얼마나 인식하고들 있는가... 대부분의 돈 있는 의사들은 병원 안 해도 부동산으로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을거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의사들은 계속 의료활동을 할 거라 믿는다. 이미 의사는 그 존재만으로 명예로운 직업이다. 그것까지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의사나 교수나 변호사들의 노동의 가치와 명예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차마 못하고 여기에 쓴다. 나는 참 비겁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